2014. 6. 20.
벌레가 되어도 살 것인가?
카프카는 말한다. 우리 모두는 한 마리의 귀여운 벌레라고. 자신이 벌레임을 자각했든, 아님 평생 모른 채로 인간인줄 착각하고 살았든, 우린 모두 벌레라고. 비대한 몸과 빈약한 많은 다리, 가는 곳마다 족족 흔적을 남기는 끈적한 액체를 흘리고 다니는, 언어도 없고, 사고도 없고, 눈조차 없는 그런 벌레라고, 단지 먹고자 하는 식욕만을 잔뜩 지닌 벌레라고. 우리 모두가 전부 벌레 같은 이세상, 아니 벌레만큼의 대우도 받지 못하는 이 세상, 총체적으로 모든 것이, 너도 나도 전부 다 썩어버린 누런 고름이 줄줄 흐르는 이 세상, 이 세상 속에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벌레인 것이다.
왜 우리는 그렇담 모두 벌레인가?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이 만약 그 하나에게만 국한된 일이었다고 하자. 그 누구도 그렇지 않은데, 세상은 너무나도 평온하고 안락한데 그 혼자만 단지 이상해서 변신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렇게 어처구니 없을 만큼 쉽게 그 커다란 벌레가 그레고르임을, 자신의 사랑스런 아들이자 오빠임을 의심치 않고 그들이 믿는 것이 가능할까? 아닐 것이다. 그 일이 너무나도 보편적인 일이기에, 물론 당연한 일이거나 좋은 일은 아니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그들은 놀라고 경악하지만 그가 그레고르임을 자신의 아들이었고, 오빠였던 자임을 인정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 카프카가 그리는 <변신>속 세계의 변신은 오늘 하루만의, 나란 존재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세계 곳곳에서 누구에게나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우리는 지금 모두 실존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하루아침에 평생 몸 담았던 직장에서 내쫓김을 당하고, 가족에게 소외 당하고, 친구들에게 키가 작다는 이유 하나로 따돌림을 당하는 우리의 현재 모습은 결국 우리 모두가 벌레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간이 하나의 존재로서 대우 받고, 주체로써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구로 수단으로 쓰이고, 그 쓰임이 다했을 때는 매몰차게 폐기처분 당하는 사회. 그것이 바로 <변신>의 세계이고 카프카가 비판한 세계이다. 또한 그 세계에선 가족 마저 더 이상 따뜻한 보금자리가 아니다. 가족마저도 개인을 그의 영혼과 사람됨이 아닌 기능만으로 평가하고, 그 기능이 쓸모없을 때는 손쉽게 그를 벌레로 변신시킨 후 폐기처분 할 수 있는 그런 냉혹한 공간인 것이다.
카뮈가 <이방인>을 통해 전후 흔들리는 인간 실존에 대한 명민한 통찰력과 사고의 깊이를 보여주었다면, 카프카는 <변신>을 통해 추락할 대로 추락해 더 이상 떨어질 그 어떤 나락도 갖지 못한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사실주의와의 결별을 통해 드러냈다. 그 둘은 개인이 진정한 개인으로서 설 수 없는 비참한 시대상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한 것이다. 더 이상 고전 소설의 세계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해체되고 불안정한 세계 속에서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은 과연 어쩔 것인가? 그는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단지 벌레 같은 존재로 내몰임 당하다 죽어야만 하는가? 가족의 생계를 위한 소모품으로 그 기능만을 강요 당하다, 기능이 소멸되었을 땐 가차없이 죽어야만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카프카 그는 자신의 재기 발랄한 상상력을 통해 그려낸다. 즉, 그는 사회 속에서 벌레 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인간을 사실주의적인 기법을 통해 그려낸 것이 아니라, 정말 벌레가 되 버린 인간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현재 인류가 처한 부조리한 상황을 직접적으로 토로하고 그 공포와 소외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는 나즈막하게 그러나 강하게 묻는다. 과연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란 것은 무엇인가? 라고. 개인을 벌레로 만들어 버릴 만큼 개인을 위협하고 소외시키는 사회 속에서 과연 계속 삶을 지속해야 하는 것인가? 라고.
대답은 자신에게 달려있다. 다시 처음으로. 벌레가 되어도 살 것인가?
카프카는 말한다. 우리 모두는 한 마리의 귀여운 벌레라고. 자신이 벌레임을 자각했든, 아님 평생 모른 채로 인간인줄 착각하고 살았든, 우린 모두 벌레라고. 비대한 몸과 빈약한 많은 다리, 가는 곳마다 족족 흔적을 남기는 끈적한 액체를 흘리고 다니는, 언어도 없고, 사고도 없고, 눈조차 없는 그런 벌레라고, 단지 먹고자 하는 식욕만을 잔뜩 지닌 벌레라고. 우리 모두가 전부 벌레 같은 이세상, 아니 벌레만큼의 대우도 받지 못하는 이 세상, 총체적으로 모든 것이, 너도 나도 전부 다 썩어버린 누런 고름이 줄줄 흐르는 이 세상, 이 세상 속에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벌레인 것이다.
왜 우리는 그렇담 모두 벌레인가?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이 만약 그 하나에게만 국한된 일이었다고 하자. 그 누구도 그렇지 않은데, 세상은 너무나도 평온하고 안락한데 그 혼자만 단지 이상해서 변신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렇게 어처구니 없을 만큼 쉽게 그 커다란 벌레가 그레고르임을, 자신의 사랑스런 아들이자 오빠임을 의심치 않고 그들이 믿는 것이 가능할까? 아닐 것이다. 그 일이 너무나도 보편적인 일이기에, 물론 당연한 일이거나 좋은 일은 아니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그들은 놀라고 경악하지만 그가 그레고르임을 자신의 아들이었고, 오빠였던 자임을 인정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 카프카가 그리는 <변신>속 세계의 변신은 오늘 하루만의, 나란 존재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세계 곳곳에서 누구에게나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우리는 지금 모두 실존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하루아침에 평생 몸 담았던 직장에서 내쫓김을 당하고, 가족에게 소외 당하고, 친구들에게 키가 작다는 이유 하나로 따돌림을 당하는 우리의 현재 모습은 결국 우리 모두가 벌레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간이 하나의 존재로서 대우 받고, 주체로써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구로 수단으로 쓰이고, 그 쓰임이 다했을 때는 매몰차게 폐기처분 당하는 사회. 그것이 바로 <변신>의 세계이고 카프카가 비판한 세계이다. 또한 그 세계에선 가족 마저 더 이상 따뜻한 보금자리가 아니다. 가족마저도 개인을 그의 영혼과 사람됨이 아닌 기능만으로 평가하고, 그 기능이 쓸모없을 때는 손쉽게 그를 벌레로 변신시킨 후 폐기처분 할 수 있는 그런 냉혹한 공간인 것이다.
카뮈가 <이방인>을 통해 전후 흔들리는 인간 실존에 대한 명민한 통찰력과 사고의 깊이를 보여주었다면, 카프카는 <변신>을 통해 추락할 대로 추락해 더 이상 떨어질 그 어떤 나락도 갖지 못한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사실주의와의 결별을 통해 드러냈다. 그 둘은 개인이 진정한 개인으로서 설 수 없는 비참한 시대상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한 것이다. 더 이상 고전 소설의 세계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해체되고 불안정한 세계 속에서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은 과연 어쩔 것인가? 그는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단지 벌레 같은 존재로 내몰임 당하다 죽어야만 하는가? 가족의 생계를 위한 소모품으로 그 기능만을 강요 당하다, 기능이 소멸되었을 땐 가차없이 죽어야만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카프카 그는 자신의 재기 발랄한 상상력을 통해 그려낸다. 즉, 그는 사회 속에서 벌레 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인간을 사실주의적인 기법을 통해 그려낸 것이 아니라, 정말 벌레가 되 버린 인간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현재 인류가 처한 부조리한 상황을 직접적으로 토로하고 그 공포와 소외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는 나즈막하게 그러나 강하게 묻는다. 과연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란 것은 무엇인가? 라고. 개인을 벌레로 만들어 버릴 만큼 개인을 위협하고 소외시키는 사회 속에서 과연 계속 삶을 지속해야 하는 것인가? 라고.
대답은 자신에게 달려있다. 다시 처음으로. 벌레가 되어도 살 것인가?
셜록 홈즈의 저자 코넌 도일(Doyle, Arthur Conan)
[도서]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오찬호, 2013, 개마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