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의 전남도청 집단 발포 후, 전남도청에 배치된 7공수여단, 11공수여단은 21일 16:00에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여 지원동 주남마을, 녹동마을에 주둔하며 지나가는 차량의 차량 통행을 봉쇄하였다.
5월 23일 오전 주남마을을 지키던 11공수여단 62대대 4지역대 병사들이 지나가던 버스에 발포를 한 다음 강가에 빠트려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 15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하였다. (11공수여단은 15명을 사살했다고 보고)
이 사건의 피해자 중에는 손옥례, 고영자, 김춘례, 박현숙 등 10대 여성 4명도 포함되었는데, 당시 손옥례의 시신에서는 대검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좌유방자창이, 박현숙의 시신에서도 자창이 발견되었다.
23일 오후 11공수여단 62대대 5지역대 소속 병사 몇 명이 부상자 3명 중 남자 2명을 주남 마을 뒷산으로 끌고가 총살하였다. 국방부 과거사위의 관련자 면담에 따르면, 본부의 모 소령이 부상자를 데려온 것을 책망하자 11공수여단 62대대 5지역대 ○지대 모 중사 등 3명이 부상자를 처리했다. 인근 야산 중턱으로 리어카를 몰고 간 병사는 누군가가 안락사를 시키자고 한 후 사살했고, 묻고 났을 때는 해가 질 무렵이었으며 해당 버스는 시신과 함께 강가에 추락시켜 단순 추락 사고로 처리했다고 증언했다.
지원동에서는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 및 추락사건 이외에도 적십자 활동을 하고 있던 차량에 대한 발포 후 차량을 전소시켜 화재로 인한 교통사고로 위장한 사건, 트럭 운전사를 살해한 후 너릿재 터널에 트럭을 밀어 넣고 소각해 화재로 인한 교통사고로 위장한 사건도 있었다.
그 외에도 담양으로 나가는 광주교도소, 장성으로 나가는 광주 톨게이트, 나주로 나가는 송정리 공군 부대의 시 외곽을 봉쇄하였고, 시민들의 출입을 완전히 통제하였으며, 여기서 평소 시외를 드나들던 시민들이 많이 희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