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판 광주 민주화운동 '천안문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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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판 광주 민주화운동 '천안문 사태'


2017. 6. 6.

중국은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화궈펑이 집권했으나 10년간 지속된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을 수습하기에는 지도자적 역량이 부족했다. 그리하여 광범위한 당내외의 지지를 받아 덩샤오핑이 떠올랐고, 덩샤오핑은 화궈펑을 압박하여 당총서기에서 사임하게 함으로서 대권을 장악하였다.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을 청산하고 개혁개방을 추진하였으나, 개혁개방 초기에 있었던 개혁 조치는 여러 불만을 야기하였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면서 민영화와 자율화로 인한 이권 때문에 하급관료의 부패는 날이 갈수록 커졌으며, 사상 초유의 인플레이션과 더불어 일자리를 무조건 보장하던 예전 사회주의 체제에서 구직에 어려움이 따르는 등 실업 문제도 가중되었다.



특히 개혁개방으로 사회적 기강이 풀리면서 범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에 덩샤오핑은 1983년 "엄타 (嚴打:준엄하게 처벌한다)"는 모토로 반부패운동을 포함한 중국판 범죄와의 전쟁을 개시하였다. 이 당시 웬만한 범죄는 모조리 사형선고를 받았고, 체포에서 처형까지 이르는 시간도 1주일로 단축되었다. 엄타 기간중에 처형자수는 1년에 2만명에 달한다는 설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강력-신속한 처벌도 범죄단속에는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지만 부정부패는 다스릴 수 없었다. 특히 유전무죄 유권무죄가 부각되면서 학생층들의 공산당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갔다.

1988년 5월 30일 중앙정치국이 확대회의를 소집해서 가격 개혁과 임금 개혁 시행이라는 '난관 돌파책'을 결정했다. 이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따라 높은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이후 당내의 개혁에 관한 의견이 명확히 갈렸다. 정국은 덩샤오핑의 지지 아래 개혁을 심화하면서 개혁에서 나오는 문제를 해결하고 지속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하는 자오쯔양 외 개혁파와, 천윈의 지지 아래 개혁의 심화를 잠시 멈추고 정비와 조정을 하자는 리펑 등의 보수파로 나뉘었다. 이들의 명칭에 대해 알아두어야 할 점은, 개혁파는 공산당 일원의 독재체제를 완화하고 고쳐나가자는 세력이고 보수파는 독제체제를 계속 유지하자는 세력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전자를 지지하고, 후자를 배격했다. 그러던 중 리펑은 총리로 취임한 뒤 1988년 9월 공산당 13기 3중 전회에서 "경제 환경을 정비하고 경제 질서를 조정하고 개혁을 전면 심화하자" 라는 정책 조정안을 제기했는데, 이것은 자오쯔양의 개혁 노선을 수정하고 나아가 개혁파의 권위를 깎아내리겠다는 술책이었다. 당 내의 이 결정으로 사회 전반에서는 보수파의 부상에 대한 염려와 우려가 일어났다!!!!

4인방의 실각 이후 공산당 내는 물론이고 사회 전반에 현재의 중국에 대한 강력한 성찰이 일었다. 그 결과 문화대혁명의 재난이 중국의 일당독재 정치 제도에서 오는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사회 전반에서 사상 해방을 요구하고 민주화를 추진하고 정치개혁을 하자는 목소리가 줄곧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정부의 정책에 실망한 대중들은 서서히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개혁개방을 실시한 중국 정부에 대한 대중들, 특히 대학생 층의 불만이 늘어났다.

여기에 개혁개방으로 서서히 들어오는 동서방의 문물을 보고 대중은 각성하기 시작했다. 같은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다당제를 보장하고, 자유를 확대하는 조치를 내놓고 한국의 민주화 운동도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런 사회적 배경 하에 학생과 시민들은 중국공산당에 전면적인 민주화 조치와 대대적인 부정부패 척결을 주장하며 대내외적으로 활발한 학생운동을 벌였다.

여기에 마오쩌둥 시절까지는 대학 등록금과 기숙사비, 식비 모두 무료였는데, 개혁개방 이후 대학이 기숙사비와 등록금을 받기 시작하면서 집안의 경제사정이 좋지않던 대다수 대학생들은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만 갔다. 당시는 개혁개방 초기였지만, 벌써부터 부동산 투기와 같은 막장 자본주의 행각으로 떼돈을 번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대다수는 개발 정보를 독점하고 부정부패한 관료들 혹은 관료의 친인척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빈부격차가 눈에 띠게 늘어나자, 대학생들은 점점 정부에 사회정의를 요구하게 되었다.


덩샤오핑의 심복이었던 후야오방(胡耀邦) 당총서기는 이러한 민주화 요구에 매우 동조적이었다. 이전부터 후야오방은 당 고위 간부들과 그 친인척의 부패에 재갈을 물리려고 해 원로들이 불만을 가졌는데, 민주화 요구에 동조적인 것에 원로들이 반발한 것을 계기로 1987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를 덩샤오핑의 다른 심복이었던 자오쯔양이 이어받았다. 자오쯔양도 후야오방과 마찬가지로 개혁파였지만, 학생운동은 더욱 격렬해졌고, 전국 각지의 대학교에서는 민주화 서클이 활발히 활동하였다. 마치 1980년대 초반의 한국의 대학교들과 비슷한데, 실제로 당시 시위의 지도자는 한국의 1987년 6월 항쟁이 천안문 저항의 모델이었다고 술회했다.

1989년 후야오방은 정치국 회의 도중 발언을 막 끝내고 자리로 돌아오던 중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4월 15일 사망했다. 후야오방의 사망을 기점으로 베이징에서는 지식인들과 대학생, 노동자들을 주축으로 하여 민주화 요구 시위가 빈번히 일어났는데 베이징대학과 베이징사범대학 학생들이 특히 이 시위의 주축이 되었다. 학생들의 시위는 단식투쟁으로 시작해서 그 모습에 자극받은 각계 각층의 시민들이 참여하고, 마침내 전국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이 합류하면서 천안문 광장에는 10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리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의 미래를 결정한 천안문 6.4 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후야오방의 사망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학생들과 시민들이 인민영웅기념비로 추모를 위해 몰려들기 시작했으며, 수백 명의 대학생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중국 정법 대학교의 약 600여명의 대학원생들과 청년 교사들이 스스로 만든 화환을 들고 진혼곡을 부르면서 천안문 광장까지 행진했고, 약 60여명이 후야오방의 집에 문상을 갔다. 오후 3시 베이징 대학교 역사학과 학생 왕단이 교내에서 530위안을 모금해서 화환을 사 40여명의 천안문 광장으로 보냈고, 후야오방의 집에 추도하러 갔다. 24시부터 베이징 대학교, 베이징 사범대학교, 정법 대학교, 칭화 대학교 등 베이징 대학교 소재 약 6,000여 명이 각자의 학교로부터 행진을 시작해서 천안문 광장에 집결한 뒤 후야오방에게 화환을 바쳤다. 그리고 수만 군중들이 정좌한 상태에서 후야오방에 대한 정확한 평가, 공무원의 직권을 남용한 불법 전매에 대한 처벌 등에 대한 내용을 담은 '7개조' 요구를 내놓았다.

그후 후야오방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시안(西安)에서는 군중 300여명이 10여 대의 차량에 불을 지르고 성(省) 정부를 습격. 구호는 ‘공농(工農)과 연합해 폭정을 타도하자' 였으며 시위는 점점 내륙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덩샤오핑(鄧小平), 시위 커지자 북경 시위 통제 지시.' 인민일보는 이 날짜 사설을 통해 시위대와 근로자, 농민공 시위를 ‘반혁명 폭란'으로 규정했다.

1,000여 명의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을 시작했다. 학생 대표들이 <단식서>를 작성해 전국 인민들에게 발표했다. 이 글을 읽은 인민들은 학생들의 마음에 감동을 받아 시위대에 점차 동조하게 된다.


5월 15일에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방중하기로 했으나 이 시위로 인해 일정이 늦춰졌고, 시위대들 때문에 천안문 앞의 장안가(長安街)를 통과하지 못하고 뒷길로 돌아 숙소인 베이징 서쪽의 조어대(釣魚臺)로 향했고, 회담을 하면서도 광장과 거리의 시민들과 시위대가 내는 소리가 커지는 등 중국 지도자들로서는 대단히 창피한 일이 벌어졌다. 특히 개혁개방으로 타임지에 두 번이나 올해의 인물로 선정이 된 덩샤오핑에게는 더더욱 얼굴을 붉힐만한 일이었다. 거기다 중-소 국경분쟁에 중월전쟁으로 전통적인 공산주의 우방국들과의 관계가 개판인 것을 추스르고 중-소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소련의 서기장을 직접 내방한 역사적 상황에서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한 중국 공산당은 이 사태를 난동으로 규정한다.

5월 18일 베이징 일부 지역에 한정해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오전 11시 인민대회당에서 중국 공산당 원로들은 우얼카이시, 왕단 등 학생 측 대표와 전격적으로 면담을 가졌다. 신임 총리 리펑은 당내 강경파들을 대신해서 학생들을 강한 어조로 설복시키려 했으나, 학생 지도층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리고 당일 당내 회의에서 계엄령을 선포하기를 결정했고, 덩샤오핑은 출동명령서에 사인했다. 오직 쉬친셴(徐勤先, 당시 중장)만이 "인민해방군은 인민에게 총부리를 돌릴 수 없다."라며 출동을 거부했는데, 그는 군법에 의해 직위해제 처분되어 소식이 끊겼고, 서방에서는 사형에 처해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실제로는 명령불복종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5년형을 받고 이후 스자좡(石家圧)시에서 거주지 제한조치에 취해졌다고 한다. 사건 20여 년 후 홍콩언론인 <빈과일보>가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가 인터뷰했는데, 그는 군인연금도 끊기는 등, 상당히 어렵게 살고 있었음에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그 때로 되돌아가도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당총서기 자오쯔양은 5월 17일 북한 평양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하지만 결국 5월 20일 발효될 계엄령을 막지 못하고 19일 새벽 4시 45분에 "죄송합니다, 여러분.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상황이 아주 안 좋습니다. 제발 광장을 떠나주십시오!"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그리고 병가를 사유로 사임장을 제출하고 공산당을 떠났지만, 결국 체포된 이후 2005년 사망할 때까지 가택연금되었고, 2016년 현재까지 복권되지 못했다. 이후 몇 차례 덩샤오핑은 마음을 돌려보려 시도했지만, 그는 죽을 때 까지 천안문 사건에 대한 입장을 선회하지 않았다....잠시묵념.


1989년 5월 20일, 마침내 '계엄령이 선포된다.' 중국 당국은 계엄령을 내린 후 약 5만명의 대군을 베이징에 투입했으나, 예상 외로 시민들과 학생들의 강한 저항으로 교외에 머물러야 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계엄 집행의 임무를 받은 인민해방군 장교들은 텔레비전, 신문, 라디오 등을 보고 듣지도 말고 오직 공산당이 발표한 <4.26 사설>만을 보도록 명령받았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군중들을 진압하는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한편 이 시기 시위대에게 포위된 인민해방군에게 시위대측은 군인들에게 시위대를 지지하기를 호소했고, 시민들은 오히려 포위된 병사들에게 물과 음식을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반대로 진압명령이 떨어지기 전 천안문광장에서 단식투쟁 중이었던 학생이 탈진해 쓰러지면 군의관이 돌보거나 군차량으로 병원에 후송시키곤 했다. 이렇게 군과 인민이 서로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고, 1970~80년대 악랄한 정부의 민주화 시위 탄압을 겪은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중국이 공산 국가라지만 저렇게 국민을 사랑하는 점은 배워봄직하다."라는 여론이 강세였으나 그 끝은...


결국 중국 공산당은 바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계속 군중들에게 천안문 광장을 비울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군중들은 해산하지 않았고, 결국 당내에서는 강경파들이 득세하게 된다. 시위대 내부의 지도층에서도 군대가 베이징 시내를 장악하자 위험을 느끼고 해산할 것을 논하기도 했으나,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결국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강경 급진파 세력이었다.

후난성에서 온 세 사람이 천안문 마오쩌둥 초상화에 페인트를 뿌리고 성루 벽에 ‘독재는 종식되어야 한다’, ‘개인 우상화는 종식되어야 한다’라는 현수막을 붙여놓아 당국에 연행되었다. 각각 버스회사 직원, 신문사 디자인 편집국장,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들은 당시 당국에 탄압의 구실을 잡힐까 두려워했던 대학생들에 의해 공안에 연행되었다.

베이징 소재 여덟개 예술대학 교원들과 학생들이 공동 제작한 '민주주의의 여신상'이 새벽 천안문 광장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높이 8미터, 직경 2미터 남짓했다. 받침돌은 석고로 제작되었고 전체는 발포수지로 제작되었다.

중국공산당이 세계 언론들의 라이브 방송을 제한하고 시위사진과 인민해방군의 사진도 찍는 것을 금지했다.

진압군을 설득하는 시민들

명령을 하달받자 즉시 출동하는 중국인민해방군


그리고 운명의 6월 3일 밤, 무력 진압명령이 떨어졌다. 중국 공산당은 6월 4일 새벽 6시까지 일체의 예외 없이 시민들을 천안문 광장에서 해산시키기를 명령했고, 밤 10시 베이징 동서에서 진입한 인민해방군 제38집단군과 공군 제15공수부대, 육군 제39집단군, 육군 제54집단군 등은 전차와 총기를 동원한 무차별 발포로 군중을 강제해산시켰다. 먼저 비무장 군인들이 도열해서 전진했으나 시민들의 저항에 후퇴했고, 그 다음으로는 곤봉을 든 채 접근했다가 마찬가지로 후퇴했으며, 끝내 경기관총과 소총으로 시위대에 발포했다. 군인들 뒤에는 탱크와 장갑차가 전진했다. 장갑차 위에 탄 군인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하늘에 대고 총을 쏘다가 시민들이 보이면 총구를 시민 쪽으로 들이대서 거부감 없이 쏴죽였다. 그리고 잔인하게도 도망가는 시민들까지 탱크를 몰고가서 짓밟아 죽였다고 한다. 더 무서운 것은 시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집에서 쉬고있던 시민들도 사살당하거나 부상당했다는 것이다. 군대가 일반 가정집에도 총을 난사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심지어는 외국인 전용 거주구역에도 총을 난사했다고 한다. 


베이징 위수 지역 군인들은 경찰과 더불어 시민들에게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진압 과정에서 차출된 해방군 부대는 베이징에 지인이 없고, 베이징 시민에게 무차별 발포하는 데 큰 저항감이 없을 가능성이 큰, 신장 자치구 등 베이징 외 지역 군인이 대부분이었다. 현장에 투입된 인민해방군들은 군부의 통제에 의해 베이징의 실상을 모르고, 당에서 주입한 강령과 명령을 지속적으로 교육받았다. 거기다 베이징 시민들의 보통화를 타지 출신인 이들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시민들은 격분해서 돌과 화염병을 투척해 저항했다. 버스나 택시 등을 동원해 전차가 도심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고 돌과 벽돌을 던지고 화염병으로 전차와 장갑차를 폭파시키고 전차병을 끌어냈다. 그들이 끌어낸 군인들은 격분한 시민들에 의해 무차별 구타를 당해 맞아 죽었고, 시민들은 시체를 질질 끌고다니면서 불을 붙여서 다리에 매달거나 버스 채로 태워버리기도 했다. 총탄에 맞아 다친 부상자들은 시민들이 자전거와 수레에 실어 병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파시스트 정권 물러가라! 덩샤오핑은 학살자다! 정신이 있는 거냐? 형제같은 학생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다니!"라고 외치는 시민들로 거리는 가득했다. 중국의 양심 의사라고 불리는 장옌융의 증언에 의하면, 이 때 진압군은 국제적으로 사용이 금지되는 덤덤탄을 썼다고 하는데, 덤덤탄이란 탄환의 관통력을 낮춰 대인 제압, 살상 능력을 높힌 탄환이다. 이때 광장에서는 학생들이 '민주대학'이라는 사설 기관을 설치해 서로 교수로 임명하고 있었다.


결국 시민들의 저항을 뚫고 천안문 광장에 진입한 인민해방군은 대학살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류샤오보를 포함해 광장을 지킨 학생 지도층들을 상대로 협상을 제시했다. 인민해방군은 먼저 광장의 조명을 모두 꺼버린 다음, 저항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광장에서 해산한다면 시민들을 더 이상 죽이지 않고 진압을 끝내고, 학생 시위대를 무사히 보내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죽여버리겠다고 했다. 말하자면 시민들의 목숨을 인질로 삼은 것이다. 이때 강경파를 제외한 다른 학생 시위대는 협상을 받아들여 해산했다. 남겨진 사람들은 잔인하게 학살당했고, 시위대가 세운 거대 조형물인 '민주주의의 여신상'은 전차로 뭉개졌다. 강경파의 리더 차이링의 증언에 의하면 사실 복지부동인 중국 공산당의 태도에 실망해서 5월 말을 전후로 많은 대학생들이 광장을 빠져나갔으나, 아직 많은 수의 대학생들이 단식 투쟁을 하고 있었고 천막 안에서 더위에 지쳐 누워 자고 있던 많은 대학생들이 탱크에 깔려서 산 채로 뭉개졌다고 한다. 그리고 협상 후에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 여러 명을 장갑차가 뭉개버렸다.

이 사건의 이름은 '천안문' 사건이지만 사실 사망자의 대부분은 베이징 전역에서 이뤄졌는데, 이것은 위에 전술했듯이 베이징 전역에 배치된 중국인민해방군이 진압 명령이 떨어지자 실탄으로 무장하고 탱크와 중화기를 동원해서 거리에 가득한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하며 광장을 장악하려 한 것 때문이다. 따라서 시위대뿐만 아니라 시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비무장 시민들을 학살한 이 사건은, 해외 학자들에게 베이징 대학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6월 4일 악몽의 밤이 지나가고 시위대는 대부분이 해산되었다. 광장에 남은 학생 시위대에게 정부 측에서 나온 지식인들이 협상을 하자며 다가왔다. 시위대에게 시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해산을 강권했고, 이후 시위 지도층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걸어 학생들은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이 약속을 저버리고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배되어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 학생지도부 대표인 왕단, 훗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류샤오보 역시 이 중 한 사람이었다.


이 날은 베이징 전체가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거리 곳곳에는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짓밟히고 있었다. 도로에는 차가 다니지 않고 탱크와 장갑차가 지나다녔다. 날은 밝았고 창안제는 전부 진압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그때까지도 저항하는 시민들은 군인들에게 무자비하게 짓밟혔다. 광장과 거리에는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었고 전소된 탱크와 장갑차, 차량들이 버려져 있었다. 도시 곳곳에는 분노한 시위대가 죽인 진압군의 시체 여러 구가 그슬려지고 훼손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심지어 다리에 목을 매달아 전시해 놓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탱크에 깔려죽은 죄 없는 시민들의 시체와, 총에 맞아 죽은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시민들의 시체가 대부분이었다. 시체들은 군인과 민간인을 막론하고 인민해방군이 비닐팩에 담아 증거인멸을 위해 모조리 수거해서 어디론가 운반해갔다. 도심 곳곳에서 시체들과 유류품을 태우는 연기로 가득했다.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실종되었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탱크맨의 등장


위 사진은 AP통신의 사진기사 제프 와이드너가 찍은 사진이다. 그는 3일에서 4일을 기점으로 무력진압이 거세지자 기록을 남기려 창안제가 내려다보이는 베이징 호텔로 향했다. 호텔은 경비가 삼엄했고, 가까스로 6층 호텔방에 투숙중이던 미국 대학생 커크 마첸을 설득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사건 당시 CNN 스탭이 촬영한 영상. 주변 기자와 시민들의 반응을 들을 수 있는데, 전혀 예상못한 상황에 놀라고 난 뒤에는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천안문 항쟁의 아이콘은 단연 인민해방군 전차를 막아선 시위대측 남자, 일명 '탱크맨'이다. 이 사람은 왕웨이린(王維林)이라는 가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천안문 6.4 항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주인공이다. 악몽의 6월 3일 밤부터 6월 4일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유혈진압이 마무리되고, 탱크가 천안문 광장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를 하는 상황이었다. 시민들은 당연히 겁에 질려 도망쳤으나, 수십 미터 밖에서 진격해오는 59식 전차들을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양 손에는 검은 비닐봉투와 옷가지를 든 어떤 사람이 단신으로 막아냈는데, 영상을 보면 저 사람이 막은 전차가 한두대가 아니었고 가만히 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전차 조종수들이 차마 저 사람을 깔아뭉개고 갈 수 없었는지 옆으로 피해서 지나가려하자, 이번에는 전차가 피하는 방향으로 뛰어가면서 그야말로 몸을 던져 막았다! 그런가 하면 전차 위로 올라가서 조종사석에다 대고 무언가 말을 하려 했으나, 몇몇 시민들이 달려와 데려가면서 위험한 상황이 끝난다. 이 상황에 대해서는 주변에 포진해있던 사복 경찰들이 위험한 상황을 막기 위해 달려와서 떼어놨다는 설도 있지만 최근 공개된 6.4 항쟁 관련 사진 중에 자신과 똑같은 흰색 셔츠를 입고있는 사람과 같이 몸을 피하고 있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이른바 탱크맨으로 불리는 왕웨이린은 대만으로 건너가 살아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다만 이는 중화권 언론을 인용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100% 밝혀진 바 없고 오히려 진압 직후 중국 당국에 체포되어 복역중이라거나 이미 처형당했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답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중국어로 사진 속 장면 자체에 대해서만 얘기하면서 말을 돌리다가, 갑자기 영어로 "그 사진이 증명해준다. 그는 탱크에 깔려죽지 않았다."는 답변을 한다.


그러자 월터스는 좀 더 직설적으로 체포 혹은 처형에 대한 질문을 하고, 이에 표정이 굳어진 장쩌민은 중국어로 "그 사람이 체포되었는지 여부는 확인해줄 수 없다."고 답한다. 재차 질문을 받은 장쩌민은 마침내 "하지만 내 생각에는..... 죽지 않았다.(But I think..... never killed.)"라고 영어로 답변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월터스를 향해 다소 신경질적인 어조로 다시 한 번 똑같은 답변을 한다. 즉, 왕웨이린에 대한 서방측의 의구심을 분명하게 부정한 셈. 무엇보다도 중국 내부의 정보를 꿰고 있는 정부 수반이 구태여 사망설을 부정했다는 것은 결국 해당 인물이 중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음을 암시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왕웨이린은 저 시점에서 이미 대만에 망명한 것이 정설인 셈. 소문에 의하면 탱크맨은 중국에서 안전하게 살아있다고 한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TIME)이 선정한 20세기의 인물 2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등재되었다.

6.4 항쟁 진압 과정에서 인민해방군 전차가 깔아뭉개 죽인 사람들은 엄청 많다. 당시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동안 그래왔듯이 아무 생각없이 탱크맨을 무자비하게 밟고 지나갔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탱크맨을 밟고 지나가지 않은 것은 해당 전차장과 해당 부대 지휘관이 굉장히 판단을 잘 한 것이다.

우발적으로든 고의적으로든 탱크맨마저 전차가 밟고 지나갔다면... 저 사진이 퓰리처 상을 받은 사진임을 생각해보라. 탱크맨 사진 자체도 충격적인대 후속 기사로 처참하게 짓밟힌 탱크맨 사진이 보도된다? 그 즉시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가 전세계적으로 매장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시위진압도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고...

어찌보면 덩샤오핑은 정말로 운이 좋았던 것이다.

5월 29일에 대학생들의 주도로 건립된 조형물이다. 폴리에스테르수지로 만들어진 이 석상은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을 본따 만들어진 것으로 '민주주의의 여신'으로 불렸으며, 공산당의 독재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이루겠다는 민중들의 뜻을 형상화하는 의미에서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위치에서 제작되었다.

하지만 불과 4일만에 이 석상은 탱크에 의해 분쇄되어 철거되었다.

홍콩중문대학교의 여신상.



여신상은 많은 사람들이 탱크맨과 더불어 천안문 항쟁의 상징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철거된 원본을 본따서 1996년 6월에 홍콩 빅토리아 공원, 1994년에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 타운, 캐나다의 요크 대학교와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 등 세계 각지에 모본들이 세워졌다.

천안문 사건 일 주일 뒤, 시위를 주도한 자들에게는 당초 약속한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을 뒤집고 대거 수배령이 떨어졌다. 특히 다수의 학생 시위대를 겨냥한 21명의 블랙 리스트가 언론 매체에 퍼졌다. 많은 지식인들이 이 시기에 잡혀들어가 중형을 언도받거나 국외로 추방되었고, 혹은 외부 세력의 도움을 받아서 국외로 망명했다. 이들을 돕기 위한 망명 작전이 바로 '카나리아 작전'이다.

카나리아 작전은 서방 국가나 홍콩, 대만 시민들과 민주화에 찬성하는 남중국 시민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많은 수의 해외 인권운동가, 저널리스트, 중국 학자들과 뜻있는 시민들이 이 시기 반체제 지시인들을 위해 비자를 발급해주고 비행기나 배 등의 수단으로 망명할 수 있도록 도왔다. 후술할 우얼카이시와 차이링 또는 탱크맨 등이 이 작전의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지명수배 1호였던 베이징대 역사학과 1학년 왕단(王丹)은 1991년에 열린 재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는 1993년에 가석방되었지만 1995년에 체제 전복 기도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고 1996년에 열린 재판에서 징역 11년형을 선고받았다. 1998년에 빌 클린턴의 요청으로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어 질병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망명해,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대만의 타이완국립대학의 정치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교단에 서게되었다. 현재는 동오대학에서 교편을 잡고있다. 참고로 미혼이며, 친중단체에서는 이걸 빌미로 동성애자가 아니냐며 시비를 걸기도 했다. 더불어 덩샤오핑의 강경진압은 사정없이 비판하지만, 경제정책에는 어느정도 긍정적인 면을 보이며, 나아가 덩샤오핑 파벌에서 싫어하는 마오쩌둥의 업적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2017년 6월에 대만 내 활동을 마치고 미국으로 복귀할 예정이다.

지명수배 2호였던 베이징사범대학생이자 위구르족 출신인 외르케슈 될레트(Uerkesh Davlet), 중국명 우얼카이시(吾尔开希)는 시위 이후 홍콩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해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하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다. 이후 대만에서 거주하며 라디오 DJ와 작가생활을 하면서 여생을 보내는 중이다. 여러번 홍콩을 거쳐 고향에 있는 부모님을 찾아보려 했지만, 중국 정부의 거절로 번번히 실패했다. 이후 2016년 군소 정당 소속으로 대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위구르 족 출신이면서도 근현대 중국의 역사에 이름을 알린 흔치 않은 사례인데, 시위를 이끌 당시만 해도 한외모 해서 어디가서 연설만 해도 여자들이 눈을 부릅뜨고 경청을 했다 한다. 상당한 강경파 성향으로 학생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리펑 총리가 직접 찾아오자 그에게 대화 주제는 자신들이 정할테니 듣기만 하란 식으로 매우 고압적으로 압박했고 조영남 교수는 이를 '건방진 태도'였다고 표현했다.

고 있다. 차이링은 미국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중국에서 매일 3500여명의 여아가 강제낙태되고, 500여명의 여성이 자살을 선택한다”며 중국의 여성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2012년에는 학살의 주범인 덩샤오핑과 리펑, 그리고 천안문 광장에 쳐들어온 군인들 모두를 용서한다고 밝혔다. 차이링 스스로가 기독교적 신앙에 따라 원수를 용서하겠다는 취지인데, 당연히 왕단과 우얼카이시 등 기타 반중세력에게 항의를 받자, 개인적인 용서일 뿐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중국 공산당에서는 폭도들을 진압한 인민해방군 측에 공로를 치하하며 인민해방군 1,000명이 희생되었으나 폭도들은 고작 27명이 죽었다고 당초 보도했지만, 이후에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가 1990년 7월 10일 제5차 국무원 보고에서 정식 발표한 것에 의하면,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4,550명이었으며, 군인과 전경은 56명이 사망, 7,525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다만 뉴욕 타임스 지에서는 400명에서 800명, NSA에서는 약 1,000명, 중국적십자에서는 2,600명, 시위대의 주축을 이룬 학생들은 7,000명이 넘게 죽었다고 하며, 부상자 수는 진압에 나선 중국 인민해방군을 포함해 약 7,000명에서 10,000명으로 추산된다.

정치권에서는 시위 진압 명령을 하달한 총리 리펑이 덩샤오핑을 이을 후계자로 부상하는 듯 했으나, 덩샤오핑은 오히려 당시 상하이 시장이었던 장쩌민을 중앙 정계로 진출시킨다. 그리고 덩샤오핑에 이어 중국의 주석자리에 취임하게 된다.


천안문 민주화 시위 사태에 참여해온 정치범 가운데 마지막까지 복역해온 먀오더순 씨가 27년만에 2016년 10월 15일에 출옥한다고 보도했으며, 석방 일시를 공식 확인해주지는 않고 있다.

천안문 사건으로 개혁, 개방 개시 이후 서구, 일본 등의 선진국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경제성장을 꾀하던 중국 공산당에게는 이 사건은 대내외적으로 큰 충격을 몰고왔다. 이후 중국 공산당은 먼저 선린우호 전략을 내세워서 아시아의 주변 국가와 국교를 맺는 전략을 취했다. 1992년의 한-중수교도 바로 이러한 중국 전략 변화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내부적으로 중국은 국가 내 사회영역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국내 역량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으며 체제 안정과 제도의 정비를 국내 정책의 최우선으로 삼게 된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과 일본은 이 사건을 비인도적인 민주주의 탄압 행위로 규정하고 비난 성명을 냈다. 미국은 먼저 정부 및 민간의 대중 무기수출 중지와 양국간 군사관계자들의 상호방문 정지를 첫 제재 조치로 내세웠다. 그리고 재중 중국인 유학생들의 비자신청을 연장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무력진압으로 부상당한 사람들에게 국제적십자를 통한 의료 원조도 계획하고 있다고 밝힌 한편, 이 제재가 일시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혔다. 추가로 6월 23일 미 의회에서 컴퓨터, 무기, 인공위성의 수출을 대폭 삭감하고 동시에 융자의 감축을 요구하는 수정방안이 제출되었다. 또한 국제무역에서 중국의 최혜국 대우(MFN) 지위를 인권 문제와 연계하며 인권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을 때는 최혜국 대우를 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그러나 미국은 향후 미중관계를 고려하여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유럽권에서는 프랑스가 가장 먼저 대중 제재에 나섰다.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 축제의 열기가 뜨겁던 6월 6일, 프랑스의 로카르 총리가 프랑스 정부와 중국 지도층의 접촉을 필두로 모든 차원의 대중 접촉을 동결시켰다고 발표했다. 이후 중국 주재 모든 프랑스 외교관들의 수도 가능한한 최소한으로 감축할 것을 표명했고, 7월 13일 미테랑 대통령은 G7 정상회담에서 미국, 서독,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 등의 지도자에게 중국을 격렬히 비난하고 대중제재를 위한 공동 보조를 제의했다. 프랑스는 이외에도 티베트 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나라라서 중국은 프랑스를 여전히 좋게 보지 않는다.

일본은 이 와중에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일단 일본은 대 중국 원조국가 중 가장 큰 규모의 원조를 제공한 나라라는 경제적인 문제가 컸으며, 향후 중일관계에서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적극적인 제재는 피하는 것이 좋았다. 다만 국제적인 지위도 있고 해서 형식적으로나마 제재 조치를 취하기는 했다. 먼저 1988년 8월에 발표한 8천 1백억 엔(당시 58억 달러)의 대중 차관을 유보한다는 발표를 했지만, 중국 정부와의 실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차관 유보는 일시적인 것이며 정치적 자유가 허락되지 않더라도 중국의 경제자유화 계획이 부활되면 원조를 재개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그리고 1990년 11월 2일 차관 공여를 정식으로 시작했다.

세계은행은 가장 혹독한 제재를 가했다. 6월 8일 세계은행은 서구 열강의 압력을 수용해서 중국에 대한 7억 8천만 달러의 차관을 유보한다고 발표했다. 개혁 개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1981년 이후 세계은행이 중국의 가장 중요한 융자기관임을 감안하면 이것은 대단한 수준의 제재였다. 8년 동안의 차관 총액이 약 85억 달러로, 1/3이 농업, 나머지가 교육, 문화, 그리고 사회복지에 사용된 것을 감안하면 이 차관의 유보가 중국 사회에 악영향을 미칠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세계은행은 12월 4일 이사회에서 중국 경제개혁 프로젝트에 1억 달러의 융자를 결정하고 대중 융자규제를 사실상 전면 해제했다.


평가를 하자면 중국 공산당은 천안문 사건을 두고 극소수의 반사회적, 반공산당적인 지식세력들이 순진한 노동자들과 시민들을 선동해서 국가를 뒤짚어 엎으려 한 난동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문제가 되었던 과잉진압 역시 '당연히 이루어졌어야 할 조치'라고 평가하며, 이 평가를 20여년간 뒤집지 않는다.


물론 외부적으로는 의견이 다르다. 인민해방군이 인민을 무력으로 탄압했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사건이다. 서방에서는 반민주·반인륜적인 폭거로 국민의 정당한 요구를 짓밟은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의 그릇된 행동으로 규정하며 1980년대 말 시점에는 중국에 대한 서방 각국의 투자 중단 및 철수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 이런 제재는 군사부문만 제외하면 슬그머니 풀어졌다. 물론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중 수교는 천안문 학살 전이 아니라 그 몇 년 뒤에 이루어졌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은 서방과 연대해 소련과 대항하는 정책을 변경하여 친 소련(친 러시아)정책으로 회귀하였고, 특히 푸틴 집권 후에는 점점 양국의 밀월관계는 높아졌다.

물론 이후 중국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아웃소싱이 세계적으로 보편화되면서 몇 년 지나지 않아 투자는 재개되었으나, 현재도 서방 일각에서는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의 폭거로 받아들여진다.

중국 공산당은 당시 소련이 비슷한 상황에서 대폭적인 민주화개혁을 실시했다가 폭발적인 요구나 불만들이 폭주하면서 국가체제와 경제가 붕괴했기 때문에 진압 자체는 불가피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의 민주화 운동가들은 끊임없이 천안문 사태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다.

물론 중국 공산당이 후일 전향적인 조치를 전혀 내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엽적이긴 하나 부정부패를 시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언론의 보도 자유도 조금은 풀어준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검열과 보도 통제가 지속되는 것 역시 사실이며, 중국 당국의 천안문 사태에 대한 의견에는 변한 점 역시 없기 때문에 이 전향적인 조치들은 체제 지속을 위한 시도로 보는 게 맞다.

더불어 2010년 노벨평화상은 천안문 민주화 운동 당시 시위에 참여한 혐의로 수감되고 풀려난 이후에도 활발히 시민운동을 벌인 민주화 인사인 류샤오보가 수상하였다. 이때 류샤오보 본인은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고 일가친척들 역시 가택연금을 당하거나 교도소에 갇혀 있어서 본인이나 대리인이 수상을 할 수 없었다. 덕분에 중국과 서방 간의 신경전이 한때 치열해졌다. 류샤오보는 정치적인 활동이 아예 금지당한 채로 반체제 인사, 민주화 운동가 등과의 접촉이 전면 차단되어 있으며 부인은 2년 동안 가택연금, 처남은 사기혐의로 11년형을 선고받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중국 당국의 정치보복이라는 의견도 있다. 또한, 류샤오보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었다는 점 때문에 노르웨이는 중국으로부터 대 중국 연어 수출량이 급감하는 경제적인 보복을 받았다. 그리고 중국은 이것 때문에 한때 공자평화상을 만들었다.

결국 이렇게 장기적으로 사건이 숨겨진 결과, 25년이 지난 시점에서 중국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탱크맨을 보고 천안문 사태를 유추해낼 수 있던 학생은 소수에 불과했다고 한다.


천안문 사태 당시 베이징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강경 진압을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진 보수파 인물 천시퉁(陳希同·81)은 곧 홍콩에서 출간될 책에서 “나는 꼭두각시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부정부패와 권력투쟁이 얽힌 소위 ‘천시퉁 사건’으로 1998년 징역 16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된 뒤 2004년 심혈관 질환 등으로 조건부 가석방됐다.

2011년 2월 10일에 베이징에 인공강설로 첫눈이 내렸는데, 누군가가 천안문 광장에 6.4라는 글씨를 남겨서 화제가 되었다.

일단 중국 공산당 위주의 국가 발전이 비교적 순항하고 있는 현재로서는 중국 내부의 평가가 바뀔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요지부동인 중국 공산당은 둘째치고 대다수 사람들도 애써 회피하고 있으며, 젊은층은 인지 자체를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라서 갈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