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한 양민학살, 제주도 역사상 최악의 비극 '제주 4.3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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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양민학살, 제주도 역사상 최악의 비극 '제주 4.3 사건'


2017. 4. 3.

<1948년 5월 촬영된 사진. 사진 촬영 직후 저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양민학살로, 일본제국의 패망이후 남북한의 이념갈등 발단이 되어 봉기한 남로당 무장대와 미군정과 국군, 경찰간의 충돌 과정과, 이승만 정권 이후 초토화작전 및 무장대의 학살로 많은 주민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건이다.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단독으로 무장대 조직, 기습에서부터 시작되어 제주 4.3 사건이라고 불리지만 그 날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1947년 3월 1일부터 한국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계속된,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 중 하나로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더불어 양민학살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오늘날 반공주의 성향이 강한사람들 사이에서는 '제주4.3남한단독정부수립반대 및 남한적화기도 무장반란폭동'이라고 봐야 한다고도 한다. 이 사건을 논하는데 있어 주의해야 할점은 사건을 처음 일으킨 주체는 엄연히 남로당 제주도당이며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저지하려는 목적에 기인했다는 점이다. 맨 위 특별법에서도 이점을 부정하지 않으며 사건 자체를 긍정하는게 아니라 진압과정에서 아무 죄 없는 민간인들의 학살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선동을 통해 대안없이 일을 크게 벌리면서도 '등산하면 혁명적, 부등산은 비겁행위'라며 제주도민들에게 입산을 요구했던 김달삼, 강규찬, 안세훈, 고진희 ,문등용, 이정숙 등 남로동 지도부 6인은 도민들이 죽어가는 와중에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여를 구실로 떠나버렸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들과 북한이 연결되면서 제주도민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해졌다. 이들 중 김달삼은 무장공비 지휘관으로 강원도쪽을 헤집다 사살되었다. 유격대가 무너져가고 도민들의 희생이 누적되는 가운데 투쟁을 중단하고 대피생활을 지시했던 유격대 사령관 송원병, 조직부책 백창원, 군사부책 고승옥은 이에 반발한 대원들 손에 죽었다. 다른 원로들을 부를 수 있었음에도 굳이 제주도당 지도부를 부른 북한과 거기에 응해 제주도를 떠난 남로당 제주도당 지도부는 결코 책임이 없다 할 수 없다. 학살의 가장 큰 주체는 남한 정부지만 남로당의 무책임함이 그 학살을 부르고, 키운 불꽃이었음은 확실히 해야한다. 


사건의 기원은 1947년 3월 1일에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삼일절 기념 제주도 대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행사를 끝낸 군중들이 가두 시위에 들어갔고 그 중에 기마경찰에 아이가 채이고 경찰이 이를 모르고 지나가는 작은 소동이 발생하여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박헌영의 비서 출신이라고 자처하는 박갑동은 이 사건을 이용 선동하여 공산당이 제주도에서 어느정도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경찰은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줄로 알고 발포하여 소수의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이 사건 이후로 중앙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는 민관합동파업(!)이 도내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중앙정부는 당연히(...)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파업에 참여한 66명의 경찰이 해임되고 그 자리는 육지(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 본토를 뜻하는 제주 방언으로 제주 화자가 '육지'라고 말하면 십중팔구는 이 뜻으로 봐도 무방하다)에서 온 서북청년회 소속 사람들로 충원되었다. 이후 각종 고문치사 사건들이 발생하고 서북청년회의 패악질이 극심해지면서 민심은 극단으로 치닫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지옥의 씨앗이었다.
1948년 4월 3일, 5.10 총선거를 반대하고 이른바 통일된 조국을 설립할 것을 주장하던 남로당 제주도 지부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의 전 경찰지서 24개 중 12개를 공격하고 경찰 가족을 살해했다. 사망은 경찰 12명, 경찰가족 6명, 공무원 5명, 민간인 37명 등 60명이었다.

문제는 이 사건에 대한 군경들의 대처였는데, 그들이 파악한 최대 무장대 숫자는 500명이었으나 제주도민 전체를 배후로 보고 무장대 본부가 있는 한라산 지역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해버렸다.

그리고 군경 및 토벌대들은 이 근처를 얼씬거리는 사람은 남로당 무장대로 간주하여 가차없이 죽였다. 특히 서북청년회 소속 토벌대들은 노인, 어린이, 아기, 성별을 가릴 것 없이 일반 서민들을 빨갱이와 한통속으로 치부하여 모조리 죽여버렸다고 한다. 게다가 이미 해안지대로 소개된 일반 서민들마저 가족이 없으면 대신 살해당하는 대살(代殺)을 당했다. 이들 서북청년회는 월남한 지주나 이북 출신 조직폭력배, 친일세력 장정들이 주류로서 제주에서 화풀이와도 같은 만행을 저질렀고, 진압군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으로 악명높았다. 학살, 약탈, 강간 및 살인연습 등의 증언자료가 남아있다.

물론 군경들뿐만 아니라 빨치산들도 심심하면 내려와서 군경에 협조하는 반동분자를 처단한답시고 도민들을 학살하곤 했다. 전체 희생자 중 약 20%가 무장대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벌건 대낮에는 서북 청년회의 토벌대 및 군, 경찰이 '빨갱이 색출'을 하고, 빨치산들이 나올 시간인 저녁에는 하산을 해버린다. 그리고 저녁에 빨치산들이 내려와서는 살기 위해 군경에 협조한 서민들을 학살하는 것. 

실제로 당시 미군 정보보고서를 살펴보면, 당시 진압을 맡았던 조선경비대 제 9연대가 전체 도민들 중 10%가 공산주의자거나 공산주의에 동조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대량 학살계획(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되어 있다.

초기에 군경과 빨치산 사이에서 강화가 이루어져 사건이 조기에 끝날 수 있었으나, 서북 청년단이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습격 사건이 이어지면서 화의가 깨지고 말았다. 제9연대장 김익렬은 직접 빨치산 측을 찾아가 김달삼(본명 리승진)과 평화협상을 시도했으며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우선적으로 72시간 동안 휴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72시간이 거의 끝나가던 5월 1일에 정체 불명의 무장세력이 제주읍 오라리의 전략촌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은 "배신자들에 대한 공비들의 보복"이라고 주장했지만, 현재는 협상 및 토벌의 주도권이 경비대로 넘어간 데 대한 경찰측의 훼방놓기로 보고 있다. 실제 습격 현장에서 체포된 포로가 자신은 경찰관이며 제주경찰서장의 명령에 따라 행한 일이라고 자백하기도 했다. 물론 경찰 측에서는 좌익의 이간질이라고 주장했다.

참고로 오라리 방화 사건은 4.3사건 관련 여러 사건들 중 드물게 영상이 존재한다. 바로 미군이 화재현장을 지상 및 상공에서 촬영한 영상인데 미군측에서는 이 영상을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in Korea:Cheju-Do)>라는 제목의 기록영상물로 제작하여 보관하였다. 불의의 사건을 급작스럽게 찍은 영상 치고는 퀄리티가 좋기 때문에 미군 측에서도 방화 계획을 사전에 알고 대비하여 촬영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여튼 오라리 방화 사건으로 평화협상은 파기되고, 김익렬 연대장과 딘 미 군정장관, 맨스필드 제주도 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등이 모여 대책회의를 여는데 이 자리에서 경찰측 총수인 조병옥이 강경진압을 주장하며 김익렬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했고 이에 김익렬은 조병옥과 드잡이질을 벌이기에 이른다. 결국 회의의 총의가 강경진압 기조로 결정됨에 따라 김익렬은 쫓겨나듯이 제주도를 떠나야 했고, 서청을 내세운 경찰조직이 마음껏 잔혹한 진압을 자행하였다. 김익렬의 후임 연대장으로 내려온 박진경은 부대 내의 남로당원에 의해 암살당했고, 그 후임 송요찬은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지역을 통행하는 자는 모두 빨치산으로 간주하여 발포한다.'는 정신나간 포고령을 내리고 섬 전체를 피바다로 만든다. 중산간 부락 중에는 주민이 한꺼번에 학살당하여 마을이 아예 사라진 곳도 많다.

한국전쟁 중 현리전투의 참패로 평가가 안 좋은 유재흥 장군 역시 4.3 사건이 진행되는 와중에 파견되었는데, 온건책으로 주민 피해를 줄였다. 거꾸로 말하면 얼마나 초기의 진압이 부조리하고 가혹한 것이었는 지를 증명하는 것이가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 또한 임관하자마자 이곳으로 자대배치를 받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한 총 희생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대 제주도민 8분의 1이 죽거나 행방불명(추정치는 3만명에서 최대 8만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말하자면, 친척 몇 다리만 건너면 4.3사건 희생자라는 뜻인데 실제로 오늘날도 제주도에 가 보면 촌락별로 제사가 거의 비슷한 날 치러지는 걸 보면 당시에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학살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후유증은 아직도 지대하여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과 대화하다 그쪽 화제가 나오면 진저리를 치실 정도다. 바로 눈 앞에서 가족이 살해당하는 걸 보셨는데 거기에 무덤덤할 수가 있겠는가? 심지어 그 사건으로 인해 보통 제주 밖을 일컫는 육지(한반도측) 사람들에 대한 인식마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래서 사건 이후 90년대까지(!) 육지에서 제주로 시집오거나 장가온 사람들은 괜히 그런 이미지를 덧씌워받아 고생한 일이 많다. 그리하여 레드 컴플렉스가 극심하였다.

브루스 커밍스는 제주 평화포럼에서 1949년 제주도민 사망자가 6만명 발생한 것으로 당시 임관호 제주도지사가 미 정보국에 전달했다는 전문가의 주장을 제기하였다.

1998년 11월 당시 ‘한라일보’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공산폭동이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화 이후, 특히 2000년대 이후 4.3 사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2000년에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며, 2003년 10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사건 55년 만에 최초로 국가원수의 첫 사과를 하고, 2005년에는 국가 차원에서 최초로 4.3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또한 2006년에는 직접 제주도를 방문하여 4.3 사건 58주기 행사를 치르며 거듭 사과하기도 했다. 이런 정성과 노력 이후로 제주지역 선거에서는 민주당계 정당의 성적이 좋은 편이다.

4.3사건을 경험한 유족들의 회고를 들어보면 이념과는 상관없이 자기 마음에 안들면 마구잡이로 죽여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이었다. 
얼마나 미쳤냐면 총살은 기본으로, 비협조적인 사람이나 경찰과 군인의 가족들은 본보기로 참수형에 처했고 연좌제를 적용한다며 친인척이나 면식이 있는 사람들을 공개처형했다. 더 나아가 소의 생식기를 건조시켜 만든 쇠좆매라는 채찍에 가까운 도구로 태형을 벌이거나, 사람들을 모아두고 돌팔매질을 하게 린치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헬게이트를 열었고 이를 수습하고 진압하려한 14연대는 자신들이 개입하기 전까지 살아 남은 제주도의 거주자 대부분이 직간접적인 가해자라는 상황속에 수습할 타이밍을 놓쳐 보복성의 성격을 가진 여순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4.3사건과 여순사건으로 인해 한국전쟁 당시 제주도 사람들은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주장과 함께 죽는게 거의 기정 사실이었던 해병대에 자원 입대를 하기도 했다. 한국 현대사의 안타까운 장면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4.3 사건기간의 후반기 때 당시 제주지역 계엄군을 맡고 있던 해병대도 양민학살에 가담했었다는 것이다.

4.3사건 후기에서 정부는 계엄령을 폐지하고 산 속에 숨어있는 사람들에게 귀순을 권유하였는데, 6.25 전쟁 중 예비 검속으로 이때 귀순한 사람들 다수가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게다가 귀순한 사람들 말고도 무고한 사람들 다수가 모함이나 잘못된 정보에 의해 희생되었다. 마을 유지들한테 밉보였던 이들, 아니면 그 사람들의 일가친척 등이 학살 당한 경우가 있다.

한편 제주도 방언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사건 당시 제주도 방언을 쓰는 사람들은 피해를 당하지 않게 제주인인 척을 안할려고 억지로 제주도 방언을 기피하는 경향이 생겼고, 사건 이후에도(현재는 사라졌지만) 제주도에서 제주도 방언은 훈육의 대상이었다. 수업중 제주어를 사용한 교사는 장학관에게 지적을 받았고, 제주어를 사용하는 학생은 수업중에는 반드시 표준어만 사용하도록 강요받는 사례도 있었다. 게다가 6.25 전쟁 이후 육지 학생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사투리는 촌스럽다'라는 인식까지 퍼져 현재 언어 사용인구가 약 5,000~10,000 명까지 줄어들었으며 이는 현 제주인구에 1/60수준이다. 그래서 현재 유네스코에 의해 소멸 위기의 언어 가운데 4단계인 '아주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critically endangered language)'에 등록될 정도로 소멸 위기 상태이다. 다행이도 현재 제주어는 보존되고 지켜야할 소중한 유산이자 언어로 자리잡았으며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에선 거주민들에게, 특히 학생들에게 제주어를 배우고 사용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이 사건은 제주도 내의 종교 분포에도 영향을 주었다. 제주도의 종교 인구 통계를 보면 개신교와 천주교 등 기독교 전반의 신자 수가 적은 편이다. 천주교는 이재수의 난이 일어날 정도로 악행을 저지른 사례가 있어서 이전부터 신도의 수가 적었다. 한편 개신교 신자의 수가 적은 이유가 이 4.3 사건과 연관이 있다. 학살의 주동자들인 서북청년단은 보수 개신교 교단과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4.3 사건에 대한 탄압은 계속됐다. 

어처구니 없게도 원세훈 국정원장 시절인 2009년에 최고의 간첩전문가도 탄압을 받은 일이 있다. 윤모 단장은 지난 2009년 5월 때 감찰실 직원과 점심을 먹다가 "제주 4.3 진압은 정부쪽에서 심하게 한 측면이 있다"는 말을 했다. 감찰실은 윤 단장의 발언을 '좌파적 발언'이라고 몰았고, 윤 단장은 대기발령당했다. 미군 G-2 보고서에 따르면 사망한 제주도민들중 80%이상은 토벌대에게 죽었다. 윤모 단장이 한말은 좌우파를 떠나 절대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기발령을 받은 것이다.

2014년에 새로 바뀌는 역사 교과서에서는 실리지 않는다는 풍문이 돌았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한국사 교과서에 기재되었다. 설명이 줄기는 했는데 이건 과목 전반의 문제라.

마침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인 이영조가 2010년 11월 5일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벌어진 국제학술회의에서 '공산주의자가 주도한 모반, 폭동(communist-led rebellion)이라고 주장하여 논란을 빚게 되었다. 사실 관계만 논하자면 4.3사건은 일단 남로당에 의한 폭동이 맞긴 맞지만, 문제는 이를 진압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민간인의 희생을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 논란이 된 것.

정작 이 사건을 일으킨 중심인물들은 대다수가 이미 사망하였거나, '유전무죄'를 통해 빠져나가서 처벌조차 받지도 못했다고 한다. 물론 여순사건도.

2014년에 4.3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자 자칭 우파 단체가 반발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까지 언급했다. 또한 제주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박원순 서울시장이 만든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좌익폭도들을 감싸고 이승만 대통령을 학살자로 만드는 등 왜곡되었다며 박원순 시장의 사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요즘 "대한민국 예비역 영관장교 연합회" 라는 어버이연합과 비슷한 시기에 반짝 하고 나타난 극우단체가 제주 4.3사건때 일어났던 군의 학살을 극구 부정하고, 군이 오히려 정당한 대처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2017년 시점에도 5.18 민주화운동, 부마항쟁, 4.19혁명, 6월항쟁 등과 비교해 보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인지도가 적고, 공교육 과정에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나마 7차 교육과정이 되고 난 후 단순한 반공논리적 서술이 약간 개선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네 가지 대표적 민중항쟁과 달리 4.3을 민중항쟁으로 선뜻 떠올리는 국민은 연령과 지역을 막론하고 드물다. 유명한 광주민주화운동조차도 유명세에 비하면 놀랍도록 전문가에 의한 학술적 연구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은 실정인데, 4.3에 대해서는 제주지역 언론, 시민단체, 향토사학자들이 아니고서는 거의 관심을 가져 오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4.3에 대해서 남아있는 자료의 수는 결코 적지 않지만 대다수의 논자들이 이를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는 것이 문제.


2006년 4월 3일 4.3사건 위령제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과거사 정리 약속을 포함한 추도사를 하였다.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다가 제주 4.3사건을 다룬 소설인 '순이 삼춘'의 경우 책은 금서가 되고 작가 현기영은 고문 등 고초를 겪어야 할 정도였다. 사실 5.16 이전에 나온 오영수의 단편 '후일담'은 아주 리얼하게 4.3 사건 당시 민초들이 당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시사 만화가 박건웅이 이 사건을 다룬 <홍이 이야기>라는 작품을 그렸다. 운동권 출신 시인이자 <양철북>으로 유명한 이산하 씨도 1987년에 해당 사건을 소재로 <한라산>을 냈다. 그러나 해당 시집은 그해 11월에 작가가 치안본부 대공수사대에 의해 연행되고 1988년에 유죄 판결을 받아 '이적표현물'로 판정되어 더 이상 나오지 못하다가 2003년에야 복간되었다. 그 외에 원로 재야시인 고은도 해당 사건을 소재로 한 시 <오라리>를 썼다. 그리고 재야 역사학 단체인 '아라리연구원'이 1988년에 엮은 <제주 4.3 민중항쟁>이 있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가 이 사건을 비교적 중립적인 시각으로(말하자면 아주 건조하게) 다루면서 인지도가 많이 올라갔다. 하지만 본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레드헌트는 국가보안법에 의거 '이적 표현물'로 판단되었고, 1997년에 이 작품을 상영한 인권영화제의 주최자인 인권운동사랑방 대표 서준식이 구속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3년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중립적으로 조병옥의 강경책 등에 조명했다. 또한, 극중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이 일을 재조사하고, 공식사죄를 검토하고 있다고 해설에서 추가 소개하기도 했다. 작중에선 이 일에 이정재가 깊게 관여하기도 했다. 최동열의 말이나 나레이션을 통해 '아마 죽은 사람들 대부분은 좌.우익이 뭔지도, 자기가 왜 죽어야 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라며 씁슬하게 묘사한다. 다큐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첫방송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그리고 공식 사과 한지 딱 10년이 지나 제주인 감독 오멸이 만든 2013년 지슬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월드드라마) 수상. 제주에서 선행 개봉하고 전국 순차 개봉인데 독립 영화치고 흥행 성적이 좋다.

이 외 제주도 출신 노시인인 문충성이 자신의 시집 '허물어버린 집'에서 직접적으로 다루기도 했다. 참고로 문충성 시인은 10대 시절 대부분을 제주도에서 4.3 사건으로 보냈다.

판타지 만화인 아일랜드의 소설판에서는 원미호가 4월 3일에 제사를 지내고 지각한 학생들에게 화를 내는 장면도 있다.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 4월 3일에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게 아니다.

단편선과 선원들의 싱글중 하나인 <국가>는 이 사건을 풍자했다는 해석이 있다.

늘푸른 프로덕션의 한국전쟁 마지막권을 보면 제주 4.3사건의 피해자들에대한 보상에대해 이야기하는데 "김영삼, 노무현 정부는 바보같이 간첩들한테 보상금이나줘서 잘못됬다." " 4.3사건때 일어난 군의 학살은 정당했다"는 논조로 이야기한다. 애초에 이 만화는 극우적 성향이 아주 심한 만화이다.

학살을 피하기 위해, 혹은 빨치산에 있다가 검거를 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이 많다. 또한 살아남은 사람들도 일본으로 도망간 친척 등을 통해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재일교포 1세대 중에 제주 출신이 유난히 많은 이유가 바로 이 사건 때문. 이러한 이유로 과거에는 한국보다 일본 쪽에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김석범의 장편소설 <화산도>가 본 사건에 대한 재일교포 문단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피와 뼈' 등으로 잘 알려진 최양일도 4.3 사건을 다룬 영화를 준비 중이라는 얘기가 있었으나 현재까지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제작이 무산된 듯하다. 

또한 조류 때문에 학살된 제주도민의 시신들이 일본까지 떠내려 가는것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일본에는 이때 거두어진 시신들을 화장한 곳에 위령비를 세운곳이 있다고.

90년대 말에 은퇴한 한국통 일본 외교관이 쓴 회고록이 국내에 출판된 적이 있는데 이 외교관은 젊은 시절 제주도에서 근무했다. 그는 당시 일본인 외교관으로 보기 드물게 한국어를 전공했기에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일반 제주도민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는데 그가 현지에서 사귄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그 사람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사귄 이웃친구에게 형을 고발당하고 그 형이 처형 당하는 것을 눈 앞에서 보는 참사를 겪었다.이후, 그 이웃 친구는 일본으로 달아났고 수십년이 지나 고향으로 돌아와서 그 친구에게 "죽기 전에 용서받고 싶다."면서 노구의 몸으로 대문 앞에 무릎 꿇고 빌었으나 아버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대문을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그 아들은 저런 노인이 저렇게까지 비는데 용서해도 되지 않을까, 했지만 말을 할 수는 없었다고. 이런 내용을 생각하면 피해자와 가해자를 불문하고 가까운 일본으로 달아난 경우가 적지 않은 듯.

2000년대 초반 아직 한국에 대한 정보가 일본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전, 일본의 우익들이나 우파 네티즌은 상기한 4.3 사건의 일본에의 여파와 제주도민들의 일본으로의 탈출 때문에 제주도가 아직도 한국 본토와 사이가 안 좋다거나, 독립을 염원하고 있다거나 하는 낭설이 진지하게 돌았었다. 거기에 근거해 한국과 전쟁을 하게 되면 제주도민의 도움을 받아 제주도를 해방시키자고 하는 주장도 있었다. 이후 한국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흘러들어가며 그런 낭설은 줄었지만, 개중엔 아직도 제주도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4.3 평화기념관은 제주시 봉개동에 위치해 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다면 아마 가 보았을 것이다. 대중교통으로 갈 경우 제주시청 등지에서 43번 버스를 타고 갈 수 있지만 버스 배차간격이 길고 불규칙적이다.


묘하게 까마귀가 지붕에서 날아 다니는 게 분위기가 적절하다.(까마귀 크기가 닭만하다) 기념관 근처에 위치한 폐기물 매립장에서 날아오는 까마귀가 많은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