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노무현 대통령 너무 좋아합니다"
본문 바로가기

유시민 "노무현 대통령 너무 좋아합니다"


2017. 6. 3.

대한민국의 작가, 정치평론가, 보해양조 사외이사, 前 정치인 유시민
16, 17대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정계에서 물러나 현재는 본업이었던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본인을 '지식소매상'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서애 류성룡의 13대 직계손이다.

아버지 유태우와 어머니 서동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역사 교사였으며, 어머니는 요즘말로 슈퍼마켓 같은 구멍가게를 했다고 한다. 아주 가난하진 않고 굶을 정도는 아닌 그야말로 소시민 집안이었다. 그래서 본인을 쁘띠 부르주아 리버럴(자유주의적 소시민계급) 태생이라고 말한다. 교사였던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자식들에게 각종 어린이 신문을 구독하게 하였고 식사 시간에는 자주 역사 이야기를 들려 주거나 한 주제를 두고 자식들과 진지하게 토론했다고 한다.



학력으로는 수성초등학교, 대륜중학교, 심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평범한 학생이었으나 고교 시절부터 성적이 아주 우수해서 이미 갈 대학(서울대학교)은 정해졌고, 과만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학에는 재능이 없어서, 수학책 세권을 통째로 암기했다고 술회했다. 진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그의 아버지는 영어영문학과에 진학해 영어를 배워 서양으로 가서 서양 철학을 배우고 다시 귀국해 동양 철학을 배워 동서양을 잇는 철학가가 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유시민은 부유하지 못한 집안을 일으켜 보고자 법학과를 가서 판사가 되기로 결심하여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진학한다. 참고로 당시의 서울대는 신입생 선발시 과별 모집이 아니라 계열별 광역모집제였고 2학년 올라갈 무렵에 학과를 정하도록 돼있었다. 사회계열 입학생들은 2학년 올라갈 때 법학과, 사회대 학과들, 경영학과 중에서 한 학과로 전공진입을 하는 구조였다.

입학 후 농촌법학회라는 서클에서 가입하게 되는데 신입생 환영회에서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변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해 선배들을 당혹시켰다. 이 말은 독일의 역사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가 남긴 말이다. 왜인가 하니, 당시 운동권의 주류사상은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초하여 역사는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주의를 거쳐 공산주의로 필연적인 발전을 겪는다고 보았다. 그런데 유시민이 이 같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기초로 하는 운동권의 중심에서 이걸 정면에서 부정했으니 당황할 수밖에. 이후에 유시민은 2009년에 쓴 《청춘의 독서》에서 당시만 해도 랑케의 《젊은이를 위한 세계사》를 읽고 랑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바람에 나왔던 무지의 소치였다고 회고했다.

그때부터 그의 토론 실력은 발군이었다고 동문들은 회자했다. 그렇게 학생운동을 시작한 후 선배들이 법정에 나와 유신헌법으로 처벌 받는 것을 목격한 후 법관의 꿈을 접는다. 그러나, 공부 못해서 법대 못 갔다는 말은 듣기 싫어서 그 당시 서울대에서 법대 못지 않은 인기 학과였고 가장 뛰어난 인재들만 간다는 경제학과를 전공한다. 이후 공업단지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야학에 활발히 참여하는데 이때 그를 야학으로 이끌어 준 사람이 바로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 

3학년 때 서울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 된다.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후 1980년 봄이 되면서 민주화 운동은 더욱 가속화 되고 5월 15일 서울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다. 이날 서울역 광장에서 수만 명의 학생들이 계엄 해제 및 신군부 퇴진을 요구한다. 밤 8시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서울지역 15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은 시위를 계속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회의를 하고 결국 해산하게 되는데, 이것을 서울역 회군이라고 한다. 이 때 유시민은 회군을 반대했던 '매파'의 일원이었다. 


서울역 회군이 있기 몇일 전 유시민은 군이 출동한다는 첩보를 받고 학교를 지키던 300~400명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허위정보였고, 다음날 일일이 교실을 찾아다니며 학생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그리고 서울역 회군 이틀 후 5월 17일, 유시민은 학교에 군대가 들이 닥친다는 소문을 다시 듣고 학생회관에 머무르다 신군부에 체포된다. 

보안사에 끌려가 두달 동안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난 후 이른바 녹화 사업에 강제 징집되어 화천군에서 복무한 후 육군 병장으로 만기전역했다. 녹화사업은 당시 민주화 운동가와 대학생들을 감옥에 보내는 대신, 최전방으로 입대시키는 제도였다. 화천 7사단에 입대해서도 군사 정권에 의해 관심사병으로 지정되어 몇 번이고 전출과 전입을 반복하고 사상 검증이랍시고 끌고 가서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그의 군대 시절 일화 중에는 사격과 축구를 잘했고, 부친의 수술을 앞둔 후임을 위해 자신의 포상 휴가를 반납하고 그 후임의 청원 휴가를 보내줬다는 미담이 있다.


1983년 5월 군에서 제대한 후 서울대에 복학한다. 그리고 제적 학생 복교추진 위원회를 결성, 위에 서술된 녹화 사업의 폐지를 위해 투쟁을 시작한다. 그러나 복학한지 보름만에 이른바 "서울대 프락치 사건"에 연루 되어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구속 당한다.

이후 선배가 경영하는 작은 출판사에서 일하기도 하고, 졸업 후에는 그와 친한 방송국 PD의 배려로 드라마 각본가로도 활동했는데, 앞서 서술했던 학생 운동 때문에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라 위장을 하며 '유지수'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다. 그가 각본을 썼던 1988년에 방영한 MBC 드라마 《그것은 우리도 모른다》에서도 '극본 유지수'라고 소개되었다. 썰전에서 유지수 시절을 흑역사라고 말한 적 있다.


정치 활동 시작은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이해찬 당시 평화민주당 의원의 의원실 자원봉사자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 때는 공식 보좌관이 아니라, 보좌관 급여를 나눠서 썼다고 한다.

이후로는 작가 등의 길을 걷다가 2002년 절필을 선언하고 전업 정치인으로 전향하고 정계에 진출하면서 개혁국민정당을 창당했고 이듬해 보궐선거에서 고양 덕양 갑에 출마해서 당선되어 정계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이후 개혁국민정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의 창당에 참여했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하였다. 정치적 성향은 진보로 분류되고 있으며 주된 지지층은 20~40대였다. 그래서 정통 운동권 치고도 야당 당적을 굉장히 많이 옮긴 편에 속한다.

2003년 4월, 16대 보궐로 당선되어 여의도에 입성해 의원선서를 하는 첫날부터 백바지에 라운드 티셔츠라는 당시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전대미문의 복장으로 참석해 어마어마한 어그로를 끌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물론, 민주당계 의원들 역시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어서, 해당 복장을 받아들이지 못한 의원들이 대거 퇴장해버리면서 의원선서를 이튿날로 미루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튿날 일반적인 정장 차림으로 참석하여 정상적으로 선서를 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되었으나, 이로 인해 그의 정치생활엔 싸가지 없는 좌파의 상징이라는 딱지가 붙고 만다.

참여정부 시절 친일 재산 환수 같은 친일청산을 내세우다가 이에 맹렬히 반대하는 보수 세력에 의해 열린우리당의 몇 몇 인물들의 친족들의 친일 전력이 나오면서 열린우리당이 크게 당혹할 때 유시민 역시 피해자였다. 유시민의 부친과 백부가 친일파였던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이에 유시민은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나, 아버지 그리고 국가정체성'이란 글을 올려 친일파 논란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이후 선거에서는 줄줄이 낙선했다.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대구 수성 을에 출마하여 친이진영의 주호영 의원과 맞붙었고, 이어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야권 단일 후보로 나서서 김문수에게 석패했고,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비례대표 12번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처음으로 국회에 입성하던 시절에 정장이 아닌 캐주얼 차림과 흰색 하의(일명 빽바지)를 입고 등장하여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야권의 지긋지긋한 갈등 중 하나인 난닝구 VS 빽바지 갈등 중에서 빽바지의 상징이 되었다. 의회에서 복장 불량을 시비로 한나라당 의원들이 항의를 했다고 한다.

또한 프로 야구 경기나 학교 운동회 등 국가 업무와 관련되지 않는 곳에서 하는 국기에 대한 경례는 파시즘적이라며 반대의사를 표명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통진당 시절에는 당권파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자 유시민은 우리 당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인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공과 사를 구분하여 했던 발언인 것.

참여정부에서 2006년 2월 10일부터 2007년 5월25일까지 1년 3개월 가량 재임했던 참여정부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 역임 이력이 가장 상징적이다. 현직 정치인이나 은퇴한 정치인을 칭할 때는 그 전에 맡았던 가장 높은 직책을 불러주는 것이 관례라는 점에서 현재도 유시민 前 장관이라고 꽤 부르는 편이다. 이 당시 정책을 많이 펼쳤으나 그만큼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기도 했다. 당시 주요 정책으로는 의료급여제도와 말이 많았던 국민연금 등이 있었다. 장관 재임 시절 기초노령연금을 신설할 것을 제안해서, 당시 한나라당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되도록 강력히 추진했다. 보통 고령자들은 유 작가를 버릇없다고 싫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유 작가 덕에 좀 더 많은 연금을 받게 된 것이 아이러니. 또한 국민연금 개혁을 실행하기 위해 국회에서 직접 발로 뛸 정도로 열정적으로 추진했으나 당시 한나라당의 극심한 반대로 보험료율을 15.9%로 인상하는 대신 소득대체율을 60%에서 2028년까지 40%로 점진적으로 인하시키는 것으로 타협했다.


특히나 유시민은 장관 임명과정 자체도 매우 드라마틱했다. 유시민을 입각시키기로 결정하기 직전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최고위원은 당시 정계의 화두 중 하나였던 상시 청문회법을 확대하여, 국무총리가 아닌 국무위원의 임명에도 인사청문회를 의무화하는 강력한 법안을 발의시켰고 통과시켰으며,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의 반대에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통과시켜서, 개정된 인사청문회법의 하필이면 첫 적용대상으로 빽바지 사건 등으로 찍힐 대로 찍힌 유시민이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내정된 것이다.

그래서 인사청문회라는 난관을 뚫어야 하는 유시민이 맞은 화두는 한나라당 내부의 거센 유시민 안티는 물론 당시 주요 정책 화두였던 의료급여제도와 말이 많았던 국민연금 등이 있었다. 이를 위해 유시민은 직접 한나라당 지도부를 방문하여 박근혜 최고위원을 비롯한 여러 한나라당 의원들을 만나 설득하면서 무려 6주에 걸친 청문회와 적십자비 한 번 안 내서 절대 부적격 장관 취급당했다는 해프닝을 남기고 결국 인사청문회 보고서가 채택되어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장관 재임 시에 연금제도를 중점적으로 손보았는데 이는 그가 기존의 연금제도가 부도덕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민연금이 도입되던 1988년대와 그 전후의 노년 세대에 대한 대책은 빠져있어서 노인세대에 대한 책임을 가정에게 떠넘겼으며 또한 보험요률이 3%, 인상한 뒤에도 9% 크게 높지 않은데 비해 소득대체율은 60%로 높은 편이라 그 부담을 후세대에게 떠넘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부도덕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실제로 한국에서 기초노령연금 관련 논의를 정부 내에서 최초로 제안한 사람은 유시민이고 이후로 논의를 거쳐 강기정 의원이 대표 발의하였으며 한나라당 의원들이 전원 퇴장한 가운데에 통과가 되었다.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기초노령연금 20만 원을 60% 이상의 노인들이 지급받을 수 있는 방안을 만든 유시민은 노인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는 반면 전원이 퇴장하면서까지 반대한 새누리당은 노인들에게 큰 지지를 받는 데서 아이러니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재임 중에 연금의 소득대체율을 기존안보다 30% 낮추었고 이에 대해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다. 다만 유시민은 인구 구조가 노년 세대보다 청년 세대가 더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 소득대체율을 유지하자면 미래세대에 주어지는 부담이 너무 과중하다는 점과 만약 소득대체율을 더 높이고 싶다면 세금을 더 높이는 것이 불가피 한데 국민정서상 세금을 더 부과하면서 연금 지급액을 높이는 것은 너무 저항이 클 것이라고 생각해서 소득대체율을 낮추고 미래세대의 부담을 덜어주는 쪽으로 결정을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썰전에 같이 출연 중인 전원책 변호사의 평가로는 "장관으로서 일을 매우 열심히, 잘한 사람"이라는 평을 했는데, 단순한 립 서비스가 아니고 실제로 좌우를 막론하고 유시민 장관시절 업무 추진 및 실천 능력에 대해선 평가가 높은 편이다. 

유시민의 업무 수행 내용이나 장관 퇴임 후 본인의 발언을 통해서 유추해 보면 '복지 확장을 위해서 노력하지만 국민 여론을 거슬러가면서 세수나 예산은 확장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보건복지부 장관 업무를 수행한 듯하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국민연금 문제가 생겨났을 때도 처음에는 유시민도 세율을 높여서 소득대체율을 60% 정도로 유지하려고 하였으나 한나라당의 격렬한 저항과 세금 인상에 따른 국민 여론의 저항을 뚫지 못하고, 혹은 뚫지 않고 세율을 덜 높이는 대신 소득대체율을 크게 낮추었다.

이 외에도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국공립 유치원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보건복지부 장관 재직 당시 다른 국무의원들에게 건의했었고 노유진의 정치카페에서 재차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국민들이 유아 보육에 추가로 세금을 납부하는 데 합의하지 못한다면 애써 국공립 유치원을 늘리는 것은 힘들다는 입장이다. 즉 기성정당 들이 주장하는 보육료 인하와 국공립 확장, 그리고 보육교사 처우 개선 문제는 병립하기 힘들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만약 국공립 유치원을 늘리고 보육교사를 공무원으로 전환한다면 마땅히 더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 이 예산을 부유층에서만 끌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고 소득에 상관 없이 전국민이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 만약 세금을 높이지 못하고 국공립유치원만 늘리고 보육 공무원을 늘린다면 너무 재정 압박이 심해진다. 국민여론이 세금인상에 호의적인지 굉장히 회의적임으로 기존의 국공립유치원은 저소득층과 장애아동, 편부모가족 등 취약계층을 위한 복지시설로 재편하고 일반 가정에게는 유동적으로 예산조정이 가능한 육아 바우처를 지급해 민간 보육원 이용요금을 보조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정당은 그에게 있어서 동고동락을 했던 존재였고 2000년대 요동쳤던 진보계열 정당 변천사의 산 증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흔히 철새의 대명사로 알려진 이인제는 정치 성향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여러 정당을 상황에 따라 옮겨 다닌 반면, 유시민은 자신의 정치관에 따라 정치 활동을 한 것뿐이라는 옹호도 있다.

그러나 문서에서 보다시피 유시민 또한 당적에 따라서 특정 사안에 대한 견해를 바꾼 적이 있다. 이인제는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19대 국회까지 (2016년 임기 종료) 원내에 남아 있었지만 유시민은 참여정부 이후 어떠한 선거에서도 당선된 적이 없다.

이인제는 정치인생 28년간 13회지만(2.1년에 한 번꼴) 유시민은 11년 동안 7회(1.6년당 한 번꼴)다. 단순히 변경한 빈도만 보면 유시민이 더 하다. 다만 피닉제로서 인터넷에서 희화화되기 시작한 건 2008년 총선에서 무소속 출마, 최저득표로 당선되면서였는데 동 시기 기준으로 당적변경 이력은 이인제가 유시민보다 훨씬 위였다.

앞서 언급했던 정계 진출의 시발점이었던 신당인 개혁국민정당으로 활동하다가 본인의 주도로 열린우리당과 합당하게 되었다. 열린우리당 시절은 그의 정치활동 전성기라고도 할 수 있다. 여당의 주요 멤버로서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큰 명성을 떨쳤던 것도 당시의 일이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열린우리당은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하게 되었다. 격랑의 소용돌이였던 당시 진보정당 변천속에서 탈당쇼가 일어나며 열린우리당 내부에서도 합당 반대의 목소리가 났지만, 유시민은 찬성하며 새로운 당을 키워나갈 포부를 밝혔다고 한다. 경선 끝에 대선 후보로 선출된 정동영을 원조하며 문국현 후보와 단일화를 진행했다. 하지만 단일화는 입씨름으로 끝나며 실패로 돌아갔고, 2007년 대선에서 정동영은 이명박에 패해 맥없이 낙선하고 말았다. 대선 이후 콩가루 그 자체였던 대통합민주신당은 오래 유지될 리 없었고 결국 총선을 앞두고 유시민과 이해찬 등의 거물 정치인들이 줄탈당하기까지 이르렀다.

탈당 후 한동안 무소속 신분으로 지내며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을 선거구로 출마하기도 했다. 당시 정치 지형으로서는 상당한 무리수. 철새 논란도 있긴 했지만 그의 출신지가 경상북도인지라 연고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진보 진영의 유명한 정치인이 대구광역시에 나선지라 대부분은 도전이라고 받아들였다고. 한나라당의 주호영후보와 경쟁했으나 어찌보면 당연하게도 낙선하고 말았다. 

그래도 이름 값의 영향은 있었는지 당초 예상보다 높은 32%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수성구는 부자 동네인 관계로 대구에서 지역색이 희석된 축에 속하지만, 수성구 을 지역에서 민주 진보 진영 인사가 30%를 넘긴 경우는 수성구 을 선거구가 생긴 이래로 유시민 하나뿐이다. 보통은 20%도 넘기 힘들다. 게다가 이때는 반노 정서가 하늘을 찔렀던 18대 총선이었다! 이에 민주 & 진보 쪽 인사는 크게 고무되었고 이후 김부겸이 당선을 노릴 수 있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유시민의 행보가 김부겸에 딱히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게, 실제로 유시민이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 대구광역시에 뼈를 묻을 것 같이 행동하다가 바로 2010년 6.2 지방선거 때 경기도지사 후보로 출마하면서 대구 사람들은 유시민이 먹튀를 한 걸로 받아들였다. 이는 나중에 김부겸이 수성구 갑에 첫 출사표를 던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표를 망설이게 된 이유가 되었다.

그때 당시에도 이한구가 지역구에서 깽판 쳤던 전력으로 인해 수성갑에서 이한구에 대한 민심이 흉흉했었기에 김부겸이 출사표를 던졌을 때 반겼던 사람도 많으나 막상 표를 찍을 때는 '인물은 좋은데 당이 별로라서...'라는 의견과 함께 '유시민처럼 한 번 떨어지면 그냥 도망가겠지' 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부겸은 유시민과 달리 도망가지 않았고, 끝까지 대구광역시 출마를 고수했기에 수성구민들이 김부겸에게 화답을 보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만약 유시민이 이때 1회성 출마에 그치지 않고 김부겸처럼 대구시장 등을 비롯해 대구의 장벽을 뛰어넘으려고 했다면 김부겸과 같이, 운이 따라줬다면 김부겸보다 더 일찍 대구에 입성했을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만약 그러한 성공을 거두었다면 김부겸 의원처럼 민주 & 진보 진영의 유력한 대권 다크호스로 주목받았을 지도 모른다.

그 후에는 참여정부 핵심인사들이 모여 국민참여당을 창당했고, 유시민도 뒤따라 입당하였다. 그곳에서 정치인으로서 마지막 본선 맞대결로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에 도전했다. 경선에서는 민주당의 김진표 후보와 단일화 경선에서 승리하는 이변을 냈으나 본선에서는 경기도지사 재선 도전을 한 한나라당 김문수 후보에게 밀려 2위로 낙선하고 말았다. 

경기도 내에 큰 지지 기반이 없었음에도 선전했다는 평이지만, 당시 표차가 4%p에 불과했다는 점과 심상정 당시 진보신당 후보와의 단일화 실패로 무효표가 김문수 당선자와의 격차보다 더 많이 나왔다는 점 때문에 지지자들의 아쉬움이 많았다고 한다. 애초에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이 한 지역씩 주고 받는 연대 방식을 취할 수 있었음에도, 한 자리가 아쉬운 민주당과 경선을 통해 단일화 하는 방식을 고수해서 정치적 권모술수를 적극 활용하는 마키아벨리스트라는 비난도 받았다.

2011년 국민참여당 대표에 오른 그는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경상남도 김해시 을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로서는 의석을 확보한다면 잇다른 패배를 만회하고도 남을 의미깊은 선거였다. 김해시는 국민참여당의 모토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출생지이기도 하고 PK 중에서도 민주당 지지세가 제법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더욱이 한나라당의 실책은 야권에게는 큰 호재가 되기도 했다. 말도많고 탈도 많던 민주당과의 후보 단일화를 거치며 이봉수를 후보로 세우며 원내 진출을 꿈꾸었으나 김태호 후보에게 밀리며 좌절되었다. 당선되었더라면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원내 교섭단체를 이루는 데 교두보가 되었을 선거였기에 그의 좌절감은 더 컸고, 야당 측 대권 주자 1위를 굳건히 지키던 그였으나 그것마저도 손학규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잇따른 타격을 입은 국민참여당은 존재 의의를 잃어버린 채 민주당에 흡수될 위기에 처했으나, 유시민은 진보신당과 대통합을 하는 방향으로 활로를 돌렸다. 참여당은 당원 투표로 통합을 결정짓고 민주노동당, 진보신당과 우여곡절의 협의 끝에 대통합 진보 정당인 통합진보당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통합은 그의 정계 은퇴의 시발점이 됐다.


결성 직후 당분간 통합진보당의 공동 대표로 활동했으며, 당시 경기동부연합에 속한 인물군에 대해서 친북 성향 논란이 보수 언론에 노출되자 유시민은 매카시즘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통합 정당의 한계였는지 통진당 내부에서는 계파 갈등이 만연하였고 유시민은 이를 비판하며 직무를 거부와 복귀를 반복했다. 결국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이 터지게 되고, 유시민은 '총체적 부정선거'임을 인정하고 비례대표 전원 사퇴를 주장하였으나 당시의 당권파였던 NLPDR계가 반발하며 계파 갈등은 폭발하게 된다. 결국 비당권파 당원들의 대규모 탈당이 시작되었고 유시민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국참계도 부정경선에 주체였으며 일방적 피해자로서 코스프레한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검찰 수사에서 참여계 인사들이 대거 구속되었다.

탈당한 인물들(유시민, 노회찬, 심상정 등)은 진보정의당(현 정의당)을 결성했다. 유시민도 초창기 주요 멤버로서 큰 활약을 펼쳤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계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파란만장한 그의 정치 인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의 재능을 아쉬워하는 진보 진영 지지자들이 가끔 정계 복귀할 생각은 없느냐며 묻는 모양이지만, 그때마다 '정계를 떠난 지금의 삶이 더 행복하다'며 단호히 선을 긋고 있다. 손석희 JTBC 보도 담당 사장이 같은 질문을 건넸을 땐 '다음 생에 하겠다'고 하기도. 이전 문서에서는 정계 은퇴를 번복한 정치인을 예시로 가능성이 전무하지 않다고 했으나 현재로서는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정치인 유시민을 논할 때는 친노를 떼어놓고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유시민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친노계의 적통이나 다름 없는 정치인이면서도 일반적인 친노 정치인들과는 상당히 색다른 경력과 과정을 거쳤다. 


이유는 유시민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학연, 지연, 혈연, 당적, 경력에서 겹치는 부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해 독일 유학을 했던 유시민과는 달리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이었고, 경북 월성에서 태어나 청년기를 서울에서 보낸 유시민과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대부분의 활동을 부산 지역에서 했던 노 전 대통령은 지역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없었다.

노무현 당시 후보가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던 당시 유시민은 새천년민주당 당원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개혁국민정당을 창당해 새천년민주당 안에서 '후보교체론'을 들고나와 위기에 처해 있었던 노 후보를 바깥에서 도왔다. 인권 변호사 & 노동 변호사로 활동했던 노 전 대통령과는 달리 유시민은 서울대 경제학부 전공자였다.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학생 운동을 했던 명문대 출신 운동권 정치인들이, 뛰어난 능력과 신념을 가졌는데도 고졸 출신이라며 노무현을 깔보는 거 같아 심기가 불편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종의 반발 심리로 '나도 당신들처럼 명문대 나왔고 학생 운동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노무현의 밑에 들어가 일하겠다'는 걸 보여주려고 노무현과 정치 역정을 함께 하게 됐다고도 한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 당선 전후에 유시민의 인터뷰 영상을 보면 노무현 개인에게 흠뻑 반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인터뷰를 하면서 본인 스스로가 자기가 게이는 아닌데 노무현이란 사람이 그냥 좋다고 말하기도. 그리고 본인이 만나본 사람 중 가장 뛰어난 학습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며 노무현을 치켜세우기도 한다. 유시민 본인도 똑똑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사람이고 심재철이나 김문수 등 여권에서 활동하는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과 젊었을 적 친분을 가지고 많은 교류를 나누었던 걸 보면 정치계에선 노무현이 제일 머리가 좋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8년 이후 유시민은 민주당으로 가기를 거부한 친노 인사들과 힘을 모아 국민참여당을 창설했고, 당의 성향을 민주당계 정당보다 더 진보적인 쪽으로 잡았다. 고로 민주당에 소속된 친노 인사들과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됐다. 그러나 국민참여당이 정치적으로 상승세를 타질 못하자 참여정부 시절엔 불편한 관계였지만 '민주당을 긴장시킬 제3당이 필요하다'는 것엔 서로 동의하던 진보 진영과 손을 잡아 통합진보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19대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은 13석을 얻는 데 그쳤고 총선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각한 내부 분열을 겪게 된다. 그러자 통합진보당을 탈당해 함께 탈당했던 노회찬, 심상정 등과 함께 진보정의당 - 정의당을 창당했다. 

정계 은퇴를 선언한 뒤에는 그냥 정의당 평당원으로 지내고 있는데, 민주당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진보 정당 쪽에서 정치한 경력이 더 많음에도 민주당의 친노계 의원과 친밀한 관계가 있는 것이 유시민이라는 사람만의 특징이다. 그 이유로는 비록 정당은 달라도 다른 친노계 민주당 의원들과도 정치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고 받았으며, 사적으로도 참여정부 시절 맺었던 끈끈한 관계를 여전히 잘 유지하기 때문인 듯하다. 노 전 대통령을 기리는 행사가 열릴 때에면 자주 민주당 소속 친노계 정치인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입담을 과시하곤 한다. 이 때문에 유시민을 민주당계로 아는 사람도 제법 적지 않고, 실제로도 민주당계와 제3지대를 아우르는 광역계 친노계열로 구분된다.


유시민이 있던 진보 정당들의 강령도 노무현의 신념을 그대로 이어받은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그로 인해 진보 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의 거리를 좁힌 인물로 손꼽히기도 한다. 실제로 그가 민주당계 정당과 진보 정당 사이에 끼친 영향은 크며, 친노 성향의 의원들이 이 둘 사이의 화합을 유도하는 행동도 자주 하여 유시민도 그중 하나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한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2017년 1월 5일 방영된 썰전 200회에 축하인사를 보내온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유시민 작가를 향해 “유시민 작가는 ‘정치 안 한다’ 너무 이렇게만 말씀하시지 마시라”며 “언젠가는 운명처럼 정치가 다시 유시민 작가님을 부를 때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싶다”고 말하며 내심 그의 정계 복귀를 권유하는 듯한 느낌의 발언을 남긴 바가 있다.

여담으로 유시민은 한겨레 절독을 선언한 적이 있다. 이유는 한겨레에서 ‘놈현’ 관 장사를 넘어라'라는 제목의 기사를 작성했기 때문. 하지만 순간적인 욱한 감정으로 그런 것이고 아내의 이름으로 계속 구독 중이라 한다
참고로 유시민에게 어머니가 있는데 고노무현전대통령을 아들아 불러 잘대해주셨다고 한다 노무현대통령도 어머니 라고 불러 잘따랐다고한다
노무현대통령이 서거하자 아들아 라고불러 주변을 숙연하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