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평범한 여대생 임수경 방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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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평범한 여대생 임수경 방북 사건


2017. 6. 3.

1989년 7월~8월 대한민국의 대학생 임수경이 방북한 사건. 당시 남북한 사회 모두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의 남북관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임수경은 1968년 11월 6일 생으로 1980년대 말의 남북화해 분위기를 타고 방북한 인사들 중 한 명이다. 그리고 북한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임수경은 서울특별시에서 11월 6일에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 임판호 씨는 서울대학교 출신의 기자로 당시에는 서울지하철공사 공보실장직에 있었고, 집에 컴퓨터가 있었을 정도니 당시 기준으로 본다면 제법 부유한 편이었다. 이런 것 때문에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불어과에 1986년 입학하기까지 운동권과 접점을 찾을 길은 없었다. 대학생 때도 운동권과는 관련이 없었고 미스코리아에 나가기 위해서 사진을 찍기도 하거나 KBS '젊음의 행진'에 출연해서 김형곤과 짧은 콩트를 하였다. 이런 활동을 보면 부잣집 딸내미였고, 잘 나가는 아가씨였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시대가 시대였고 대학생치고 사회운동 한 번 안 해 본 사람이 없다고 할 때였기 때문에 점점 사회운동에 관심을 두게 된다. 그래도 이때까지 활동은 풍물반, 학생자치회, 공정선거감시단 같은 내부적인 민주화 운동이었고 통일이나 민족운동 쪽과는 거리가 있었다. 당시 시대 사항을 보면 완전히 분리가 안 되지만 가정 형편을 봐도 그렇고 자진해서 입북할 기미는 없었다. 그런 것이 총학생회에서 일하면서 바뀌었다.

북한은 1989년 2월, 당해 7월 1일로 예정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면서 조선학생위원회 명의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에 초청장을 보냈다. 이 초청장은 조선학생위원회 -> 조선(북한)적십자사 -> 대한적십자사 ->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 전대협의 경로로 전달되고 전대협 제 3기 의장 임종석의 주도 하의 전대협은 산하에 '평양축전 참가 준비위원회'를 두어 축전 참가를 준비한다. 총학생회에서 일하던 임수경은 당연히 '용인/성남 지역 총학생회연합 축전준비위원회'와 연결되어 일하게 되었다.

북한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취하던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기에도 어려운 일이 노태우 정권 시절에 가능했던건 당시 전세계적인 탈냉전 분위기 속에서 남북 간에도 화해 분위기가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공산권과의 대대적인 교류와 조건없는 남북대화를 주장한 7.7 선언으로 고조되었다. 더구나 한정적이지만 민주화의 성공과 맞물린 자유로운 분위기와 여소야대 상황에서 정부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에 이런 것도 가능했다. 즉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 자체는 당시의 정부 방침에 어긋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별 제재거리도 아니었다. 심지어 한국일보 2월 12일자에서 <대학생들 평양축전 보낸다>란 우호적 기사가 실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문익환 목사의 밀입북 사건이 벌어지면서 삽시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문익환 목사가 몰래 입북해서 김일성과 포옹까지 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다시 공안정국이 조성되면서 정부는 학생들의 평양축전 참가 투쟁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전대협은 평축 참가를 위해 문교부와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1989년 6월 6일에는 문교부 장관 정원식이 평축은 북한의 반미/반한 선전장이라는 이유를 들어 전대협의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를 불허한다. 거기에 공안정국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운동권 내부에서도 "지금 상황에서 통일운동에 주력하는 게 올바른 방향인가"란 문제까지 제기되어 평축 참가는 물 건너간 듯했다.


하지만 이미 실무적인 차원의 준비는 끝나 있었고 무엇보다 정부에서 안된다고 해서 안할 전대협이 아니었다. 전대협은 밀입북을 하기로 결정한다.

대한민국에서 북한 지역으로 넘어가는 가장 빠른 길은 휴전선과 북방한계선을 제외하면 서울-베이징(북경)-평양을 거치며 가는 길이었다. 한중 수교 이전에 가장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문익환 목사가 이 루트로 방북하는 바람에 이용이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임수경은 일본-서독-동독을 통한 우회로를 선택했다. 6월 21일 임수경은 부모에게 알리지 않은 채 도쿄로 출발해 일본에서 7일간 머무른 뒤, 서베를린으로 갔다. 이후 동베를린을 거쳐 모스크바로 간 다음에 평양으로 출발, 9일 만인 6월 30일 오후 1시 30분에 평양에 도착했다. 이날 임수경은 "돌아갈 때는 판문점을 통과하겠으며 남측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죽음을 각오한 투쟁도 불사하겠다"고 말했다. 이 순간, 전 세계 언론사들의 텔레스는 '전대협은 마침내 평양에 도착했습니다'라는 식으로 임수경의 평양 도착과 그녀의 도착 성명을 긴급 타전했다.

임수경이 북한에 발을 들이기 전날, 한양대학교에서는 경찰의 원천 봉쇄에도 불구하고 평양축전 전야제에 참가한 5천여 명의 대학생들은 임수경이 전대협 대표로써 북으로 향한다는 속보를 듣고 환호성을 올렸다. 다음날 6월 30일 전대협 의장 임종석과 평축 준비위원장 전문환은 한양대 기자회견에서 임수경을 평축에 참가시키기 위해 평양으로 파견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민들은 전대협의 평양축전 대표 파견이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진 불가피한 과정을 조국통일의 단심으로 이해해 주기 바라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불순한 마음도 없는 우리의 통일을 향한 평양행을 지지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경찰은 평축 출정식이 막 진행되려는 찰나에 7천 5백여 명의 전의경 병력을 한양대로 투입해 학생 2천여 명을 강제 연행했다. 이때 홍성담, 차일환 등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이하 민미련) 소속 민중화가들이 제작한 연작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가 경찰에 의해 탈취되어 이리저리 찢겨 불태워지기도 했다.

입북후 임수경은 7월 7일, 북한의 조선학생위원회 위원장 김창룡과 함께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을 발표해 남한의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발표 닷새 전인 7월 3일에 푸른 치마와 흰 저고리 차림의 임수경은 평양 인민대회장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전대협이 드리는 호소문'을 낭독한 후, "귀국 뒤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서 "한국에서는 감옥에 가는 게 죄가 아니며 나는 이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라고 했다. 


덧붙여 그녀는 국보법을 어기면서까지 북한에 온 동기로는 '조국 통일에 대한 열망'때문이라면서 남과 북은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해 민족 대단결의 원칙에서 통일되어야 하며 미국은 한국 내 문제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했다. 이날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우리의 소원을 통일>을 부르며 기자회견장을 떠났다.
임수경의 방북은 남북 양쪽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사실 그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당시 온갖 밀입북 사건이 터지고 있었기 때문에 '헐 이제는 꼬꼬마 대학생도 북한에 들어가네', '젖 비린내나는 기집애도 막 나대네' 정도의 반응을 보인 반면, 북한에서는 선전 측면에서 거의 핵폭탄이 터졌다.

당시에 온갖 남한 인사의 방문으로 정신없으면서도 즐거워하던 북한 입장에서도 임수경의 방북은 굉장히 신선하면서도 충격이었다. 당시에 방문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남자들로 남한에서도 제법 명망을 지녀서 함부로 하기 어려운 이들이 많았지만, 임수경은 중산층 자제에 아직 앳된 평범한 여대생이었다. 거기다 임수경의 모습은 노동운동이나 민족운동에 투신한 투사의 모습이 아닌 발랄한 남한 대학생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 당장에 북한의 관심은 임수경에게 집중된다. 오죽하면 북한 언론이 김일성보다 더 많이 취재하려고 했던 유일한 인물이란 평가까지 있었을까. 살벌한 사회통제가 당연시 되는 이북에서 임수경이 나타나면 동원하지도 않은 지역 주민들까지 자발적으로 몰려들면서 인근 공장이 모조리 마비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인만큼 북한에서는 선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상투적인 선전 방문을 준비한다. 그런데 임수경은 북한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임수경의 돌출행동은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처음에 와서 한 말이 "저는 북한 체제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북한이 좋아서 온 게 아닙니다." 였고 사람들만 모이면 원고없이 즉석 연설을 하는 등 통제가 안되었으니 선전 담당자들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거기다 북한에서는 가보급인 김정일 하사품을 그냥 두고 나오고, 북한의 기술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만만하게 준비한 선전용 16비트 컴퓨터를 보고는 "어, 우리 집에 있는 거랑 똑같은 거네?"(당시 임수경의 가족은 아버지가 서울지하철공사 공보실장으로 만만찮은 상류층이었다)은 같은 걸로 당시 북한의 자존심에 사정없이 상처를 주었다. 특히 앞서 말한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 역시 결코 빈말이 아니라, 세습정치까지 물고 늘어져서 주변의 안내원들을 경악시켰다. 사실 북한의 세습체제에 대해서는 소련을 비롯한 다른 공산권 국가에서도 엄청나게 씹어대는 단골 소재였다. 독재라는 측면에선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였지만 다른 공산 국가들은 집권세력 내부적으로나마 경쟁을 거쳐서 정권을 장악하는데 북한은 그냥 부자 지간에 권력을 물려주는 체제였으니 그랬을 만하다.

특히 북측이 미리 준비해둔 조선은 하나다라는 선전문구를 끝끝내 거부하고 조국은 하나다로 고치게 만들었다. '조선'이란 공식 국호를 쓰고 있는 북의 입장에서 '조선은 하나다'는 한마디로 우리가 정통이고 남한은 사이비 짝퉁정권이란 주장이다. 임수경은 이걸 거부하고 민족 모두가 공감할 수 잇는 '조국'을 사용한 것이다. 출발 직후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도 내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라고 쓰고 있다. 

거기에 북의 학생들이 선물해준 스카프도 버리고, 집단체조 관람중에 퇴장하고,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 방문도 '다른 행사도 있는데 거긴 왜 가요?'라고 그다지 내켜하지 않는 뜻을 보인걸 북측 실무자들이 울며불며 사정해서 겨우겨우 방문했다고 한다. KBS인물현대사에 출연해서 한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임수경은 북쪽 실무자들한테 만경대가 세계청년학생축전의 행사중에 하나냐? 거기 가는게 그렇다면 내가 가겠다. 나는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러 온 사람이지, 만경대에 가기 위해서 온 사람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을 방문한 고위인사들은 만경대를 방문하는 게 공식행사라는 북쪽의 설명을 듣고 결국 만경대를 방문했고, 이는 귀환 이후 지금까지 극우세력들이 임수경을 공격하는 단골소재로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비판적이거나 도발적인 발언보다는 젊은 여대생의 존재 자체에 북한 사람들은 엄청나게 열광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탈북자들의 증언과 임수경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북한에서 임수경은 인기 정상의 아이돌이었다고 했다. 당시 임수경은 전형적인 새내기 운동권 여대생의 복장(하얀 티셔츠에 긴 청바지를 하고 있었는데, 이런 이미지부터가 북한에서는 엄청난 문화충격이었던 것. 당시 남한 여대생 임수경의 당돌한 모습과 산뜻한 패션은 북한에 충격을 안겼지만, 반대로 "남남북녀라더니 맞는 말이긴 하네..."라는 수근거림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북한에서 대학생의 이미지라고 하면 그저 시커먼 옷을 입고 당의 규율이나 주체사상만 외워야만 했던, 수동적이고 암울한 이미지였는데 작고 당돌한 여성이 캐주얼한 복장으로 통일 통일을 외치니 신선한 충격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북한 대학생들은 몰래 모여서 "남조선의 대학생이 저렇게 당당하게 다니는데 우리는 뭐냐."라고 한탄 비슷하게 말하기도 했었다고 전해진다.


임수경이 가는 곳마다 북한 사람들이 몰려와서 보려고 난리치고 환호하고, 기자들이 플래쉬를 터뜨리고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종종 노래해보라고 기자들이 요구하기도 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전대협진군가> 같은걸 불렀다고 한다. 이후에 이 두 노래는 북한에서 유행한다. 오죽했으며 이런 예상하지 못한 임수경의 선전전(?) 덕분에 의도치 않게 이득을 본 남한 정부에서 뜻하지 않게 공을 세웠지 않느냐는 의견이 나왔다고 할까. 

방북 자체야 임수경 이전에도 여러 사람이 했지만, 문익환 목사 같은 명망있는 사회운동가도 아니고 대학생 운동권의 핵심인사도 아닌 평범한 여대생의 입북은 남쪽에서도 큰 관심사였다. TV 대담토론에서도 거론되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치기어린 여자애의 행동으로 취급되었고, 임수경의 방북으로 인해 남한이 뜻하지 않게 선전 효과를 얻었다는 점 때문에라도 썩 나쁘게 평가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이 발표된 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임수경이 직접 기초했다는 이 선언문은 당시 화해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군사적 긴장 완화, 평화협정 체결, 남북 불가침 선언처럼 상식적이며 누구나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 중에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꼭 북한의 주장을 따라서만은 아니었고, 당시 전대협 역시 주한미군이 자주통일의 방해물이라는 이유로 주한미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임수경은 단계적이란 용어를 빼자는 북한의 주장을 물리치긴 했지만, 당시 사회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주한미군 철수는 함부로 주장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었다. 이는 1980년대 운동권 세력의 반미사상을 반영했다. 비록 탈냉전 분위기가 강해지는 중이었다곤 해도, 당시 남한에서 주한미군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우리나라를 구해준 군대'였다. 게다가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를 강하게 요구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주장은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도 거는 일이었다.

덕분에 남측에서 임수경에 대한 비난이 거셌으며 언론 역시 공안당국이 흘려준 '임수경 가족의 좌익 성향'이란 허위 사실을 충실히 보도하면서 어이없는 '마녀사냥'에 적극 가담했다. 1984년 군 복무시에 총기사고로 이미 죽은 오빠는 염세주의로 자살했다고 했고, 10촌 이내 친척 가운데 월북자가 8명이라는 도대체 무슨 상관인지 모를 근거없는 기사가 나왔다. 이로 인해 당시 언론회관 이사장 비서실에 수습직으로 근무 중이던 임수경의 언니는 6월 30일에 '임용해제' 통지를 받고, 부친은 다니던 직장에서 사직 종용 및 해고 협박, 그리고 온갖 욕설이 들어간 전화를 받아야만 했었다.


45일간의 방북을 마친 임수경은 8월 15일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서 귀환한다. 원래는 7월 27일에 도착하려 했는데, 처음에는 안된다고 했었다. 마침 이 시기에 판문점 군사정전위 협정이 열려 6일간 단식투쟁을 해서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귀환한 순간, 그들을 맞이한 이들은 전대협 학우들도, 임 양의 부모님도, 정의구현 사제단 신부들도 아닌 유엔군과 안기부 수사관이었다. 유엔군 소령은 이들의 북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판단해 체포될 것이라고 했고, 안기부 수사관들은 몸수색을 하겠다고 했다. 이들은 멸공관에 배치된 경찰 헬기에 탄 채 안기부로 가서 조사를 받았다.

이후 11월 13일에 1차 공판이 열렸다. 이날 심리에 앞서 임수경은 모두진술을 통해 "북한의 꼭두각시가 되어 정치 선전에 앞장섰다는 안기부의 주장은 터무니없다"라고 주장하면서 "현직 장관이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 5시간 동안이나 평양축전을 관람했으면서도 공직에서 활동 중인데 내가 수의를 입은 채 포승에 묶여 법정에 선 건 형평성의 원칙에 어긋나므로 국가보안법에 대한 처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열흘 뒤 전대협 의장 임종석은 기자회견에서 아래와 같이 발표하며 전대협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임 양의 평양축전 참가는 반국가단체로의 잠입탈출이 아니라 또 하나의 조국으로 간 것에 지나지 않고,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은 폐지해야 할 뿐 아니라 이 법에 의해 구속/수감된 임 양 및 모든 양심수는 즉각 석방되어야 한다. (중략) 현재 노태우 정권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남북정상회담은 반국가단체 우두머리와의 회합통신을 시도하는 무모한 불장난일 뿐 아니라 국가보안법상의 이적행위에 해당하므로 이를 추진해 온 노태우를 비롯한 모든 사람은 이적행위자로 처벌되어야 한다 (중략) 지난 88년의 7.7 선언을 통해 북한을 적이 아니라 민족공동체로 규정한 노태우는 국가보안법에 의해 극형에 처해져야 하며 현재 진행 중인 남북적십자회담, 체육회담, 국회회담 등도 동일한 근거로 엄벌에 처해져야 한다. (중략) 이미 구시대적 유물이 되어버린 냉전논리에 따라 북한을 적으로 규정한다면 이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며 정권은 더 이상 이러한 냉전논리를 정권 유지에 이용해선 안 된다.
- 대학정론 1989년 11월 30일자 1면 기사 <임종석 의장 기자회견 - "임 양 방북, 전대협 독자적인 판단">

이후 해를 넘겨 1990년 1월 8일,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는 5차 공판을 거부했고, 변호인단은 사임하겠다고 했다. 당시 주임 변호사로 이 사건을 맡은 천정배 변호사는 "피고인들은 그 동안 국민적 관심에 비추어 법원설비가 허용하는 한 최대한으로 공개된 상태에서 재판받기를 희망해 왔으나 이 같은 극도의 방청 제한 상태에서 공개재판 원칙에 비추어 정당한 재판이 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며 "국가보안법 자체의 위헌성과 반통일적 성격뿐만 아니라 사법부의 과거 행적에 비추어봐도 법원이 정당한 판결을 내릴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재판에 임했던 것은 공개재판을 통해 국민들에게 방북의 정당성을 설명하려 했던 것이나 사실상 비공개나 마찬가지로 진행돼 더 이상 재판에 응할 의미가 없어졌다."고 했다. 


2월 5일 선고공판에서 법원은 임수경과 문국현에게 국가보안법상 특수탈출 및 잠입, 회합, 고무찬양, 금품수수죄 등을 적용해 임수경은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 문규현은 징역 8년 및 자격정지 8년을 확정짓고 7월 27일에 서울구치소에서 청주여자교도소로 이감되었다. 8월 1일에는 임수경의 모친과 대학생 등으로 구성된 면회단이 청주여자교도소로 면회를 가려다 교도소 측 관계자들과 충돌이 일기도 했다.

9월 26일에 대법원은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의 상고를 기각하고 이들에게 각각 징역 5년형과 자격정지 5년을 선고했다. 대법원 측은 "피고인들의 입북은 전대협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 하여 원심대로 이들을 유죄로 인정한 건 정당하다고 했으며, 재판부도 "피고인들에 대한 항소심이 끝난 뒤 '남북교류협력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시행되고 있지만 이 법은 남북한의 왕래/교류협력사업 및 통신/역무제공 등의 남북 교류와 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에 관해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범위 내에서만 다른 법률에 우선 적용된다"고 지적하며 위와 같은 요건을 충족치 않은 이 사건에 대해선 해당 법률의 적용을 받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3년 5개월간 복역 후 1992년 12월 24일 성탄절 특사로 가석방되었다.

위에서도 설명했듯 당시 북한 사회가 이 사건으로 받은 충격은 상당히 컸다. 임수경이란 인물 자체가 당시의 북한의 젊은층에게 굉장한 충격이었기 때문. 바로 이 때문에 북한에서 임수경은 '자유'를 상징하게 되었다. 방북 후 북한 대학생 사이에서는 원래는 금지된 미국의 상징인, 임수경과 같은 면티에 청바지의 캐주얼한 차림이 일명 림수경 복장으로 유행했다. 그리고 <전대협 진군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북한 전역에서 유행했다.

또한 북한은 중산층 자제인 임수경을 통해서 남한이 어떤 사회인지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되었다. 즉 임수경의 여유롭고 자유분방한 행동과 경제적 여유를 통해 남한의 경제적 수준과 남한 사회가 누리는 자유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된 것. 덕분에 북한에서 사상투쟁(사실상의 사상통제)을 하느라고 고생했다는 후문이다.

임수경의 가족들도 뜻하지 않게 북한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1990년대 초반 남북총리급 회담이 열렸을 때 임수경과 가족들이 무사하다는 걸 믿지 못한 북한 기자방문단이 불시에 임수경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통일열사의 가족이 고초를 당하는지 확인하고, 만약 사실이면 비판을 하겠다'는 의도에서였다. 헌데 임수경의 집에 들이닥쳐보니 임수경의 가족들은 정말로 멀쩡히 살아 있었고, 임수경 가족의 생활상까지 북한 TV로 방영(사실상 생중계)되었다.


남한 기준에서 보면 임수경 가족들의 처지는 그렇게 편하지 않았다. 위에서 말했듯 임수경의 언니는 직장에서 짤렸고, 서울지하철공사 간부였던 임수경의 부친은 온갖 욕과 협박을 당한 나머지 결국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는 조건으로 정권과 타협했다가, 결국 시간이 흐른뒤에 자의반 타의반 그만둔다. 뿐만 아니라 일가 친척 모두 "빨갱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했다. 그렇지만 북한에서는 누군가가 밀입남했다가 돌아올 경우 본인은 사형, 가족과 일가친척들은 수용소로 들어가는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판이었으니 임수경의 가족들이 멀쩡히 살아서 돌아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더구나 그런 정치범의 집안에 그 귀한 컬러 텔레비전, 소파, 냉장고 등 온갖 가전제품이 있고 냉장고를 열었을 때 통조림이나 우유 등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에 북한 주민들은 그만 눈이 돌아갔다고 한다. 당시 북한에서 잘사는 집의 기준은 소위 '5장 6기'였다. 5장6기란 이불장, 옷장, 책장, 식장, 신발장의 5장, 수상기, 냉동기, 세탁기, 재봉기, 선풍기, 녹음기의 6기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모두 갖춘 집은 평양의 상류층 등 전체인구의 10%에 불과했고,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니, 고난의 행군 당시 경제가 쇠퇴했다는 것을 감안하고 그 이후에도 80년대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한 걸 보면 더 악화되었을 수도 있다. 물론 남한은 저 5장 6기는 당시에도 중산층이라면 다 있던 물건이다. 재봉틀은 조금 예외로, 당시에도 기성복에 밀려 쇠퇴하던 중이었다. 결과적으로 체제경쟁에서 졌다는 걸 TV생중계를 통해 보여주며 망했어요.

이건 임수경의 재판에서도 이어졌다. 북한은 로동신문을 통해 임수경이 15년 구형에 5년 징역을 받았다는 사실을 소개하며 한국 정부를 비판했지만, 제대로 된 재판을 열고 사형이 아니라 15년형을 구형받고, 겨우 5년형만 받았다는 사실이 북한에서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게다가 그마저도 다 채우지 않고 3년 반만에 출소했다는 사실까지 북한 언론에 보도되어 충격을 안겨주었다. 반역자를 가석방하는 남한 정권이라는 생각에 더 충격이 든 것.

사실 북한 사람들은 임수경이 휴전선을 넘어 돌아갈 때 죽으려고 돌아가는 줄 알고 슬퍼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거기다 감옥에서 편지와 일기를 쓰고 책도 읽는다는 등 하나하나가 충격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비교적이지만, 남한에선 임수경 방북 사건을 북한에 비해 비교적 가볍게 받아들였다. 북한에서 임수경이 했다는 남한 정부 비판은 사실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당시 남한의 넉넉한 경제력과 북한보다는 상대적으로 정의로운 사회상 그리고 자유로움을 선전하는 뜻하지 않는 기회를 가지는 등 이익이 더 컸기 때문에 이적행위보다는 북한에 변화의 바람을 약간이라도 불고 온 통일의 기수라는 면이 더 강조되었다. 

그렇다해도 당시 노태우 정부가 임수경에게 압박을 가한 건 사실이고, 우익 측에서 엄청 욕하긴 했다. 결정적으로 임수경 방북 이후에 80년대부터 90년대 말까지 쉴새없이 온갖 사건이 몰아쳤기 때문에 재판 이후에는 금세 잊혀졌다. 그러다가 2012년 임수경의 '탈북자=변절자 발언이 논란이 되면서 잠깐 재조명을 받게 되었다.

임수경은 이 일이 있은 후 한참 뒤에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 민주통합당의 비례대표로 출마하여 당선된 후 국회의원이 되어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의 통일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7년 현재는 무소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