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7.
명성황후는 곰보에 엄청난 추녀라는 말이 한간에 떠돌고 있습니다.명성황후라 추정되는 몇장의 사진들중 가장 유력하다는 사진도
다리를 벌리고 찍은걸로 보아 명성황후가 아니다라는 주장과 또 황후이기에 저렇게 찍었다는 주장등으로 매우 다른 의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단순하게 생각해서 한 나라의 국모를 뽑는데 얼굴이 곰보에 엄청난 추녀를 어떻게 뽑을수 있냐라고 생각할수도 있습니다.여기, 그때 당시 명성황후를 만나보았던 사람들의 기록을 정리해놓은 글이 있습니다.
명성왕후를 만난 사람들
명성황후는 어떤 외모를 지니고 있었을까?? 현재 황후에 대한 사료가 전해지지 않는 상황에서 외모에 대한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녀를 만난 사람들의 증언이 실린 글이 전부이다.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이였던 신동식 위원은 칼럼 "취재의 한께 놓쳐버린 이야기들"에서 명성황후의 외모를 짐작한 만한 잛은 글이 소개 된다.
"조선조 23대 순조의 셋째 딸 덕온공주 외증손녀 윤백영 할머니는 60년대 초 궁중관련 문화재 고증, 보전 활동에 소리 없이 공헌한 분이다. 자그마한 체구에 총기가 대단하고, 눈이 밝아 문화재관련 취재 때 여러 번 도움을 받았다. 윤씨는 덕온공주가 직접 입었던 당의를 보관해 오다가 복식학자 석주선 교수에게 기증했고, 단국대에 석주선 박물관이 개관되며 이곳에 소장케 한 분이다. 이 분이 어렸을 때 집안에서 명성황후를 뵌 어른들 말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명성황후는 얼굴이 갸름하고, 콧날이 오똑하고, 입매가 야무지고, 눈이 가늘고, 살비듬이 흰 분이었는데 단지 눈동자에 실핏줄이 서 있어 '언짢은 상'으로 어른들이 걱정했다고 한다. 제 명에 못 갈 흠이라는 말이 돌았다는 것이다."
황후를 만난 또 다른 인물로는 영국 고위성직자의 딸 이였던 비숍여사가 있는데 그녀는 1893년 조선을 처음 방문한 이래 1897년 까지 4차례 조선을 답사했다.
그녀는 조선 방문기간 중 명성황후를 4차례 만났으며 그녀가 남긴"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을 통해 명성황후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다.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했고 퍽 우아한 자태의 늘씬한 여성이었다. 피부는 너무도 투명하여 꼭 진줏빛 가루를 뿌린 듯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었다. 대화가 시작되면, 특히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그녀의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나는 왕비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나는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왕뿐 아니라 그 외 많은 사람들을 수하에 넣고 지휘하는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라 전한다.
이렇듯 간간히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 황후의 모습을 추론해보면 나이에 비해 무척 젊은 피부와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정치가로서의 역량 또한 무척 뛰어난 단아한 외모와 풍부한 학식을 겸비한 여인으로 생각된다.
고종은 황후를 매우 신뢰하고 사랑했으며 국정일을 의논할 수 있는 동반자로 생각했다. 여성의 활동이 극히 제한 되었던 시절 수렴청정 - 나이 어린 왕이 성인이 될 때까지 왕대비 또는 대왕대비가 국정의 일을 대리로 처리하던 것- 이 아닌 왕의 동반자로써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국내외 정세를 보는 식견 과 현명함이 뛰어난 여성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단지 "아름다웠다"라는 표현보다
'명성황후는 얼굴이 갸름하고, 콧날이 오똑하고, 입매가 야무지고, 눈이 가늘고'란 식으로 직접적으로 묘사해놓은 글을 보아 명성황후가 추녀가 아니였을거란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명성황후가 마마에 걸려 곰보였다고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문학사상사에서 나온 1993년 판 김동인씨의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 321 패이지 12번째 줄에 보면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의 어릴적 모습을 본 묘사가 나옵니다.
'흥선은 민 소저를 보았다. 숭글숭글 얽기는 하였지만 영특하게 생긴 소녀였다'
이 책의 분류가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분명치 않고 또 김동인씨의 책이므로 믿지 못하겠다는 분도 계십니다.하지만 다른걸 떠나서 저는 어렸을때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였나 싶습니다.얽은 얼굴은 예전에도 좋은 인상을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부분에서 '예를 들어 중전간택시 비록 얼굴이 얽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간택을 하기로 하였다'란 식으로 또 언급이 되었다면 모를까.아무리 대원군이 외척을 견제하기 위하여 그 당시엔 조건이 많이 떨어지던 명성황후를 중전으로 간택하였다고 하지만 얼굴이 얽은이가 왕족의 후손을 이을 중전이 될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때 시대의 '미'와 지금 세대의 '미'의 기준은 다릅니다.하지만, 제가 말하는 '미'는 그때 당시의 시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양귀비사진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녀의 모습은 제가 생각하는 미인이 모습이 아니였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그때 당시에 미녀로 인정받았던 사실을 불신하지 않습니다.
그 시대의 미녀는 그 시대의 미녀일뿐일 수 있습니다.명성황후는 일제의 손에 치욕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사진조차 일제의 조작된 사진일뿐 분명한것이 없습니다.확실한건 우리나라를 다녀간 선교사들이 명성황후의 사진이나 그림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나라로 가져오는걸 모색하고 있다하니 그때 밝혀질 문제이고
정말 중요한 건 명성황후가 미녀였는지 아니였는지가 아니라 한 나라에 국모였던 분을 추녀라든지 곰보였다는 말로 다시 한번 우리의 자존심을 깍아 내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