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도시, 앙코르와트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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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도시, 앙코르와트 발견


2014. 8. 30.

1850년 6월, 백인 한 사람과 캄보디아인 네 사람이 캄보디아 톤레사프 호수 북쪽 밀림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인 가톨릭 신부 뷰오와 원주민 신자였다. 일행은 밀림 너머의 마을로 전교하러 떠났다가 길을 잃고 닷새째 숲속을 헤매고 있었다.



고목과 대나무를 밟아 쓰러뜨리는 코끼리 발자국 소리와 호랑이 울부짖음, 나뭇가지 사이를 바람처럼 옮겨 다니는 원숭이와 새들. 신부는 잔뜩 마음을 졸이면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지칠 대로 지쳐 거의 기다시피 숲을 헤쳐 나가던 그들 앞에 빽빽한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 환한 하늘이 보였다. 뷰오 신부는 구세주를 만난 듯 허둥지둥 야트막한 언덕으로 올라갔다.


“앗, 저게 뭐냐? 저게….”


신부가 우뚝 멈춰 서며 부르짖었다. 느닷없이 커다란 사람 얼굴이 맞은편에 나타나 있었다. 어찌나 놀랐던지 원주민 한 사람이 들고 있던 총을 떨어뜨렸다.


큰 얼굴은 지는 햇빛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었는데,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뷰오 신부가 놀란 가슴을 겨우 쓸어내리며 찬찬히 살펴보니, 그것은 아주 큰 돌탑에 새겨진 부처 얼굴이었다.


그들은 언덕 꼭대기에 올라서자, 눈 아래 펼쳐진 엄청난 광경에 경악했다. 부처 얼굴을 새긴 탑이 수없이 늘어서 있고, 거대한 왕궁과 나무에 뒤덮인 도시가 저녁놀 아래 끝간 데 없이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허깨비겠지. 이런 밀림 속에 저렇게 큰 도시가 있다니….’


뷰오 신부는 저도 모르게 그곳을 바라고 나아갔다. 성벽과 연못과 사원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거리는 똑바로 나 있었다. 높이 솟은 건물마다 훌륭한 조각이 새겨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때 얼이 빠진 듯이 부들부들 떨던 교인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밀림 속으로 달아나 버렸다. 뷰오 신부도 얼떨결에 그곳을 뛰쳐나왔다.


“그곳은 죽음의 왕궁, 선잠이 든 왕궁처럼 보였다. 성문 앞에 난 길 양쪽에는 3m쯤 되는 돌거인들이 서 있었다. 거인들은 대가리가 일곱 개 달린 큰 뱀을 안고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얼굴 모습은 옛날 인도 병사 같았다. 성문 안쪽에는 이교(異敎) 선녀가 춤추는 모습과 코끼리, 병사, 꽃무늬 들이 새겨져 있었다. 난 너무 놀라 숨이 멎거나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프랑스로 돌아간 뷰오 신부가 밀림 속 도시 얘기를 했지만 믿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너무 지쳐서 허깨비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1855년 프랑스의 탐험가이며 생물학자인 앙리 무어 박사가 우연히 옛날 책 한 권을 손에 넣었다. ‘진랍 풍토기’라는 제목으로 중국 사람이 쓴 인도차이나반도의 역사책이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캄보디아는 2,000년 전 세워진 나라로서 899년에 나라가 크게 부흥했었다. 그때의 나라 이름은 ‘진랍’이었고, 크메르족이 나라를 다스렸다. 진랍 왕국은 타일랜드·버마·라오스 등 인도차이나반도 거의 모두를 다스린 큰 나라였다. 도읍을 왕국의 한가운데 언덕인 앙코르에 세우고 앙코르톰이라고 불렀다. 그 도시의 뒤편에 어마어마한 절을 지었으니 그 이름을 앙코르(城) 와트(절)라고 한다. 진랍 왕국은 원나라와 어깨를 겨룰 만큼 강했으며 문화 또한 매우 눈부셨다. 그러나 이 왕국은 13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15세기에 아주 없어져 버렸다.”



책을 읽은 무어는 답답했다. 크메르족이 어디에서 온 민족인지,그렇게 강대했던 진랍 왕국이 왜 멸망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았다. 문득 그의 머리에 짚이는 것이 있었다. 5년 전 화제를 모은 뷰오 신부의 ‘밀림 속 도시’ 이야기.


‘신부의 말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곳이 앙코르톰이 아닐까?’


무어 박사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토록 강성했던 왕국에 대한 이야기가 캄보디아 역사책에 왜 한 줄도 남아 있지 않을까?’ 그는 끝내 마음을 다졌다. 밀림 속 도시를 찾아 캄보디아 왕국의 역사를 밝히기로.


1861년 1월9일 무어는 탐험대를 이끌고 밀림으로 들어갔다. 메콩 강의 샛강을 거슬러 올라가 톤레사프 호수를 건넌 뒤 한 마을에서 물으니 ‘창’이라고 하는 젊은이가 숲속의 도시에 얽힌 미신을 얘기해 주었다.


‘대가리 일곱 달린 뱀이 밀림을 다스리고 있을 때 거인들이 그 성을 세웠다. 그들은 커다란 돌로 산 같은 성벽을 쌓고,온 세상을 내려다볼 탑들을 수없이 세웠다. 그러나 거인들이 너무 잘난 체 뽐내자, 하느님이 그들을 잠재우고 성에 저주를 내려 숲으로 뒤덮었다. 거인들은 유령이 되어 밀림 속을 떠돌아다니고 있다.’


무어가 밀림 속 도시를 찾아간다고 하자 창이 말렸다.


“숲속에는 안개 코끼리를 탄 왕자와 울고 있는 여왕의 유령이 있고, 수십만이나 되는 남녀 유령이 돌아다니고 있어요. 거기에는 수백년 동안 신의 저주가 내려져 있습니다. 제발 가지 마십시오. 우리 할아버지도 그곳에 다녀온 다음날 돌아가셨습니다.”


창의 말은 고마웠지만 무어는 겁내지 않고 밀림으로 들어갔다. 1861년 1월13일. 탐험대는 빈 도시에 이르렀다. 무어 박사의 눈앞에는 허깨비가 아닌 진짜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한 발짝 한 발짝 그 안으로 들어섰다.


무어가 써보낸 ‘문명 세계에 보내는 미개지 탐험 보고서’가 프랑스 잡지에 실리자 탐험대가 줄을 이어 앙코르와트를 찾았다. 얼마 안 지나 밀림 속에서 작은 도시 몇 군데가 더 발견되었다. 그러나 정작 무어는 몇 달 뒤 말라리아에 걸려 세상을 뜨고 말았다.


9세기 초 앙코르 왕조 시조인 수리야바르만 2세가 크메르를 통일했다. 그는 자기를 힌두교의 비슈누 신왕(神王)이라고 일컬으며 앙코르톰을 세우기 시작했다. 앙코르톰은 쿨렌 고원과 톤레사프 호수 사이 120㎢의 기름진 평야에 세워졌는데 자그마치 300년이나 걸려 자야바르만 7세 때에야 완성되었다.


앙코르톰은 한 변의 길이가 3.2㎞인 네모꼴 도시이다. 둘레에는 성벽을 높이 쌓고,바깥에 해자(성 밖을 빙 두른 못)를 파서 악어를 길렀다. 그러나 이 도시는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였고,수백만 백성들은 성 밖에 흩어져 살았다.


앙코르톰 한가운데에는 바이욘 사원이 있다. 지름 25m,높이 45m나 되는 거대한 중앙탑을 중심으로 하여 솟은 탑 54개에 관음상 216개가 새겨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 사원에 쓰인 돌은 60만개. 1톤이 넘는 돌들은 거의 태국,베트남에서 코끼리나 배로 실어 왔다. 이 사원은 싸움터에서 죽은 용사들의 영혼을 달래려고 세워졌다고 한다.


잘 닦인 포장도로는 도시 한가운데로부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도로 양쪽에는 기이한 동물을 받들고 있는 신과 거인을 새긴 담장이 있다. 대문들은 어찌나 큰지 코끼리등에 가마를 얹고도 지나갈 수 있을 정도다.


대문마다 하나같이 훌륭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왕궁의 방들은 힌두교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 조각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모두 힌두교와 불교가 어우러진 예술품인데 세계의 불가사의로 꼽히기에 조금도 흠잡을 데 없다.


앙코르톰보다 더 뛰어난 건축물은 성 밖 1.6㎞ 떨어진 곳에 있는 앙코르와트다.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절. 노테르담 대사원의 3배 크기로,한 변이 1.6㎞인 네모꼴이며 역시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이집트 쿠푸 왕의 피라미드에 쓰인 돌과 같은 양의 돌이 사용된 앙코르와트에는 7t짜리 기둥이 1,800개에 방은 260개나 된다. 서고·사당·계단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800m나 되는 회랑(回廊)에는 전설과 힌두교 경전에 나오는 인물들이 새겨져 있다. 그 위에 피라미드 같이 생긴 사원이 3단계로 치솟고,가운데에 탑 5개가 몰려 있다. 그 중 가장 높은 탑은 65.5m이다. 바로 이것을 무어가 처음 보았다. 사원 지붕에 덮인 기와는 한 장 무게가 200∼1,500㎏이나 된다고 한다.



앙코르톰은 1177년 라오스 참족에게 약탈당했으나 자야바르만 7세가 되찾았다. 그 뒤 다시 타일랜드 샴족과 몽골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처럼 거듭되는 외적의 침략으로 앙코르톰은 점점 허물어져 갔고,결국 1431년 타일랜드 아유타족에게 저수지가 파괴되자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치닫게 되었다. 1434년 크메르족은 끝내 도읍을 다른 데로 옮겼다. 이때부터 500여년 세월을 앙코르톰은 빈 도시로 버려진 채 밀림에 묻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눈부신 도시와 사원,앙코르톰과 앙코르와트를 건설한 크메르족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왜 한 줄도 기록을 남기지 않고 100만이 넘는 사람이 하루 아침에 자취를 감추었을까? 오늘날의 크메르 사람들이 이들의 후손인지는 확실치 않다. 앙코르의 조각·비문 따위로 미루어 보면 힌두족과 형제였거나,힌두족으로부터 배운 민족인 듯하다. 그들이 사라진 일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인류의 뛰어난 문화 유산인 앙코르와트는 크메르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그들은 국기와 지폐에 앙코르와트를 그려 넣었다. 이곳이 발견된 때로부터 1972년까지 캄보디아 정부는 프랑스의 도움을 얻어 밀림을 벗겨내고 자동차 길을 닦아 앙코르를 되살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1972년 이후 크메르를 침공한 베트남군과 크메르 루주 게릴라가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는 바람에 앙코르와트는 많이 파괴되었다. 2,000개나 되던 불상이 겨우 37개 남았을 정도였다.


전쟁이 끝나고서도 캄푸치아 정권은 앙코르와트를 버려두다시피 했다. 다행히 일본 정부가 ‘앙코르와트 유적 구제팀’(JSA)을 만들어 1994년부터 바이욘 사원과 앙코르와트를 복원해 오고 있다. 덕분에 앙코르와트는 일부가 옛 모습을 되찾았지만,전문가들은 이 유적이 제대로 복원되려면 100년이 넘게 걸릴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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