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 문명의 비극적인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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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문명의 비극적인 최후


2014. 3. 3.

1709년 이탈리아 중부 서해안에 자리잡은 베수비오스산 서쪽의 레지나 마을.수도원 뜰에서 우물을 파던 일꾼이 문득 무엇인가를 주워들었다.아름다운 대리석 조각이었다.그는 몇 번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1738년 4월 따뜻한 봄날.한 농부가 베수비오스산 기슭에서 밭을 갈고 있었다.난데없이 괭이 끝에서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흙을 파헤치니 꽤 긴 쇠붙이가 나왔다.소식을 듣고 달려온 토목 기사들은 그것이 아주 먼 옛날에 쓰인 수도관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그렇다면 그 땅 밑에는 옛 도시가 묻혀 있다는 말인가?나폴리 국왕 샤를르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네는 옛 골동품에 관심이 많은 여자였다.그녀는 왕실 공병부대 지휘관인 알쿠비에르를 시켜 베수비오스 산 기슭을 파헤쳤다.알쿠비에르는 폭약을 써서 15m 두께 바위를 뚫는 데 성공했다. 이 발굴에서 그들은 청동 조각품 몇개를 찾아냈고,12월11일에는 ‘헤르쿨레늄 극장’이라고 새겨진 돌을 발견했다.그들은 베수비오스 화산이 터졌을 때 용암에 파묻힌 1700년 전 로마 제국의 도시 헤르쿨레늄을 찾아냈던 것이다.

1748년 4월1일,샤를르 왕의 명령을 받은 알쿠비에르는 베수비오스산 기슭의 또 다른 곳을 파헤치기 시작했다.엿새째인 4월6일 이상한 돌기둥들이 나왔다.거기에는 라틴어가 새겨져 있었다.더 깊이 파 들어가자 눈부신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진 돌벽이 나왔다.


4월19일,청동제 조각들과 대리석 조각들이 쏟아져 나오던 끝에 처음으로 사람의 주검이 발굴되었다.금화를 잔뜩 움켜쥔 남자가 석고처럼 단단히 굳어 있었다.나폴리 왕국은 이 사건으로 떠들썩해졌고,출토된 유물들은 빠짐없이 국왕에게 바쳐졌다.얼마 뒤 원형 극장을 발굴한 알쿠비에르는 기대했던 보물이 나오지 않자 발굴을 그만두고 말았다.

1754년이 되자 이름 모를 지하 도시에 대한 발굴이 다시 시작되었다.그 지하 도시가 어느 시대 어느 도시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더구나 샤를르 왕은 옛 문화나 미술품에 대해 흥미가 없었으므로,그저 ‘보물 찾기’에 빠져 이곳 저곳 옮겨 가며 파헤치기만 했다.

훌륭한 문화 유적들이 무식한 일꾼들의 곡괭이에 마구 허물어지고 망가졌다.참으로 오랫동안 이 지하 도시는 그렇게 마구잡이로 파헤쳐졌다.


1755년 6월 어느 날 독일의 뛰어난 고고학자 요한 빙켈만이 자기 집 서재에서 옛 로마시대 책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소(小) 프리니우스 편지집’을 읽어 내려가던 빙켈만의 손이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 나폴리 국왕이 오래 전부터 파헤치고 있는 곳이 바로 로마시대 폼페이로구나!’ 베수비오 산기슭에 묻힌 지하 도시가 폼페이란? 사실이 밝혀진 순간이었다.빙켈만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었다. 거기에는 화산이 터졌을 때 소 프리니우스가 아버지인 대(大) 프리니우스를 따라 폼페이 시민들을 구하러 간 일을 상세히 적은 편지가 있었다. 편지에는 그 끔찍했던 날의 폼페이 모습이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폼페이 문명의 비극적인 최후



서기 79년 8월24일 아침. 지체 높은 로마 시민들의 여름철 휴양 도시인 폼페이는 바쁘고 활기에 넘쳐 있었다. 나폴리로부터 12㎞ 떨어진 베수비오산 기슭에서 사루누스강 어귀에 세워진 항구 도시 폼페이는 로마제국의 화려함을 잘 나타내 주는 사치스러운 도시였다.

베수비오산은 이따금 연기를 내뿜었지만 16년 전 폭발한 뒤로는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사람들은 가끔 연기를 뿜는 모습이 오히려 폼페이의 경관을 더욱 멋지게 꾸며 주고 있다고 말했다.
정오쯤, 며칠째 계속되던 땅의 흔들림이 갑자기 거세지더니 곧 베수비오로부터 하늘을 뒤덮는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이 미처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산꼭대기가 갈라지면서 뜨거운 화산재와 용암이 비 오듯 쏟아졌다.
새들은 날다가 낙엽처럼 떨어졌고,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짐승들도 숨을 곳을 찾아 갈팡질팡했다. 화산은 쉴새 없이 터졌고,검은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완전히 가렸다.
4시간쯤 지나자 인구 2만명 가운데 2,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을 힘을 다해 바닷가로 달아났다. 베수비오의 화산재는 30㎞나 떨어진 미세눔에까지도 날아오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미세눔 해군사령관이었던 대 프리니우스는 함대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모든 배는 폼페이로 가서 바닷가로 탈출한 시민들을 구하라!”

함대가 폼페이 항구에 다다르니 배 위로 화산재와 경석이 마구 쏟아졌다 바닷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검은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프리니우스는 카스텔라마레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는 폼페이 시민들이 바닷가를 따라 그리로 가리라고 예상했다.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바닷가를 달려가고 있었다. 함대는 서둘러 카스텔라마레 해안에 배를 대고 사람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믿어지지 않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났다.
바람이 돌연 낮게 깔리며 바닷가로 들이닥쳤다. 숨을 못 쉬도록 뜨거운 불기운과 독한 가스가 순식간에 함대를 덮쳤다. 구조 작업을 지휘하던 대 프리니우스,로마 병사들,그리고 막 구조돼 한숨을 돌리던 폼페이 시민들은 독가스에 질식돼 모두 죽고 말았다. 소 프리니우스와 몇몇 병사만이 간신히 그 곳을 벗어나 이 기록을 남겼다.
사흘이 지나자 분화가 멈추고 눈부신 태양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폼페이시는 한 채의 건물,한 사람의 자취도 없이 모든 것이 화산재와 용암 아래 파묻히고 말았다.

폼페이와 함께 베수비오스 산기슭에 세워진 헤르쿨레늄도 똑같은 불행을 당했다. 그러나 두 도시는 서로 다르게 파괴되었다. 헤르쿨레늄에는 화산재와 비,용암이 뒤섞인 진흙이 쏟아졌다. 그것은 무려 20m 두께로 덮여 이 도시를 영원히 잠재웠다. 폼페이는 이와 달랐다. 흙탕물 대신 잿가루와 경석들이 우박처럼 쏟아졌고,유황 연기가 그 뒤를 따라 도시를 덮침으로써 모든 생명을 질식시켰다. 폭발이 끝난 뒤에도 화산재 구름은 바람을 타고 멀리 아프리카에까지 번져 갔다.

1,700년이나 흐른 뒤,사람들은 그 옛날의 모습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나 갑작스레 닥친 재앙이었던지,새끼 돼지가 오븐에 넣어지려 한 채로 발견되었고,반쯤 구워진 빵이 발굴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너무나 불쌍한 모습으로 굳어져 있었다. 어머니들은 숨이 막히기 전에 힘껏 아기를 감싸안고 있었고,어떤 이는 금붙이를 꽉 움켜쥔 채 돌더미에 깔려 있었다. 어느 집 문턱에서는 젊은 여자 둘이 집안으로 들어가 귀중품을 꺼내려고 망설이는 몸짓으로 굳어 있었고,한 집에서는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던 듯 문상객들이 빙 둘러앉은 그대로 자신들의 장례식에 참석해 있었다.
모든 집이 1,700년 전 8월 어느 날 한때의 모습을 ‘동작 그만’인 채 간직하고 있었다. 도서실에는 두루마리 종이가,작업장에는 연장이,목욕탕에는 수세미가,여인숙 탁자에는 손님들이 서둘러 계산한 돈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폼페이 발굴


1717년 12월9일 프러시아의 슈텐달에서 가난한 신기료 장수 집안에서 태어난 빙켈만. 그는 어려서부터 옛 무덤을 찾아 시골을 떠돌거나 오래된 항아리들을 파내는 일을 즐겼다. 폼페이가 처음 발굴되던 1748년 빙켈만은 드레스덴의 뷔나우 백작 집에 서적을 맡아 보는 사서(司書)로 들어갔다. 거기서 옛 그리스 문화를 연구하던 그는 얼마 뒤 드레스덴에서 옛날 유물들이 발굴되자 그것을 연구한 책을 내어 그 방면의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1758년 빙켈만은 알바니 추기경의 고대 유물 수집품을 맡는 사서가 되었고,1763년에는 로마 일대의 고대 유물 감독관이 되었다. 그는 감독관 자격으로 나폴리 왕국을 찾아갔다. 그의 가슴 속은,땅속에 묻힌 지하 도시가 폼페이라는 사실을 처음 밝힌 주인공으로서,그곳을 과학적으로 발굴하여 로마 제국의 미술을 깊이 연구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폼페이를 찾아간 빙켈만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 일꾼들은 아무 곳이나 무턱대고 파 들어가다가 귀중품이 나오면 슬쩍 호주머니에 넣거나 왕에게 보냈다. 귀중한 사료가 되는 벽이나 건축물을 마구 부순 뒤 유물만 파내고 건물은 도로 묻어 버렸다. 빙켈만은 나폴리로 달려가 샤를르 국왕을 만났다.
“전하,나폴리 학자들이 폼페이를 마구잡이로 파헤치고 있습니다. 제발 폼페이를 훼손하지 말고 발굴해 주십시오. 거기서 나오는 물건은 인류 전체의 재산이며,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연구할 귀중한 자료입니다.” 왕은 벌컥 화를 냈다. “무슨 헛소리냐? 여긴 내 땅이고 출토품도 내 것이다. 나폴리 학자들은 내 명령에 따라 폼페이를 잘 발굴하고 있다.” 빙켈만은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뿐만 아니라 다시는 폼페이에 가지 못하도록 감시당했다. 그는 나폴리 박물관에 있는 폼페이 출토품을 스케치하는 일조차 거절당했다.

그러나 쉽게 물러날 빙켈만이 아니었다. 그는 현장 감독에게 돈을 주고 몰래 발굴 현장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그렇게 어렵사리 얻은 지식을 가지고 그는 1762년 ‘헤르쿨레늄 발굴에 관하여’라는 책을 출판했으며,1764년에는 ‘고대 미술사’라는 길이 남을 책을 펴냈다.
‘헤르쿨레늄 발굴에 관하여’와 ‘고대 미술사’는 폼페이와 헤르쿨레늄에서 나온 유물들을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조사하고 바르게 평가함으로써 ‘로마 미술사’라는 학문 체계를 세웠다.
빙켈만은 ‘헤르쿨레늄 발굴에 관하여’와 ‘고대 미술사’에서 옛 유물을 통해 옛 문화를 이해하는 법을 밝힘으로써 고고학이라는 학문의 바탕을 마련했다. 그는 아주 작은 실마리로부터 역사를 추리해 내고,유물을 통해 그 사실을 뒷받침했다. 역사학자나 철학자의 책상 위에서 맴돌던 고고학은 빙켈만이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당당한 학문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1768년 6월8일,진정한 고고학의 창시자 빙켈만은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에서 한 이탈리아인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죽음이 나폴리 국왕의 미움을 산 데에서 말미암은 것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범인이 빙켈만을 죽일 살해 동기는 전혀 없었다.

나폴리, 사르디니아, 시칠리아 등 여러 왕국으로 나뉘어 있던 이탈리아가 이탈리아 왕국으로 통일된 때는 1861년 3월이었다.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고고학자 주제페 피오렐리로 하여금 폼페이를 과학적으로 발굴하게 한 것은,빙켈만이 죽은 지 거의 100년이 다 되어서였다.
피오렐리는 빙켈만의 뜻을 이어 오늘날과 같은 발굴 방식을 처음 시도했다. 그것은 가재도구,집,거리…. 무엇 하나 빠짐없이 차근차근 드러내는 작업이다. 이 일은 지금껏 100년이 넘도록 계속되어 오고 있는데,약 5분의 4쯤 발굴되었다.


여태까지 드러난 바로는, 폼페이는 약 3㎞ 둘레의 타원형 도시이다. 도시 전체를 성벽으로 둘러쌌으며,성문은 모두 8개,길은 바둑판처럼 곧게 뻗어 있다. 길들은 7m너비로 모두 돌로 포장되었고,인도가 마찻길 양 옆으로 나 있다. 길모퉁이마다 공동 수도전이 세워져 있어 집집마다 수돗물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그 동안 발굴된 목욕탕은 네 군데. 한증탕,냉탕,온탕이 갖추어져 있었다.
도시 서남쪽에서는 광장 세 군데와 극장 두 군데(각각 800명, 5,000명 수용)가 드러났으며,근처에는 조합사무소,도량형 검사소,시청,체육관 따위 공공 건물이 모여 있다. 동쪽 끝에는 만 명도 넘게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경기장이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미술품 가운데 특히 ‘큐피드 벽화’와 ‘춤추는 폰의 동상’은 로마 미술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앞으로 10년 안에 발굴이 끝나면,로마 제국의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의 눈부신 유산이 더 많이 공개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어느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의 도시를 완전무결하게 보전하는 방법으로 도시를 화산재로 덮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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