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전쟁 실제로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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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전쟁 실제로 있었을까??


2014. 3. 2.

그리스신화에서 말하는 트로이 전쟁의 원인은 파리스의 헬레네 납치사건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신화에서 말하는 것 자체만 가지고도 트로이 전쟁의 원인은 여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전쟁의 원인은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신화적인 요소들을 제쳐둔다면, 현실적으로 돌아와 실제로 그런 대규모의 전쟁의 원인이 한 여자에게서 비롯되었다고는 생각하기는 힘들다. 트로이가 신화에 등장하는 도시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도시라는 것은 이미 밝혀졌고, 또 그곳에서 엄청난 파괴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트로이 전쟁은 실제로 일어났던 전쟁일 수 있고, 학자들은 보다 더 현실적인 전쟁의 이유를 밝혀야 한다.트로이 전쟁 실제로 있었을까??

콜린 맥클로우의 <트로이의 노래>나 원형의 <트로이아 대전쟁>과 같은 현대에 다시 쓰여진 트로이 전쟁 이야기는 이런 점들을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전쟁이 끝난 후, 흑해 연안에는 그리스의 식민지가 많이 생겼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트로이 전쟁은 상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었으며, 이 길을 통제하고 있는 트로이를 힘으로써 굴복시키려는 시도였다는 것이다. <트로이아 대전쟁>의 작가후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헬레네라는 한 여자 때문에 10만의 대군이 동원되어 10년 동안 싸웠다는 이야기는 후세에 전해지면서 그 비현실성 때문에 신화 또는 허구로 받아들여졌고, 역사적인 사실로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후대 그리스인들 중엔 트로이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거나, 또는 전쟁 기간에 헬레네는 스파르타에 줄곧 있었다는 주장을 펴는 이도 나타났다.

그러다 19세기 말에 어려서부터 트로이아 전설에 특이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쉴리이만이라는 사람이 트로이아에서 3,000여 년 전의 유적을 발굴함으로써 호메로스의 시는 역사적 기록으로서 새롭게 중요성을 얻었다. 트로이아는 신화성의 성이 아니라 실제 현재 터키의 히사를리크라는 지점에 있는 성이었고, 트로이아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 아닌 인간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한편 현대의 학자들에게도 헬레네에 의한 전쟁 발발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너무 낭만적인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들이 새로 내세운 전쟁의 원인은 무역 전쟁론이었다. 즉 트로이아 전쟁은 아카이아인들이 트로이아의 상권을 빼앗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라는 것인데, 그 중거로 그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 흑해 연안에 아카이아의 식민지가 생겼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경제적인 투쟁이 역사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합리적인 원인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다음은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그리스 문명의 탄생>에서 인용한 글로서, 위에 인용한 글과 일맥상통한다.

사랑과 폭력으로 점철된 이야기라면 트로이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전쟁이 끝난 뒤 500여년이 지난 후에 호메로스는 이를 서사시로 만들어 생생히 전해 주었다. 트로이 전쟁의 발단이 어떤 식으로 기록되었는지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있던 이들 두 나라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는 것만을 확실하다. 고고학자들은 문제의 장소에서 엄청난 파괴의 흔적을 발견했는데 연대상으로 트로이 전쟁과 같은 시기(BC 1200년)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는 해도 신화나 서사시로 전하는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헬레네라는 인물은 이야기의 흥미를 더하기 위해 나중에 첨가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헬레네야말로 이 이야기의 핵심적인 인물로, 그녀는 사랑 때문에 고통받는 산 증인이다. 서사시의 주제인 비련은 <일리아드>의 첫 부분에서도 볼 수 있는데, 아킬레우스가 사랑하는 여인을 부당하게 빼앗기고 나서 광분하는 장면이다. 설령 서사시가 흥미 위주의 줄거리로 엮어져 있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를 제시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트로이 성벽의 발치에서 10년 동안이나 아카이아인들을 묶어 놓았던 이 원정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빅토르 베라르는 트로이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하는 험난한 항로를 피해 육로수송을 가능케 해주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아카이아인이 이곳을 차지하려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가정을 세웠다. 그러나 아카이아인은 트로이에 정착하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단지 대규모 약탈극을 벌일 계획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트로이 발굴작업을 통해 밝혀졌다. 아나톨리아 북부 내륙지방에 있던 히타이트 제국은 물론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와 긴밀한 교역관계를 맺고 있던 트로이는 눈부시게 번영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점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도 확인된다. 트로이는 아카이아인의 약탈로 잿더미가 되어 그후 몇 세기 동안 폐허로 남았다. 



그들은 아카이아 왕들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아가멤논 - 그의 통수권은 의심받기도 하였다 - 의 지휘 아래 동지중해에서 가장 번영하고 있던 도시 가운데 하나인 트로이를 대대적으로 약탈한다는 엄청난 계획을 둘러싸고 뭉쳤던 것이다. 트오이 원정 500년 후에 작품화된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사실에 대한 충실한 증언은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트로이에서 대규모 약탈이 자행되었음은 간접저으로 시사하고 있다. 


트로이 원정이 매듭된 지 얼마 후에 아카이아인은 코린트 지협을 따라 거대한 성벽을 쌓아 또다시 단결을 과시했다. 전쟁터에 나가 여러 해 동안 본토를 비워 둘 수 있었다는 점이나 히타이트 제국의 바로 앞에서 전쟁을 벌이면서도 히타이트인에게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할 때 그들의 힘은 막강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신화에 등장하는 어떤 지역이 실제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역사라는 것은 억지일 수밖에 없다. 한편 <그리스 문명의 탄생>에서 구체적인 연도를 언급하며, 그 시대의 모습을 묘사하려 했지만 다음에 인용하는 글은 이를 정반대로 반박하고 있다. 다음 글은 프랑스의 고전문학 교수 아리안 에슨의 저서 <신화와 예술>에서 인용한 글이다. 트로이 전쟁이 실제 일어났던 무역전쟁이라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이지만 이것 역시 여전히 추측에 불과할 뿐, 보다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여전히 전설이며 신화라고 말하고 싶다.

전설은 트로이아전쟁이 기원전 1200년경에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시기는 뮈케나이 역사의 종말 즈음이다. 따라서 근대의 저자들은 저자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전설의 근거가 될 만한 역사적 사실을 찾아내고자 무척이나 고심했다.


19세기에 하인리히 슐리만은 히사를리크 언덕 위에서 트로이아로 추정되는 유적지를 발굴했는데, 그곳에서 파괴된 도시들에 각각 해당하는 여러 지층이 나왔다. 그러나 이 발굴은 결정적인 단서를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도시들 가운데 어느 도시가 트로이아란 말인가? 일반적으로 그것은 '트로이아 7a(트로이아 유적 제 7층)'와 관련이 있었다. 그러면 언제 파괴되었을까? 


기원전 1275년 혹은 1190년으로 추정된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여러 다른 정황들이 이에 대한 결론을 유보시키도록 만들었다. 즉 기원전 1190년에는 이미 뮈케나이와 필로스가 멸망된 상태였다. 따라서 아주 강력하고도 유일무이하며, 그것도 유명한 수장의 지휘 아래 그리스 원정단이 꾸려졌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이 '트로이아 7a'는 호메로스의 묘사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이 도시는 다만 한 세대 동안만 존속했을 뿐이며, 성벽들 역시 초라하기 그지없어 10년을 항거하며 버텨냈을 성 싶지가 않다. 그리고 프리아모스의 트로이아가 누렸을 번성의 흔적 역시 찾아볼 길이 없다.

이러다 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호메로스의 글과 고고학적 지식들을 일치시켜보고 싶은 무모함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만일 트로이아 전쟁이 정말 일어났다면, 호메로스는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뛰어난 시적 비전을 전해주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 역사적 자료만이 아니라 호메로스의 자기 인식을 위한 성찰의 글들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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