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좌익운동의 멸망을 가져온 '아사마 산장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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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좌익운동의 멸망을 가져온 '아사마 산장 사건'


2023. 6. 3.

 

아사마 산장 사건의 공식 명칭은 '연합적군 아사마 산장 사건'이다. 1972년 2월 19일부터 28일까지 일본 나가노현 기타사쿠군 가루이자와정에 위치한 '아사마 산장'에서 연합적군이 벌인 인질극. 이 사건으로 인해 산악 베이스 사건의 전말이 세상에 드러났으며, 일본 좌파 운동의 쇠퇴를 가져온 요인 중 하나로 손꼽혔다.

사카구치 히로시를 비롯한 연합적군 회원 5명이 아사마 산장 관리인의 아내를 인질로 잡고 10일 동안 틀어박혀 경찰과 대치했는데, 당시 인질은 무려 219시간 동안이나 감금되어 있었다. 경찰의 포위망 속에서 벌어진 인질 사건으로서는 일본 최장 시간 억류를 기록했다.

아사마 산장은 이 사건 전까지만 해도 가와이 피아노에서 연수원처럼 쓰던 곳이었다.



총기 탈취 사건 등을 일으키고 도주 중이었던 연합적군 멤버들은 군마현의 산악지대에 거점을 마련하고 계속 도피 행각을 일삼았지만, 경찰의 수색이 시작된데다 외부 지원이 끊겨 조직 유지가 힘들어지고 거기에 더해져 1971년 말부터는 내부분열 조짐까지 보여 위기를 맞았다.

그러던 중 뉴스로 경찰의 수색으로 거점들 일부가 발각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연합적군 멤버들은 포위망이 좁혀지는 중임을 직감하곤 위기를 느껴 군마현과 가까운 나가노현으로 도피처를 옮겼다.

당초에는 나가노 동부의 사쿠시 방면으로 도피하려 했지만 빈약한 장비 등 여러 모로 악조건이 겹친 데다 악천후로 인해 산에서 조난을 당해 의도와 달리 가루이자와 쪽으로 나왔다. 그러던 중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신 별장지를 보고는 은신처로 선택했으니 바로 아사마 산장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아사마 산장 인근의 사츠키 산장에 잠입했으나 수색 중이던 나가노현 경찰 소속 1개 부대와 마주쳤다. 이윽고 연합적군 멤버들은 총을 난사하며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인근의 아사마 산장으로 도주, 관리인의 아내를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했다.

주모자 사카구치 히로시의 당초 요구사항은 연합적군 최고 간부 '모리 츠네오, 나가타 히로코' 부부의 석방과 아사마 산장에 있던 멤버들의 도주로를 보장해줄 것이었다. 그러나 도주 건은 멤버 중 요시노 마사쿠니가 반대해서 결국은 그대로 산장에 틀어박힌 채 아무런 요구 조건도 없이 농성 체제로 돌입했다. 경찰은 이에 대해 산장 주위를 포위하는 한편 전기 차단을 시작으로 특수 차량을 이용한 정찰 등을 강행하고 범인들을 지치게 하는 전략으로 맞대응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 경찰 측에서 터뜨린 실수가 있었는데, 범인의 가족들을 이용해 설득에 나섰던 것이다. 실제로 인질극 사태에서 범인의 가족, 특히 부모에게 설득을 맡기는 경우가 많으며 이를 통해 범인의 자수나 여자나 노인, 아이 등 일부 인질의 해방을 이끌어 내는 경우도 제법 되지만 이 수단을 사용하기 전에 대상에 대한 프로파일링을 통해 이러한 수단이 효과를 볼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가족 관계가 좋은지 나쁜지부터 시작해서 범인의 사상까지 온갖 것들이 영향을 끼치기 때문. 하지만 프로파일링이란 단어조차 없던 시절이었기에 경찰은 막무가내로 가족부터 투입했다.

경찰은 범인들의 어머니를 현장으로 불러와 그들을 설득하려 했는데, 당시 어머니들의 호소가 얼마나 절절했던지 현장에 있던 기동대원들이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범인들은 이에 대해 '부모와 자식 간의 정을 이용해 먹었다'고 생각했고, 덕분에 설득은커녕 오히려 역효과가 터져 그들의 신경만 더 건드리는 바람에 범인들은 자기 어머니에게까지 발포를 하게 된다.

이 사례는 사건 당시 일본 경찰 대응이 얼마나 답이 없었는지에 대한 상징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일단 이 문제는 60년대 후반 일본 학생운동계의 분위기에서부터 접근해야 한다.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강한 서구와는 달리 집단주의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이 강한 일본에서는 가족을 통해 압박함으로써 학생운동을 와해시키려는 시도가 몹시 많았던 것. 특히 2차대전 종전 이전의 극우 제국주의 시대에 교육 받은 기성세대인 교사들은 학생운동에 대해 대단히 적대적이었고, 적군파와 같은 과격파가 아니라 학교 내에서 토론 활동을 하고 대자보 등을 게시하는 온건한 수준의 학생운동 조직까지도 가족을 통해 협박하다시피 하여 와해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실제로 당시 일본의 학생운동 과격파들이 이런 수법에 하도 시달려서, 이렇게 가족을 통해 설득하는 방식을 두고 대놓고 가족 제국주의라고 부를 정도로 반감이 심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운동을 계속하고, 적군파 같은 과격파에 가담할 정도의 인물이면 애초에 가족을 통한 설득은 안 먹힌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며, 오히려 자신도 가족을 통한 압박을 계속 받아왔고 같이 활동하던 동료들도 가족의 설득과 강요에 못 이겨 학생운동을 포기하는 일을 계속 겪은 만큼 이런 설득 방법에는 오히려 심한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 제 3자의 눈으로 보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적이었을지 몰라도, 본인들은 이미 숱하게 겪어왔기에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차라리 도발이 목적이었다면 모를까, 이런 방식으로 설득이 가능할 것이라고 심각하게 오판했다는 것이야말로 당시 일본 경찰이 상대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대응책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근거라고 보기도 한다.

결국 설득조차도 먹히지 않자 최후의 방법으로 산장 벽과 지붕을 부수고 정면돌파로 진압하자는 주장이 큰 설득력을 얻었다.

이 사건에서 웬 민간인 하나가 자기가 인질을 대신 하겠다며 무작정 산장 안으로 바구니를 들고 들어갔는데 범인 중 한 명인 요시노 마사쿠니가 "빨리 안 돌아가면 갈길 것이다"라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사이 바구니를 든 민간인이 경찰 쪽을 향해 윙크를 날리는 바람에 사카구치 히로시가 프락치로 오해해서 그대로 그 민간인의 뒤통수에 총알을 한 발 쏜다. 그 민간인은 머리에 총알이 박힌 채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수술 도중 결국 사망, 희생자가 되었다. 이 양반은 경찰 경계선을 뚫고 유유히 산장으로 잠입했다가 저 꼴을 당했으며, 이전에 마약 때문에 경찰에 끌려가서 고초를 치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때문에 경찰은 현장 통제도 제대로 못한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경찰의 강행돌파에 대해 범인측은 5연발 총 22구경 라이플, 12게이지 O/U형 더블 배럴 샷건, 38구경 권총 등 총기로 저항했고, 이 와중에 상호간 총격전으로 인해 경찰 기동대원 일부가 부상을 입거나 순직하고 작전에 동원된 대형 크레인에 기기 이상이 생기는 등 작전은 난항을 겪었으나 장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범인들은 전원 검거되었다. 당시 경찰청장 고토타가 범인들이 사살되면 순교자처럼 보이게 되어 좌익 운동권에서 사살된 것으로 트집을 잡을 테니 전원 생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근데 잘 생각해 보면 결과적으로는 잘 됐지만 당시에 저 따위 명령을 수행했을 기동대원들 입장에서는 절로 쌍소리가 나올 명령이다. 지금처럼 테이저 같은 비살상 무기 체계도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 엽총을 쏴대는 놈들을 무슨 수로 생포하라는 건가. 거기다 '사격하기 전에 상부에 보고 먼저 하라'는 지침까지 내려졌다. 결국 아래에 설명할 사사 아츠유키가 단독으로 발포 허가를 내려서 총격전을 벌였고, 또 생포에 대해서는 당시 경시청 간부들 중에 일본군 출신들이 많이 있었기에 대안이랍시고 나온 작전은 인명을 갈아넣는 것이었다.



건물철거용 철구를 장착한 크레인과 살수차가 동원되었고 기동대가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벽을 부수고 돌파구를 만드는 역할을 담당한 크레인이 철구로 몇 번 후려치기도 전에 고장이 나서 멈춰버리는 바람에 돌입 작전을 더디게 만들었다.



거듭되는 돌입 시도 도중 진두지휘하던 기동대원 2명이 총을 맞고 병원으로 이송 도중 순직하고 말았다. 이때 돌입을 맡은 기동대는 일체의 보호장구와 진압용 방패, 곤봉과 가스총 등 비살상 무기와 M1911, 미네베아 뉴 남부 M60 권총을 장비했다. 듀랄루민으로 만든 진압 방패는 한 장으로는 총알을 막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2장을 겹쳤다.

마지막 돌입 작전 도중 적군파의 총격이 너무 심하자 결국 경찰 지휘부로부터 생포를 포기, 산장에 돌입한 제7기동대에게 총기 사용 허가가 떨어졌지만 혼란이 심해서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결국 3차례에 걸친 돌입 시도 끝에 살수차의 고압 살수로 산장의 벽을 부수고 돌입해 전원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인질도 무사히 구출되었다.

경찰의 돌파 작전 상황은 전국각지에 생중계되어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주었고 당일 시청률이 조사 개시 이래로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 집계된 시청률은 NHK 포함 시청률이 무려 89.7%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고, 같은 날 1시간에 걸쳐 방송된 뉴스 특보는 평균 시청률 50.8%로 뉴스 특보 시청률로는 일본 최고 기록을 유지하고 있다.



체포된 범인들이 12명의 자신들의 멤버를 집단 린치로 살해한 산악 베이스 사건을 증언하면서 그것과 함께 이 인질극이 준 충격이 어마어마해서 좌파 학생 운동에 대한 대중의 여론이 급변했고, 일본 사회가 운동권 환상에서 벗어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어 사실상 일본의 좌익 운동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