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메리 셀러스트호' 유령선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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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메리 셀러스트호' 유령선 사건


2021. 6. 1.

배의 이름은 Mary Celeste인데, 80년대 일본서적을 번역한 서적에선 '마리 세레스트'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나왔다. 브리건틴 형식 범선. 지금도 메리 셀레스트, 메리 셀레스테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세계 역사상 가장 유명한 희대의 선박 유령선 미스테리 사건. 148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그 의문이 풀리지 않아, 많은 창작물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메리 셀러스트 호의 처음 이름은 '아마존 호'였으며, 군함이나 어선이 아니라 처음부터 무역선으로 건조된 범선이었다.

이 배는 1861년에 캐나다의 노바스코샤 주의 스펜서 섬에서 조슈아 듀이스(Joshua Dewis)에 의해 건조되었다. 첫 번째 선장 로버트 맥렌런은 소유주 중 한 명의 아들이었는데, 임명된 지 9일 만에 폐렴에 걸리고 첫 항해에 나서자마자 죽었다. 다음 선장인 존 너팅 파커는 어선을 들이받았고, 수리를 위해 항구로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수리 중 배 가운데에서 화재까지 일어났다. 캐나다에서 유럽으로 가는 첫 대서양 횡단 항해 역시 재앙 그 자체였는데, 영국의 도버 해협에서 다른 배와 충돌하고 결국 새 선장은 해임되었다.

시작은 좀 불길했지만, 아마존 호는 노바스코샤의 소유주들 하에 6년간 이윤을 남기며 순탄한 항해를 했다. 이 동안 서인도 제도,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왕래하며 다양한 종류의 화물을 운반했다. 1867년 폭풍으로 배가 좌초되었다가 구조받았다. 그 후 뉴욕의 리차드 하인즈가 1,750달러에 사서 8,825달러를 들여 수리하였다.

1868년 미국 선박으로서 등록되고, 그 다음 해 '메리 셀러스트'로 개명되었다. 소유권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은 J.H.윈체스터였는데, 배에 관련된 저주를 의식해서인지 배의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배의 밑 부분 일부가 썩어있는 것을 보고, 뱃바닥 부분에 구리판을 깔고 갑판의 선실을 길게 하는 등 배를 튼튼하게 개조했다. 이로 인해 배는 마스트 2개, 길이 103피트, 폭 25피트, 288톤급에 다다르는 대형 선박이 되었다.

이렇게 아마존 호는 메리 셀러스트 호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 후 경험이 아주 풍부한 벤자민 브리그즈 선장이 메리 셀러스트 호의 선장으로 임명되었다. 메리 셀러스트 호는 알코올 원액을 잔뜩 싣고 제노바까지 갈 계획이었다. 1872년 11월 7일 브리그즈 선장의 지휘 아래 메리 셀러스트 호는 뉴욕을 출항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메리 셀러스트 호는 제노바에 도착하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은 메리 셀러스트가 재난으로 침몰했거나 해적에 나포되었으리라고 생각했다.



메리 셀러스트 호가 출항하고 1달이 지난 1872년 12월 4일[4] 대략 오후 1시경, 영국 상선 디 그라티아 호의 조타수 존 존슨은 아조레스 제도와 포르투갈 사이의 북대서양에서 마스트 2개를 단 수상쩍은 범선 1척을 발견했다.

디 그라티아 호의 위치는 대략 북위 38°20′, 서경 17°15′, 포르투갈에서 천 km 정도 떨어진 곳이었고, 그 배는 8 km 정도 디 그라티아 호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배는 좌우로 약간씩 흔들리며 움직이고 있었는데, 뱃머리의 삼각돛대와 앞 돛대의 스테이 세일만 펼친 기이한 모습으로 달리고 있었다. 배에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봐도 이상한 모습이다.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그 배는 대답하지 않았는데, 그 배는 바로 메리 셀러스트 호였다.

참고로 디 그라티아 호의 데이비드 모어하우스 선장은 메리 셀러스트 호를 알고, 브리그즈 선장과 개인적으로 술도 마신 적이 있었다. 자기 배보다 앞서서 출발했기 때문에, 모어하우스 선장은 메리 셀러스트 호가 어째서 아직까지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는지 의아해했다.

선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366 m 정도까지 접근하여 2시간 동안 배를 세심히 관찰했다고 한다. 배는 항해 중이었지만 우현 방향으로 불안정하게 항해하고 있었고, 천천히 지브롤터 해협 쪽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조타석이나 갑판에 아무도 없었고, 선원들은 배가 표류 중이라고 결론지었다.

디 그라티아 호의 일등항해사 올리버 데보(Oliver Deveau)는 선원 몇몇을 이끌고 메리 셀러스트 호에 올라탔다. 데보는 "배에 아무도 없으며, 배 전체가 완전히 젖어 엉망인 상태"라고 보고하였다. 갑판들 사이에는 물이 고여있었고, 화물칸에는 물이 1.1 m 높이로 차 있었다. 작동 가능한 물 펌프가 하나 있었고, 다른 2개는 분해되어 있었다. 구명정 1척이 사라져 있었으며, 선원들이 매우 급하게 배를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어쨌거나 배는 가라앉고 있지 않았으며, 항해가 가능한 상태였다.



메리 셀러스트 호는 상당한 양의 물이 차 있었지만, 여전히 항해에는 문제가 없는 상태였다. 물 펌프 3개가 꺼내어져 있었는데, 2개는 분해된 상태었고 하나는 발견된 순간까지도 작동이 가능한 상태였다.

선장의 항해일지를 제외하면 모든 서류가 사라져 있었고, 항해일지는 11월 25일까지만 기록되어 있었다. 배의 시계는 고장나 있었고, 나침반은 부서져 있었으며 육분의와 경선의가 사라져 있었다. 배의 유일한 구명정(yawl, 작은 돛단배)도 사라져 있었다. 배의 주 돛을 올리고 내리는 밧줄(peak halyard )도 없었고, 밧줄 하나가 배에 아주 단단하게 묶여 있었는데, 밧줄 반대쪽은 물에 드리내려져 배 뒤쪽을 따라오고 있었는데 그 끝이 매우 해져 있었다.

화물인 알코올 통들은 그대로 있었지만, 그 중 9통은 비어 있었다.

선원들의 개인용품들이 그대로 남았으므로 해적들이 노략질을 했을 가능성은 극히 적어 보였다. 싸움이나 폭력의 흔적 또한 발견되지 않았으며 음식과 물 또한 항해를 하기에 충분한 양이 모두 배 안에 남아 있었다.

어쨌든 메리 셀러스트 호는 11월 25일 이후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감쪽같이 사라진 채, 열흘 넘게 유령처럼 표류한 것이었다.



브리그즈 선장

선장의 아내 사라

딸 소피아

메리 셀러스트 호에는 브리그즈 선장과 선원 7명 외에 선장의 아내 사라와 2살 된 딸 소피아 마틸다도 타고 있었다. 모어하우스는 그들이 배를 포기한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난감했다. 데보 일등항해사는 디 그라티아 호에 두 선원을 파견하여 메리 셀러스트 호를 지브롤터로 인도할 것을 제안했다. 모어하우스는 아무래도 기분이 불쾌해서 메리 셀레스트 호를 놔두고 가려고 했지만, 데보가 "조난당했어도 멀쩡한 배를 예인해오면 최대 5천 파운드라는 큰 돈을 보상금으로 받을 수도 있고, 이 배를 그냥 놔두고 가면 나중에는 큰 비난을 받을 것"이라고 조언하였다.

모어하우스 선장은 내키지는 않았으나 그의 말에 동의하여 배를 예인했고, 6일 후 지브롤터에 입항했다. 영국의 관료는 메리 셀러스트 호를 즉시 억류했고, 즉시 메리 셀러스트 호 수사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선장과 선주가 배에 걸린 보험금을 노리고 한 자작극이라고 생각했다. 모어하우스 선장과 브리그즈 선장은 서로 친한 사이였고, 출항 전날 뉴욕에서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자작극 혐의는 곧 풀렸다. 그렇게 자작극을 한다고 하더라도, 배를 팔아서 오는 이득보다 더 돈을 못 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자작극이라도 그렇게 사람들이 귀신같이 없어질 수는 없었다. 또한 미국과 영국의 항구에 브리그즈 선장 일행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졌지만, 그들의 흔적은 아무 데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당시 조사관 중 한 사람은 "메리 셀러스트 호는 디 그라티아 호와 만나서 가볍게 술자리를 나누다가 싸움이 벌어져 살해당했으며, 디 그라티아 호 선원들이 시체들을 바다에 처넣고 우연히 만난 것으로 위장했다"는 주장을 고집했다. 물론 디 그라티아 호 승무원들 측은 분노했고, "증거를 제시하라"고 반발했다. 그 어디에도 격렬하게 싸운 흔적도 없었고, 모어하우스에 대한 수사에서도 돈이 그리 급하지도 않았으며 빚도 없는 게 드러났다. 결국 디 그라티아 호 승무원들이 저지른 것은 아니라고 결론났다. 하지만 디 그라티아 호를 범인으로 의심하던 조사관은 죽을 때까지 그 의심을 버리지 않았기에, 디 그라티아 호 승무원들은 그 조사관을 죽도록 싫어했다고 한다.

그 다음은 "다국적으로 이뤄진 선원들이 각자 국적에 따라 다툼이 벌어져 반란이 있던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나왔다. 선원 7명은 독일인 4명, 덴마크인 1명, 미국인 2명이었다. 가장 수가 많은 독일인들이 의심받았지만, 조사 결과 선원들의 반란 가능성은 역시 없었다. 발견 당시 도끼 자국과 더럽혀진 칼, 약간의 혈흔이 발견되었지만 혈흔은 정말 약간이라 반란이 있었다고 보기는 힘든 수준이었고, 특히 내부가 매우 잘 정돈되어 있어, 그 어떤 반란의 가능성도 생각할 수 없었다.

몇 달간 수사 끝에 결론이 나왔다. 불명. 즉 "도저히 알 수 없음"이었다. 이렇게 '원인불명'의 미제사건이 선상사고로 일어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편 선주 측은 보험사를 통하여 구조비로 5천 파운드를 모어하우스 선장 일행에게 지불했다.



사건이후 메리 셀러스트 호에 탔던 선장과 선원, 선장의 가족들은 다시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J.H.윈체스터는 사건 이후 배를 처분할까 고민했는데, 메리 셀러스트 호가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아버지인 헨리 윈체스터 빈터즈가 미국 보스턴에서 익사 사고로 죽는 것을 보고 메리 셀러스트 호를 처분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배를 엄청난 헐값에 넘겼다. 그 뒤로 13년 동안 선주는 무려 17번이나 바뀌었고, 그 때쯤 되어서는 배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메리 셀러스트 호의 마지막 선장 길먼 C. 파커는 '메리 셀러스트 호를 운항해서는 도저히 이득을 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결국 이 저주받은 배를 보험사기의 희생물로 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메리 셀레스트 호의 저주는 아직 계속되었으니...

파커 선장은 부츠나 고양이 사료 같은 잡동사니에 과도한 보험을 붙여 배에 가득 싣고 고의로 배를 암초에 부딪히게 만들었지만, 결국 침몰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애매하게 부서져서 항해만 곤란하게 되어버린 메리 셀러스트 호에 이번에는 불을 질러 보았지만, 타고 남은 잔해마저도 꿋꿋하게 물에 떠 있었다.

결국 파커 선장은 있지도 않은 화물을 더 추가해서 터무니 없는 보험을 신청했는데 그만 덜미가 잡혔다. 파커는 500달러에 인양권을 팔았고, "다른 여타 물건들과 함께 술 125통, 청어 957통, 1천 달러 상당의 식기류가 적하되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배와 적하는 보험회사 5곳에서 3만 4천 달러 상당의 보험에 들었다. 당시 외양에서 선박을 고의로 침몰시키면 교수형이었고, 증거가 명백한 상황이었지만 파커 선장의 재판은 제자리 걸음만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배심원단 12명 중 5명은 사람을 사형대에 올려 죽이기를 주저했기 때문이었다. 배심원단은 일반시민으로 구성되어있고 스스로의 결정으로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 한다는 점 때문에 인명사고도 없이 그냥 폐선 침몰시킨걸로 사람죽인 놈들이라는 시선, 그리고 스스로도 그런일로 사람을 죽여버리는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는 사형이라는 중형 때문에 당시 이런 범죄에 대해서는 배심원단이 유죄를 선언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파커 선장은 무죄로 풀려났지만, 결국 3개월 후에 사망했다.

이후 메리 셀러스트 호는 '도저히 수리할 수 없는 상태'라는 진단을 받았고, 1923년 바다에서 스스로 침몰할 수 있도록 해안에서 떠내려 보냈다.

이후 미국에서는 메리 셀러스트 호가 아이티 앞바다에 가라앉았다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