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뿌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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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뿌리를 찾아서


2014. 7. 11.

인류의 과거를 수백만 년 전까지 거슬러올라가 뿌리를 밝히는 일은 끝없는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는 일에 비유된다. 그런데도 화석인류학자들은 여기에 도전했다. 그들이 찾아낸 콩알만한 뼛조각,마치 ‘트럭에 치여 부스러진 달걀껍질’처럼 된 뼛조각들은 천 개에도 못 미친다. 그들은 그것들을 조각그림처럼 짜맞추어 인류가 진화해온 계통수(系統樹)를 만들고 있다.


여태까지 알아낸 바로는 인류와 유인원(침팬지·고릴라·오랑우탄)은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 그때부터 인류는 유인원과 사람의 중간 형태인 원인(猿人·선행 인류)을 거쳐 사람에게 더 가까운 원인(原人·초기 인류)을 지나 현생 인류로 진화해 왔다.

학명으로 말하자면 원인(猿人)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무리에 속한다. 원인(原人)은 예전에 흔히 원시인(原始人)이라고 불렀던 구석기시대 인간으로 호모 무리에 속한다. 현생 인류는 현대인의 직계 조상인 크로마뇽인(호모 무리)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 동안 발견된 모든 화석 인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호모 두 가지로 나뉜다.

원인(猿人)은 대략 500만 년 전(또는 800만 년 전)에 지구상에 등장했다. 특징은 유인원과 달리 똑바로 서서 걸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무릎을 곧게 펼 수 없어 상체가 이쪽 저쪽으로 기울며 어기적어기적 걷는 유인원과 달리 원인들의 무릎 관절은 다리를 곧게 뻗을 수 있었다. 엄지발가락도 유인원의 것이 나뭇가지를 붙잡기 좋도록 옆으로 갈라진 데 비해 원인의 것은 앞으로 곧게 뻗음으로써 땅바닥을 디딜 때 반동을 일으키는 기능으로 변했다. 그리하여 원인들은 걸을 때마다 발을 밀어올리는 힘을 엄지발가락에서 얻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여러 원인을 통틀어 호미니드(똑바로 서서 걸은 영장류)라고 부른다.

원인(原人)은 약 250만 년 전에 등장했다. 서서 걷기는 했지만 나무에 기어오르는 것에도 익숙했던 원인(猿人)이 완전하게 서서 걷게 되고 뇌가 갑자기 커지기 시작해 불과 도구를 사용하는 슬기로운 인간으로 발전한 것이다.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는 약 20만 년 전에 등장했다. 그들은 문화 감각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고 장신구를 만들고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두 가지 숙제를 풀려고 애써 왔다. 하나는 ‘잃어버린 사슬’을 찾는 일이고,또 하나는 인류를 동물과 구분지은 가장 큰 특징인 ‘두 발로 똑바로 서서 걷기’가 왜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이다. 첫번째 숙제는 조금씩 풀려가고 있고,두번째 미스터리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진화의 사슬에서 1974년까지 언급되던 ‘잃어버린 사슬(Missing Link)’이란 유인원과 원인(猿人)이 한 조상에서 갈라진 시점(약 560만년 전)에서부터 350만년 전까지 약 200만년 사이에 존재했으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인의 화석을 말한다.

고인류학자들은 그동안 현생 인류(크로마뇽인·1868년 발견)의 화석에서부터 350만년 전 화석인 ‘루시’(1974년 발견)에 이르기까지 원인(猿人) 화석 11종과 원인(原人) 화석 3종,현생 인류 화석 1종을 찾아냈다. 잃어버린 사슬 시기에 출현했던 원인(猿人) 화석들만 찾으면 인류가 진화해온 경로를 밝힐 계통수를 그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숙제는 참으로 풀기 어려운 것이다. 우선500만∼400만년 전 화석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가 극히 한정되어 있다. 퇴적층이 500만∼400만년 전에 형성된 장소에서만 당시에 죽은 생물들의 뼈가 제대로 보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뼈는 산소가 침투하지 못할 정도로 완전하고 깊게 파묻혀야 풍화하지 않고,서서히 광물질이 뼛속으로 스며들어 돌(화석)로 변한다. 그러한 곳은 동아프리카 일부 지역에 국한해 있다. 서아프리카의 토양은 산성이어서 뼈가 쉽게 썩는다.

이렇게 어려운 조건을 충족한다 해도 대부분의 화석이 묻힌 땅은 수백만년이 흐르는 사이 새로운 지층에 덮여 지표면으로부터 수백m 아래에 자리잡게 된다. 화석을 찾으려면 확률이 거의 0인 상태에서 수백m 땅속을 파내려 가든가 어쩌다 물줄기가 지층을 깎아 아래 지층을 드러낸(침식 작용) 곳에서 행운을 바라고 탐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끝없는 모래밭에서 바늘 하나 찾는 일’이나 마찬가지로 어렵다.

인류 조상의 화석 가운데 제일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호모 사피엔스(슬기 인간)이다.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하기 전인1856년 독일 네안더에 있는 채석장 암반에서 일꾼들이 사람 뼈 몇 개를 파냈다. 그들은 그것이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자연 현상에 관심이 많다고 알려진 수학교사 J C 풀로트에게 가져갔다. 풀로트는 그 뼈가 당시 사람의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것은 너무 굵고 단단했다. 그가 자문한 대학의 전문가도 선사시대 야만인 뼈라고 말했다.

사람이 6,000여년 전에 에덴 동산에서 창조되었다고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두발로 서서 걷고 불과 도구를 사용할 줄 알았던 네안데르탈인이 30만∼4만년 전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네안데르탈인이 발견된 지 12년 만인 1868년 프랑스 크로마뇽에서 나온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슬기 슬기 사람)의 뼈는 4만∼1만년 전 것이었다. 이 크로마뇽인들은 동굴에 벽화를 그리고 종교에 관심을 보였다.

크로마뇽인을 발굴한 지 23년 만인 1891년 유젠 뒤부아가 인도네시아에서 자바 원인이라고 불리는 호모 에렉투스(직립 인간)의 뼈를 발굴하자,인류의 기원은 70만년 전으로까지 올라갔다. 그 뒤를 이어 독일 하이델베르크(1907년)와 중국 베이징에서도 호모 에렉투스의 뼈가 나왔다.

인류의 기원이 성경의 6,000년을 뛰어넘어 70만년 전까지 거슬러올라간 지 얼마 안된 1924년 이번에는 사람과 유인원의 중간쯤 되는 원인(猿人)의 화석이 발견되어 온 세상을 들끓게 했다. 그것은 인류의 기원을 100만년 이전으로 끌어올리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바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다.

남아프리카 케이프주 타웅의 채석장에서 이 조그만 두개골이 튀어나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아시아가 인류의 고향이라고 생각해 왔다. 미개한 아프리카를 인류의 고향이라고 믿기도 싫었거니와 현대인의 직계 조상인 자바인과 크로마뇽인이 아시아와 유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누구도 남아프리카에서 인류의 화석을 찾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람은 유인원으로부터 진화했는데,유인원은 열대밀림에서만 산다. 그러므로 수백만년 동안 열대밀림이 없었던 남아프리카에 사람의 조상이 살았을 리가 없다. 이것이 1924년까지 고생물학자들이 가진 고정관념이고 당시의 상식이었다.

1924년 화석에 관심을 가진 남아프리카의 한 처녀가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시렁에 놓인 두개골 같은 것을 보고,비비의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아냐 그럴리가 없어. 남아프리카에는 원숭이나 유인원의 화석이 없어.”

상식이 풍부한 친구는 단호하게 말했다. 덧붙여서 그 두개골이 자기 집 소유인 채석장에서 나왔는데 어느 짐승의 뼈인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호기심 많은 처녀는 자기가 해부학을 배우는 요하네스버그의 위트워터스랜드 대학 교수 레이먼드 다트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다트는 제자에게 유인원이 남아프리카에 없다는 것은 맞지만,건조지대에 적응한 비비는 많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는 화석이 또 발견되면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안 되어 다트 교수에게 상자가 배달되었다. 돌더미 속에 둥그런 두개골 안쪽을 가득 채운 상태로 굳은 석회석이 있었다. 그것을 본 즉시 나는 두뇌의 소용돌이와 골은 물론 혈관까지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비비의 두개골은 아니었다. 전뇌 부분이 비비보다 훨씬 컸다.

‘먼 옛날에 알려지지 않은 유인원이 남아프리카에 살고 있었을까?’

작은 끌로 조심스럽게 쪼아서 겉에 붙은 각력암을 떼어내는 데 73일이 걸렸다. 깨끗해진 화석을 본 그는 놀랐다. 그것은 여섯살배기 아이의 두개골이었다. 이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고,만 여섯살배기 아이에게서 나는 어금니가 막 솟아오르고 있었다.

뒤집어 보았다. 척추신경이 두뇌로 연결되는 구멍들이 두개골 바닥에 있었다. 그것은 그 아이가 똑바로 서서 걸어다녔음을 의미했다(네 발로 걷는 유인원은 구멍들이 두개골 뒤쪽에 있다). 그것이 유인원과 사람 사이를 잇는 ‘잃어버린 사슬’일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다트는 ‘유인원과 비슷한 크기의 두뇌를 가진 어떤 동물이 300만년∼100만년 전에 똑바로 서서 걸었다’는 가설을 과학 잡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라는 학명도 부여했다.

화석 두개골은 복잡한 학명보다도 ‘타웅 베이비’라는 말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타웅 베이비는 순식간에 화제가 되었다. 어떤 신문에는 ‘잃어버린 사슬을 찾았다’는 제목을 단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심지어는 농담에도 등장했다. “어젯밤에 당신과 함께 있었던 여자는 누구인가요? 타웅에서 온 여자인가요?”

대다수 학자가 다트의 가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다트를 가르친 교수가 사람과 유인원의 뇌는 어린아이 때는 비슷하다며 다트의 주장을 반박했다. 다트는 그 뒤로 4년 동안 조심스럽게 잇새를 긁어낸 끝에 타웅 베이비의 위턱과 아래턱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음식을 씹는 이의 표면을 본 그는 그것이 사람임을 또 한번 확신했다. 그러나 무려 12년간이나 타웅 베이비는 잊혀 지냈다. 1936년 이후 비슷한 화석들이 잇따라 나오자 타웅 베이비는 비로소 인류의 조상이라고 인정받게 되었다.

오스트랄로는 ‘남쪽’ 피테쿠스는 ‘유인원’이라는 뜻인데 화석은 동쪽에서 더 많이 발견되고,유인원이 아니라 원인(猿人)이므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속명(屬名)은 잘못된 것이지만,첫 발견자가 이름을 짓는 명명규약 원칙에 따라 그냥 쓰이고 있다.

고인류학자 가운데 한 시대를 풍미한 가족이 있다. 루이스 리키와 그의 부인 메리 리키,아들 리처드 리키와 며느리 미브 리키는,루이스가 1924년 화석 발굴에 뛰어든 이래 고인류학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발굴들을 함으로써 ‘러키 리키’라고 불렸다.

루이스는 1959년 진잔드로푸스 보이세이와 1962년 호모 하빌리스(손재주가 있는 사람)를 처음 발견했으며,그의 아내 메리는 1978년 탄자니아의 라에톨리에서 한 가족(남자 여자 어린아이)의 320만년 전 발자국을 처음 발견했다. 며느리 미브도 1994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멘시스를 발견했다.

그러나 네 사람 중 가장 행운이 많이 따른 사람은 리처드 리키였다. 1965년 루이스는 에티오피아의 오모강 유역에서 호모 하빌리스를 발굴할 가능성이 많다고 보았다. 그래서 케냐·미국·프랑스가 참여하는 국제 탐사단을 조직했으나,몸이 아파서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케냐 팀 인솔자로 아들 리처드를 지명했다. 그때 리처드는 스물세살이었다. 어려서부터 화석 발굴을 따라다닌 그는 그 일에 넌더리가 나 대학에 가지 않고 사냥을 하며 사파리 안내자로 살았다. 덕분에 그는 험한 오지에서 살아 남는 법을 터득했다. 루이스가 아들을 탐사대장으로 삼은 것은 그러한 경험과 사람을 잘 다루는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리처드는 어려서부터 보아온 실력으로 인류학과 지질학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와 미국 팀이 넓고 가능성이 큰 지역을 차지하자 아예 케냐쪽으로 국경을 넘어가 투르카나 호수(옛 루돌프 호수) 동쪽 쿠비포라 언덕에 캠프를 세웠다.

첫번째 행운은 1969년에 찾아왔다. 쿠비포라로 가는 길은 케냐 북쪽 마르사비트에서 시작된다. 화산암과 자갈이 널린 황량한 길 320㎞를 리처드 리키는 케냐인 대원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오갔다. 그 해 여름에도 그는 투르카나에서 대원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에티오피아로 가고 있었다.

어느날 아침 홍차 한 잔씩을 마신 일행은 간밤에 머물렀던 곳 주변을 조사하고 낙타를 매어둔 곳으로 돌아갔다. 바짝 마른 개울 옆을 지나고 있었는데 언뜻 모래 위로 하얗고 둥근 뼈가 드러나 보였다.

평생을 뒤지고 다녀도 부스러기 하나 겨우 찾을지 말지 한 보물,몇주일 뒤 우기가 닥치면 개울물에 쓸려가 버렸을 200만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의 머리뼈는,보물에는 임자가 따로 있다는 말을 증명하듯 통째로 리처드의 품에 안겼다.

리처드 리키의 두 번째 행운은 1972년 늦여름에 찾아왔다. 그는 그 무렵 케냐의 나이로비 국립박물관에서 일하면서,투르카나 호숫가에서 화석을 찾는 국제탐사단 단장 일을 맡고 있었다. 그는 해마다 여름이면 나이로비에서 와서 조사하다가 돌아갔다.

그날 젊은 탐사대원 버나드 엥게네오가 캠프에서 21㎞ 떨어진 골짜기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곳은 벌써 사람이 많이 지나다녀 길이 나 있을 정도였다. 그 길 옆에 작은 뼛조각들이 흩어져 있었지만 아무도 눈여겨본 사람이 없었다.

그날 무심히 뼛조각 하나를 집어들고 보던 엥게네오의 눈빛이 차츰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틀림없이 원인의 이마뼈였다. 그는 모래를 조심조심 떨어내고 뼛조각들을 모아 캠프로 가져갔다.

나흘 뒤 캠프에 도착한 리키는 곧 대원들과 그 근처를 샅샅이 뒤졌다. 아내 미브는 어린 딸을 돌보면서 캠프에 남아 가장 힘들고 중요한 일을 하게 됐다. 영장류 해부학 박사인 그녀는 뼛조각들을 이어 붙여 제대로 된 두개골을 만드는 일을 맡았다. 뼛조각은 300개가 넘었다. 성냥갑만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손톱보다 작았다. 부스러기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그 일은 아주 복잡한 조각그림 맞추기보다 더 어려웠다. 크기나 모양도 모르고,몇 장으로 된 그림인지,몇 장이 없어졌는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그 어려운 일을 그녀는 즐거이 해냈다.

뼈 부스러기가 제자리에 들어맞으면 정말 즐거웠다. 꿈에서도 뼈만 보이고,한밤중에라도 어디에 어떤 조각을 끼우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표본실로 달려갔다. 미브는 5주 동안 이 일에 흠뻑 빠졌다. 두개골 주인은 200만년 전에 살았던 호모 하빌리스임이 밝혀졌다. 이 뼈는 그동안 발견된 호모 하빌리스 뼈 중 제일 형태가 잘 갖추어진 것이다(아래턱뼈만 없음).

“당신은 그 화석을 뭐라고 부릅니까?”

호모 하빌리스라는 종명(種名)이 확정되기 전인1972년 어느날 기자가 물었다.

“그냥 호모라고 부릅니다. 종 이름을 붙이는 것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 화석은 케냐국립박물관 목록번호를 딴 ‘1470호’라고 불리고 있다. 1470호 덕분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와 아들은 가까워졌다. 루이스 리키는 자기가 1962년 올두바이 골짜기에서 찾은 175만년 전 뼈가 1470호 덕분에 호모 하빌리스라고 인정받게 되자 무척 좋아했다. 기쁨을 누리고 그 해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리처드 리키의 세 번째 행운은 1984년에 찾아왔다. 나이로비에 있던 그에게 8월23일 투르카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발굴팀을 이끌어온 케냐 사람 카모야 카메우였다.

“아주 흥미있는 것을 찾았습니다.”

리키는 전용 경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만에 캠프 근처 먼지투성이의 활주로에 착륙했다. 탐사일지에는 ‘호미니드 두개골 앞부분 한 조각. 약 4×5㎝’라고 적혀 있었다.

카모야의 설명은 이러했다. ‘왠지 바짝 마른 강바닥으로 300m쯤 나 있는 고랑에 마음이 끌렸다. 자갈로 뒤덮인 비탈에 가시나무덤불 주변을 빙 돌아 염소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땅은 밝은색이었지만,검은 용암이 그 위로 솟아 있었다. 화석이 용암보다 더 밝은색이어서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전문가들만이 납작하고 살짝 휜 그 뼈가 커다란 뇌를 가진 동물의 것임을 알아보았다. 조금 더 얇고 휘어 있다면 영양의 두개골일 것이다. 측정해보니 160만년 전 뼈였다. 160만년 전이라면 원인(猿人)이 다 사라진 뒤이므로 그 뼈의 주인은 원인(原人)일 확률이 높았다.

뼛조각의 깨진 단면이 생긴 지 얼마 안 돼 보였다. 그렇다면 그 뼈는 뼈의 주인이 사망한 직후가 아니라 나중에 암반에서 흘러나온 물줄기 때문에 부서졌다. 따라서 그 근처에 또 다른 뼛조각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탐사대는 주변을 샅샅이 조사하고, 고운 체로 조심조심 흙과 모래와 자갈을 걸렀다. 나흘째 되던 날 카모야가 소리쳤다.

“이쪽으로 와보세요!”

그날 저녁 탐사일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오른쪽 관자놀이, 왼쪽과 오른쪽 두정골, 이마뼈 몇 개. 모두 잘 보존되어 있음.’

매일 저녁 새로운 보물이 추가되었다. 위턱 부분, 갈비뼈 몇 조각, 척추 한 조각, 견갑골….

조각그림 맞추기가 끝나자 완벽한 뼈대가 형상을 드러냈다. 골반 모양으로 미루어 남자였다. 키 170㎝에 날씬한 몸매였고,팔다리가 가냘펐다. 그는 젖니가 없었다. 안쪽 두 번째 어금니가 막 턱뼈를 뚫고 나와 있었고,세 번째 어금니는 여전히 턱뼈 안에 있었다. 그는 열 살 난 소년이었다.

왜 죽었을까. 맹수에게 물어뜯긴 흔적은 없었다. 해답은 아래턱에 있었다. 두 번째 젖니가 빠진 자리에 생긴 변화. 잇몸 염증은 오늘날에는 항생제 하나면 해결되지만,그 시절에는 치명적인 패혈증에 이를 수 있다. 160만 년 전 그곳에는 웅덩이가 있었다. 소년은 열이 나자 목이 말라 물가로 기어갔으나 결국 탈진해서 죽은 것이다.

화석 발굴사에서 가장 화제가 된 ‘루시’가 연출된 무대는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북동쪽으로 160㎞ 떨어진 하다르다. 몇 주일 전부터 강가에서 야영하고 있던 도널드 요한슨 교수와 대학원생 톰 그레이가 모닝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자네가 오늘 할 일은 뭔가?”

“화석이 나온 장소들을 지도에 표시하는 겁니다. 그런데 162구역을 잘 모르겠어요.”

“그래? 그렇다면 내가 가르쳐 주지.”

요한슨 교수는 문득 그곳에 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는 일기장에 짧은 메모를 남기고 지프에 올랐다.

‘1974년 11월30일. 아침에 그레이와 함께 162구역으로. 기분이 좋다 하다르에서는 화석이 땅 위에서 발견된다. 바위와 자갈과 모래뿐인 이곳에는 좀처럼 비가 오지 않지만,한 번 내렸다 하면 엄청나게 퍼부어 빗물이 세차게 흘러가면서 계곡 언저리를 깎아 옛날에 호수 바닥일 때의 퇴적물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파르 골짜기 162구역. 천천히 걸어다니면서 화석을 찾는 사이에 어느덧 정오가 가까웠다. 기온이 45도까지 올라갔다.

“저 너머 골짜기 밑바닥만 보고 돌아가세.”

다른 사람들이 이미 철저히 조사한 곳이지만 아침부터 뭔가 좋은 일이 있으리라는 예감을 가지고 있던 요한슨은 잠깐 그곳에 들르고 싶었다. 그 골짜기에는 역시 뼈라고는 없었다. 그런데 막 돌아서려던 요한슨이 무심코 고개를 돌려 비탈을 바라보았더니 길쭉한 것이 땅 위에 가로놓여 있었다.

“호미니드 팔 같은데!”

그레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작아요. 원숭이 뼈일 겁니다.”

요한슨이 그리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히 살펴보니 분명히 원인(猿人) 뼈였다.

“호미니드야.”

“어떤 점을 보고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자네 손에 붙어 있는 팔과 똑같으니까”

바로 그 때 그레이가 “오, 하느님!”하고 외치면서 무엇인가를 집어 올렸다. 머리뼈 조각이었다. 저만치 넓적다리뼈 조각이 보였다. 요한슨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직감.

“오, 하느님!” 그레이가 또 하느님을 불렀다. 척추 두어 개,골반뼈 일부. 두 사람은 일어나서 찬찬히 둘레를 살펴보았다. 원인의 뼈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저걸 보세요, 갈비뼈예요!”

그렇다면 한 사람의 뼈대가 거의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자갈밭 위에서 서로 끌어안고 겅중겅중 뛰었다.

그들은 다른 학자들과 합세해 3주일 걸려 수백개의 뼛조각을 찾아냈다. 똑같은 뼛조각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한 사람의 것이었다. 뼈들은 한 사람의 전체 뼈대 중 약 40%에 이르렀다. 요한슨은 상자 속에 푸석푸석한 완충제를 채워넣고 뼈들을 제자리에 놓았다.

‘머리뼈는 두 조각뿐이었지만 아래턱 뼈는 깨끗했고,갈비뼈·팔뼈·골반뼈·등뼈·엉덩이뼈·무릎뼈 조각들은 꽤 있었다. 모두 제자리를 찾아서 놓자 그것들은 사람이 되어 벌떡 일어설 것 같았다. 그처럼 완전에 가까운 것은 10만년이 넘게 존재한 원인 뼈 중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루시는 무려 350만년 전 것이었다.’

뼈가 잘 보전된 것은 평온하게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다. 뼈에는 맹수의 이빨 자국이 없었다. 하이에나 무리가 습격하지 않아 뼈들이 흩어지지도 않았다. 이 원인은 평화롭게 죽어서 모래와 진흙에 덮인 뒤 퇴적하는 흙더미에 짓눌려 화석으로 변했다가 350만년이 지나 폭우에 쓸려 땅 위로 드러났다. 기껏 7만5,000년 전 네안데르탈인의 턱 조각 하나,머리뼈 조각 하나,이 하나를 찾아내기가 고작인 화석인류학 역사에서 처음 이룬 완전한 발견! 누가 감히 잠잘 생각을 할 수 있으랴.

그 뼈의 주인공은 골반으로 보아 여성이었고,팔이 긴 것으로 미루어 나무타기를 썩 잘했으리라. 키는 120㎝로 아주 작았지만,사랑니가 다 자라고 닳은 흔적이 있으니 다 자란 성인(사망 당시 25∼30세)이었다. 척추가 변형된 것으로 보아 그녀는 관절염이나 다른 뼈질환을 앓은 것이 확실했다.

여성으로 밝혀진 그 원인이 그때까지 발견된 원인 화석 가운데 제일 오래된 인류의 조상임을 확인한 날,요한슨과 그레이는 그녀를 발견했을 때의 얘기를 하고 또 하며,맥주를 마시고 또 마셨다. 그때 카세트 테이프에서 리버풀 악단의 연주가 흘러나왔다. 비틀스가 부르는 ‘다이아몬드 밤하늘의 루시’(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였다. 그것을 다시 틀고 다시 틀고 하다가 누군가가 외쳤다.

“저 여자 이름을 루시라고 하자!”

루시라는 이름을 갖게 된 AL 288-1호는 이듬해 요한슨이 ‘최초의 가족’이라고 불린 원인 집단(13명)을 발견해 그들이 루시와 같은 종임을 밝힘으로써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라는 학명을 얻게 되었다. 아파렌시스는 루시가 발견된 아파르 골짜기의 이름을 따서 지은 말이다.

1992∼1993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의 티모시 화이트 교수는 1974년 요한슨이 ‘루시’를 발굴한 곳에서 남쪽으로 72㎞ 떨어진 에티오피아 아라미스에서 호미니드의 머리뼈 일부와 아래턱,이,왼쪽 팔뼈 등 열일곱 조각을 찾아냈다.

이 화석은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 결과 440만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다. ‘루시’를 함께 연구했는데도 모든 공이 요한슨에게만 돌아가자 크게 실망한 화이트는 요한슨과의 관계를 끊고 따로 탐사를 시작한 끝에 루시보다 100만년 가량 앞서는 화석을 발견한 것이다. 그 화석의 주인공은 다 자란 어른이었고(어금니가 완전했다) 키는 120㎝였다.

이 화석은 송곳니는 루시보다 진화가 덜 되었지만,앞다리 구조로 보아 유인원과는 분명히 다르게 서서 걸으면서 두 팔로 새끼를 안고 다닌 것 같았다. 화이트는 이 화석이 인류의 조상과 유인원 사이에 존재하는 ‘잃어버린 사슬’이라면서, 속명(屬名)을 오스트랄로피테쿠스(猿人)라고 하지 않고 유인원에 더 가깝다는 뜻으로 아르디피테쿠스(나무 위가 아니라 땅 위에서 사는 유인원)라고 했다. 또 종명(種名)은 에티오피아 말로 ‘뿌리’라는 뜻을 가진 라미두스를 부여했다. 일부 학자들도 라미두스가 인류와 유인원의 공통 조상이거나,거의 공통 조상격에 해당한다고 동조했다.

루시를 발견한 요한슨은 이에 대해 “그동안 유인원이 인류와 갈라진 시점이 2,000만∼1,500만년 전이라고 추정해 왔으나 침팬지와 같은 특성을 많이 지닌 라미두스가 발견됨으로써 그 시기가 600만년 전으로 바뀔 것 같다”라고 긍정적으로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러나 라미두스와 인류·유인원의 공통 조상 사이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또 다른 원인(猿人)이 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잃어버린 사슬의 핵심인 유인원과 원인의 공통 조상을 찾아낸 것일까? 라미두스가 그것이라고 아직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1967년 브라이언 패터슨이 아프리카 로사감에서 발굴한 560만년 전 뼈는 라미두스보다 120만년이나 앞선다. 턱 파편과 거기에 붙어 있는 어금니 하나뿐이어서 단정하기는 이르지만,그 뼈는 유인원과 원인의 공통 조상으로 추정되어 ‘사람의 특징을 가진 영장류(Possible Hominid)’라고 명명되어 있다.

머지 않아 잃어버린 사슬 문제를 매듭짓게 되면 학자들은 언제 어떻게 왜 원인이 두 발로 서서 걷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일에 모든 힘을 쏟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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