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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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을 알아보자


2018. 4. 12.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

1971년 1월 23일 오후 1시 34분경 승객 55명과 승무원 5명을 태운 속초공항 발 김포국제공항 행 대한항공 소속 포커 27이 홍천 상공에서 하이재킹당해 납북될뻔한 사건이다.



이전 납북 사건과 정부의 대처
1958년 2월 16일 대한 국민항공사 시절 창랑호 납북 사건과 1969년 12월 11일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으로 인하여 정부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에 정부는 국무회의를 의결해 보안검색의 강화, 승객의 익명 및 타인 명의의 사용 금지, 비행장 직원에게 사법권 부여, 무장한 항공보안관을 탑승, 조종사에게 권총 지급, 조종실 문을 반드시 잠그도록 규정하는 등 조치를 취했다.

승무원 인적 정보
기장 이강흔 씨는 당시 37세로 공군을 대령으로 예편한 뒤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부기장 박완규 씨는 한국전쟁 때 공군에 자원입대해 소티 100회를 갖고 있는 베테랑 조종사였으며 한국전쟁 때 포로로 잡혔던 경험이 있었다. 
이 사건에서 희생한 수습 조종사 故전명세 씨는 육군항공 조종사 출신으로 중령으로 예편해 대한항공에 입사해 이강흔 기장에게 교육을 받고 있었다.
항공 보안관 최선일 씨는 이전 두 번의 납북 사건에 대한 조치로 훈련받은 14명의 항공 보안관 중 한 명이었다.
이외에 객실 승무원 최석자 씨가 탑승했다.

납치범 인적 정보
납치범인 김상태는 22세 무직으로, 거진읍 거진3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왜 대한항공 여객기를 납치했는지는 그가 사살되었기 때문에 불명이나, 추측으로는 납북에 성공한 공작원들이 북한에서 엄청난 대접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고 사건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다.

사건 이후 김상태의 집을 수색했으나, 간첩은 아니라는 것을 파악했으며, 북한의 대남도발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범인의 탑승과 이륙
보안검색이 이전의 납북사건때 보다는 강화되긴 했지만 불행히도 범인인 김상태는 폭탄을 무사히 통과시켜 대한항공 포커 27여객기에 탑승했다.
오후 1시 7분, 폭탄으로 무장한 김상태와 54명의 승객, 그리고 승무원 5명과 함께 호커 27 여객기는 속초공항을 이륙했다.




납치 개시
이륙한지 27분이 지난 1시 34분, 홍천 1만 피트 상공에서 폭탄 두개가 폭발했다. 이 폭발로 기체에 20cm 가량의 큰 구멍이 나고, 이륙할때 잠가놓았던 조종실 문이 부서져버렸다. 최선일 씨는 폭발지점에서 불과 50cm 떨어져 있었으나, 기적적으로 부상을 입지 않았다.

조종실문이 부서지자 김상태 남은 폭탄 2개를 들고 조종사들에게 "나는 생명을 각오하고 나온 놈이다. 북으로 기수를 돌려라!" 라고 강요했다.
이강흔 기장은 일단 납치범의 협박에 순응하는척 하며 기수를 북쪽으로 돌리는 한편 속초에 비상착륙 하기로 시도했다.

속초 화진포 해변에 낮게 접근하면서 '북한에 다왔다'며 랜딩기어를 내렸으나, 하필 속초가 고향이던 김상태가 지금 착륙하는곳이 화진포임을 알아채고 "이 자식아,화진포인데 왜 내려, 그러면 정말 조종실에 이걸(폭탄) 던진다!"라며 조종사를 협박했다. 할수없이 조종사들은 랜딩기어를 올리고 계속 북으로 향했다.

공군의 긴급출격
폭탄이 터지자 마자 이강흔 기장은 비행기가 납치됐다는 무전을 남겼다. 무전 내용은 "납치범이 탔다. 위치는 강릉 서쪽 30nm 지점."
다행히도 이 무전은 관제센터와 속초공항 관제탑에 무사히 청취되었고 공군은 납치소식을 전해듣고 연료와 무장을 만재한 F-5A 2대를 긴급출격 시켰다. 이 F-5 2대는 15분만에 납치된 포커 27과 조우했다.

제압과 희생
휴전선 이남 20km, 공군에서 발진시킨 F-5 2대는 기체가 더 이상 북쪽으로 가는 걸 막기 위해 납치된 여객기를 에워쌌다.객실에서 몰래 조종실과 인터폰을 하던 최석자 씨와 최선일 씨는 기지를 발휘해 승객들에게 범인을 속이기 위해 크게 통곡해줄것을 요청했다. 이와함께 '북한 상공에 들어왔다, 이북으로 가지않으면 안되게 되었으니 증명서를 모두 찢어버리십시오' 등 거짓 기내방송을 했다.여기저기서 승객들이 통곡하자 최선일씨는 승객들을 달래는척 하며 김상태에게 천천히 접근했다.

여기에 이강흔 기장은 급하게 출격한 공군 F-5를 북한군 미그기가 마중나왔다고 속였다. 납치사건이 일어났던 1971년에는 F-5는 막 도입한 최신형 전투기였다.일반인이 보기도 힘든 F-5였기 때문에 김상태는 이 전투기가 한국공군 전투기라는 것을 모른채 미그기라고 믿었다. 

김상태가 F-5로 시선을 돌리자 최선일 씨는 권총을 뽑아 총을 쏘고, 전명세 수습 조종사도 권총으로 사격을 했다. 최선일씨가 쏜 총알이 김상태의 머리에 맞아 제압했지만 김상태가 갖고있던 폭탄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점화되고 말았다. 전명세 수습 조종사는 몸을 날려 폭탄을 덮었고, 폭탄은 그대로 터져 왼팔과 오른쪽 다리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었다.

김상태가 사살되고 이강흔 기장은 기체를 급강하해 이륙한지 1시간 11분이 지난 오후 2시 18분 고성군 현내면 초도리 바닷가에 불시착 했다. 속초에서 김포행 여객기였기 때문에 적은 연료만을 주유했지만 예비 연료가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폭발이나 화재로 이어질 수 있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승객들은 대부분 가벼운 부상만 입었으나, 전명세 수습조종사, 이강흔 기장, 객실승무원 최석자씨 등 8명이 중상을 입었다.

전명세 조종사는 군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구급차를 이용해 서울로 후송되고 있었으나, "탑승객이 다칠까봐 몸을 던졌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


이후

전명세 조종사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 되었으며, 일등보국훈장을 받았다. 장례식때 대한항공 전무이사의 친동생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강흔 기장은 눈을 크게다쳐 1.3에 달하던 시력이 0.3이 되버렸다. 그러나 대한항공에 복귀해 B727, DC-10등을 조종하고 조종사로서 은퇴했다.

이후 이 사건에 대한 승무원들의 이야기는 이념선전이 강하던 80년대 말까지 반공교육때 널리 활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