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코미디의 본좌 '김형곤'
본문 바로가기

시사 코미디의 본좌 '김형곤'


2017. 4. 4.

1980년대 대한민국 코미디계의 레전드

체중감량 전에는 "김형곤" 하면 바로 '공포의 삼겹살'이었다. 당시 대 유행어가 되고, 지금도 김형곤은 모르더라도 "공포의 삼겹살"이란 표현은 널리 쓰이고 있다. 원래는 보통 체형이였다가 개그맨이 되기 위해 일부러 살을 찌웠는데 나중에는 살이 안 빠져서, 굉장히 후회했다고 한다.



형 김형준은 연극배우, 동생인 김형진은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김형곤은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나 서울 중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대학교 재학 중 1980년 TBC의 개그 콘테스트에서 은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개그맨 생활을 시작했다. 즉, 엘리트 개그맨. 참고로 현재도 동국대학교가 들어가기 쉬운 학교는 아니지만, 1970년대 후반 당시에는 대학 진학율이 20%도 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개그맨들은 대학 문턱도 못 밟은 경우가 허다했다. 


1980년에 데뷔하자마자 뚱뚱한 몸에 동그랗고 귀여운 얼굴, 재치있는 입담으로 젊음의 행진, 젊은이의 토요일 등에서, 장두석과 함께 워낙 비싸요~ 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키며 인기를 모았고, 그 다음해 영화도 찍었다. 이 당시 활동했던 개그맨들 중 가장 돋보였던 세 명이 바로 주병진과 김형곤 그리고 MBC에서 활약한 서세원 이었다. 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유머 일번지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과 <탱자 가라사대> 등의 코너에서 시사개그를 선보이면서 사회적인 붐을 일으켰다. 그러나 김형곤의 거침없는 시사개그와 풍자에 위기감을 느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그를 협박하여 방송 코너가 해체되고 한동안 연예활동을 중지했다. (사실은 더 일찍 해체될 수 있었는데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한다.)


연예활동이 중지된 후부터는 주로 소극장에서 스탠드 업 코미디 공연을 했는데, 노태우 정권 때 대통령의 방귀뀌는 스타일이라는 코미디를 공연에서 했다가 안기부에 끌려가 개발살난 적이 있다.

대통령들이 부하들과 회의를 하는데 방귀를 뀌면 어떻게 할까라는 조크였는데, 박정희가 방귀를 뀌면 당당하게 "괜찮아, 임자도 뀌어." 하고 전두환이 뀌면 부하들이 "각하, 제가 뀌었다고 하겠습니다."라면서 자기가 전두환 대신 덮어쓰고 노태우가 뀌면 괜히 자기가 뀌어놓고서 부하한테 "네가 뀌었제?" 하니까 부하들이 "제가 각하 방귀 대신 뀌어줍니까?"라면서 맞먹는다는 내용이었다. 물태우라고까지 불린 노태우의 유약한 리더쉽을 풍자한 것이었는데……. 이후 김형곤은 자다가 날벼락 맞는 식으로 안기부에 끌려가서 "각하 방귀뀌는 걸 네가 봤냐?"라며 개박살났다 후덜덜. 물론 공식적으로는 김형곤이 공연한 술집과 바에서 음란 퇴폐쇼를 했다는 명목으로 대표를 구속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진상은 위에 설명한대로... 후에 자신의 공연에서 "아니, 내가 대통령 방귀 뀌는 걸 꼭 봐야 개그를 할 수 있단 말이야? 그게 어디 대한민국 안기부가 나설 일인가?"라며 회고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러한 해방적 분위기는 노태우가 당선 이후 "날 개그프로 소재로 써도 좋다"라고 말한 탓이 크다. 이는 안기부의 과잉충성 내지는 노태우의 말바꾸기다. 국내 웹하드에 김형곤의 공연 mp3 파일이 돌아다니니 듣고 싶은 사람은 다운받아 들어보자.

1989년. 당시 영등포구 을에서 재야 단일 후보로 출마한 고영구 후보를 지지하면서 의식있는 연예인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1992년 대선에는 여당후보였던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를 따라다니며 유세지원을 하였다.

군사정권에 의해 탄압받던 대중의 아픈 속마음을 달래준 일과 군사정권에 의해 억압받았다는 두 가지 경력으로 1997년 괌 명예친선대사에 선정되었으며 1999년에는 자유민주연합의 명예총재특별보좌역을 역임하여 당시 개판이던 자민련의 이미지 개선에 일조하였다. 하지만 비정치권 출신이라는 태생적 문제와 자민련 김종필 총재의 독주에 질려 탈당했고 16대 총선이 있었던 2000년 성동구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큰 차이로 낙선. 이후 정치권에서 물러나게 되고 "개그 잘 배워갑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정치권에서 물러난 이후로는 폭소클럽, 뮤지컬과 대본작성, 다양한 저서의 집필 등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2006년 3월 11일 운동과 사우나를 거친 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던 도중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향년 49세라는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과도하게 땀을 흘렸던 것이 화가 된 것으로 추측. 원래 혈압이 높은 사람은 사우나가 매우 위험한데, 거기다가 볼일 볼 때는 더더욱 혈압이 높아지므로 주의해야 한다.

대한민국 개그맨 최초로 카네기 홀 공연을 앞두고 있던 터라 아쉬움은 더했다. 젊어서는 덩치도 있고해서 전국 뚱보들의 권익을 위한다며 전국 비만인 협의회 회장을 자처하면서 나섰으나, 나중에는 다이어트 광고에 출연할 정도의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중간에 말이 좀 꼬여서 평이 엉키기도 했지만. 문제는 사망 원인이 과도한 다이어트와 운동과정에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말이 돌았다는 것인데…. 사망후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는 알 길이 없다.

사후 시신은 연구용으로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병원에 카데바로서 기증되었다.

당시 한창 데스노트가 유행하고 있었던지라 김형곤 씨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말에 유머 사이트 등에 야가미 라이토 스샷을 올려놓고 '설마!?'라는 자료들이 올라왔는데 당연히 고인드립이라는 이유로 온갖 욕을 다 쳐먹었다.

무명의 트로트가수 故 김갑순에게 나훈아를 본뜬 "너훈아"라는 예명을 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이후 대한민국 풍자개그와 시사개그의 명맥은 사실상 끊겼다란 것이 정설로 통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에 김구라가 인터넷으로 김구라 황봉알의 시사대담이라는 시사개그를 시작하여 다시 시사개그가 부활하나 싶었지만, 김구라의 시사개그는 아픈 속을 긁어준다기 보단 단순한 사회에 대한 반발심을 자극하고 거친 욕설로 불만을 토하는 데에 지나지 않아 수준미달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거기다 김구라의 개그는 시사가 아닌 남들이 꺼려하고, 터부시되는 걸 건드리는 게 본질이라서 그다지 시사개그를 하는 사람이라고 보기엔 힘들다. 설상가상 최근엔 이것도 그만두고 욕만 해댄다. 자세한 것은 김구라 항목 참조. MBC에서 유행한 삼자토론 등의 배칠수/전영미 위주의 시사개그도 모두 성대모사에 더 가까웠다.

그러다 SNL 코리아의 방영을 기점으로 시사개그의 맥이 다시 이어지는 듯 했지만, 그마저도 단순한 패러디에 가까웠다. 그러던 것이 여의도 텔레토비를 접으면서 섹드립이랑 GTA 드립에 더 집중하고 시사개그 역시 시사개그라고 쓰고 시사대담이라고 읽는 식으로 안 그래도 수준미달인데 그보다 더 퇴화한 모습을 보여주는 등 기대 이하로 침전하게 되었다.

그나마 2010년대에 이르러 개그 콘서트가 제대로 된 시사개그를 좀 하나 싶었지만 당시 서수민 PD에 대한 반감이 심한 시기라 호응도가 적었고, 결국 얼마 안가 SNL 코리아와 동일한 테크를 타면서 사실상 시사개그의 명맥은 김형곤 사후에는 끊긴거나 다름없다. 이는 김형곤 사후 보수적인 성향의 정부들이 잇따라 집권한 탓도 있다. 

한편 우리나라 트랜스젠더들에게는 대부격으로 추앙받던 사람이기도 하다. 김형곤이 운영하던 술집과 바는 성소수자들인 게이와 트랜스젠더들이 많이 모였다. 이것과 관련해서 본인이 방송에서 가끔 자기는 게이는 아니지만, 소수자로서 음지에 숨어사는 그런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 하리수의 성공 이후 트랜스젠더들의 양지 진출과 연예인 지원을 많이 도와 주었기 때문. 

실제로 자주 트랜스젠더 바 등에서 토크쇼를 진행하기도 했고, 연예계의 중견인 그가 지원했기 때문에 TV 등을 통해 일반에 트랜스젠더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이 많이 생기기도 했다. 또한 이태원동에서 하하호호라는 극장식 바를 운영해서 트랜스젠더들이 댄서로 일하는 등 많은 지원을 하였다. 그의 사후로는 이전처럼 그쪽 문화와 성소수자들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보내는 유명인이 적어졌다는 견해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