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진 않았지만 완벽에 가까웠던 지도자 '호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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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진 않았지만 완벽에 가까웠던 지도자 '호찌민'


2017. 4. 3.

호찌민에 관한 논란 중 하나는 과연 호찌민이 민족주의자인지 아니면 공산주의자인지 여부였다. 실제로 한 동료에게 호찌민이 고백하기를 자신이 공산주의가 된 이유는 젊은 시절 프랑스에서 자신을 도와준 자들이 프랑스인 공산주의자들 뿐이어서 였다고 한다. 당시 2차 세계대전 이전의 프랑스 좌파들은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반대했고 해외 식민지 출신의 타민족을 배척하는 행동에 반대했다. 프랑스에 막 도착한 젊은 호찌민 입장에서는 먼저 손을 내미는 프랑스 좌파들의 도움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애초에 코민테른 요원이기까지 했으니 호찌민은 분명 공산주의자이긴 했다. 무엇보다도 그 당시 제3세계의 식민국가들의 독립을 도와준 유일한 세력은 소련이였다. 당연히 찬밥 뜨거운밥 가릴처지가 아닌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였다. 그리고 호찌민은 좀더 민족주의적인 측면을 인정하고 신경제정책 등을 펼치기도 했던 레닌의 지지자였고 많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공산주의의 이론적인 이해가 떨어진다는 평을 들었을 정도다. 게다가 밑의 명언에서도 나오는 "나를 이끈 원동력은 공산주의가 아닌 애국심이었다."라는 말이나 일평생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신한 만큼 호찌민은 꼭 공산주의자이다 민족주의자이다 나누기 보다는 그 둘 모두로 바라보는게 더 바람직할 것 같다.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를 적절히 버무린 점, 그리고 제2세계 국가에서 비교적 민주적인 운영 시도를 한 점에서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 비견되는 지도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호찌민은 실용주의자기도 했는데, 이는 일생 줄곧 도덕적인 면모를 지켜나가면서도 혁명을 위해서라면 여러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던지, 그런 와중에서도 되도록이면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의 이익을 얻으려 한다던지, 혹은 베트남민주공화국에서 공산주의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사적 소유를 크게 제한하지 않으며 신성한 권리라고 언급하는 등 여러모로 실용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이는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을 회유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볼 수도 있지만, 유명한 공산주의자 응우옌아이꾸옥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호찌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과 겹쳐서 생각해본다면 이는 공산주의에 구애받지 않고 호찌민이 베트남 민족 모두를 포용한 정부를 세우려 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외교계의 그랜드슬래머였다. 일본 제국을 몰아내기 위해 미국과 손을 잡고, 중국의 야욕을 견제하기 위해 (비록 걷어찼지만) 국치의 적인 프랑스에 손을 내밀고, 미국에게 호의 섞인 제스쳐를 보내기도 하며, 감정이 악화된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적당히 줄타기를 하며 어느 한 나라와도 크게 적을 만들지 않았다.


호찌민 사후 공산당이 베트남을 급격히 공산화시키며 나타난 경제적인 폐해와, 팽창주의와 급격히 친소련으로 기욺에 따라 일어나게 된 중월전쟁까지, 호찌민이라는 지도자 하나가 사망함으로써 일어난 베트남의 변화는 결코 좋은 것이라 말하기 힘들다. 이후 베트남의 개혁주의자들이 괜히 '호 아저씨라면 오히려 좀 더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을 것이다'고 주장하는게 아니다.

비록 말년에 외교 분야를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 많은 실권을 잃어버렸지만, 베트남의 국부로써 미국인들의 에이브러햄 링컨과 같은 이미지로 베트남인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인물로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윗동네의 같은 공산주의자였던 마오쩌둥은 오늘날 중국에서조차 부분적인 비판은 받고 있지만 호찌민은 베트남에서 광개토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안중근 의사 급의 인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에, 베트남에 가거나 베트남인이 있는 곳에서 호찌민을 까내리는 것은 반드시 삼가하도록 하자. 당신의 신상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쉬운 이해를 위해 비유하자면 한국인 앞에서 광개토대왕이나 세종대왕 혹은 이순신, 안중근을 대놓고 까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베트남으로 여행을 가든 출장을 가든, 베트남 공항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온거리 온건물 동서남북 어디에 있건 온통 호찌민의 인자한 초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지겹도록 보게 된다. 베트남의 따스한 아침햇살을 맞이함과 동시에 당신은 언제나 호찌민 초상화를 보며 상쾌한 하루를 시작할 것이고 호찌민 초상화를 보며 집으로 들어올 것이다. 예외는 없다. 진정한 국민적 스타가 호찌민이다. 이는 베트남의 통합을 이끌어내는 큰 정신적 자산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이런 긍정적인 평가는 어디까지나 북베트남의 관점이 짙게 반영된 결과이다. 아직 베트남의 남북 갈등은 사라지지 않았다. 당장 호찌민 시에 거주하는 사람에게 어디 사냐 물어보면 대다수가 사이공이라 대답한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터키의 국부로 추앙 받음에도 터키 내 상당수를 차지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자에게 적대시 되는 것 처럼 베트남의 주도권이 북베트남에 있어 호찌민에 대한 칭송이 두드러지는 것이지 모든 베트남인에게 지지 받는 영웅으로 단정 지을 순 없다. 남베트남에선 정부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공간에서 두런두런 호찌민과 북베트남 정권을 까대는 이야길 들을 수 있다.

게다가 현지 남베트남인 보다도 구 남베트남 출신으로 북베트남에 동화되지 않고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원수나 다름없다. 미국과 프랑스 등지에 사는 베트남계 이민자들이 대부분 구 남베트남 출신으로, 베트남전 전후로 도망쳐 나오거나, 이후 보트피플로 탈출한 사람들의 후예이기 때문. 실제로 1999년 한 젊은 베트남인이 미국의 베트남계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리틀 사이공에 있는 그의 비디오 가게에 호찌민의 사진을 걸었다가 베트남계 이민자들의 거의 테러에 가까운 분노가 섞인 항의를 받았을 정도. 한국 공중파 뉴스에서도 해외토픽 부분에 당시 상황이 나왔는데, 중장년 베트남계 이민자가 격렬하게 항의하면서 경찰이 출동하면서 말리자 "호찌민의 사진을 철거하지 않으면 나는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라고 절규하는 모습이 나왔다. 미국이나 프랑스 같이 규모가 큰 베트남계 이민자 사회가 형성된 곳에서는 정치적 이유로 보트 피플로서 망명해 온 구세대 이민자들과 90년대에 서방과 베트남의 관계가 정상화된 이후 유학이든, 사업이든 정상적으로 이민을 온 전후 세대 이민자들 사이의 갈등이 크다. 전자의 경우 당연히 통일 베트남에 의해 고향에서 쫒겨 나온거니 호찌민을 좋게 생각 할 수가 없으나, 국교 정상화 이후 떳떳하게 해외로 나온, 북베트남이나 통일 베트남의 교육을 받은 베트남인들에게 있어 호찌민은 당연히 국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