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을 위해 모든걸 바쳤다. 호찌민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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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을 위해 모든걸 바쳤다. 호찌민의 성격


2017. 4. 3.

호찌민은 남들에게도 매우 친절하였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호찌민이 친척의 집에 갔을 때 친척들이 나중에 그가 유명한 호찌민이라는 것을 알아서 어찌할 줄 모르자 그는 "그냥 평소대로 해주세요."라고 했다. 진정한 대인배.


검소한 생활로도 유명했는데 낡은 옷을 기워서 입기가 일쑤였고, 폐타이어를 잘라 신발을 만들어 신었을 정도였다. 그 뿐만 아니라 하노이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는 고가 귀중품은 커녕 고물 라디오 한 대와 책 몇 권이 있는 게 전부였다고 하니 이는 그가 얼마나 검소한지를 보여준다. 또한 3찬 만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왜 3찬 만을 드시냐고 물으니 "내가 반찬 하나를 더 먹을 때마다 우리 국민 하나가 더 죽는다."라고 했다고 한다.


호찌민이 죽은 뒤 그의 명성을 먹칠하고자 그가 실은 사치스럽게 지냈더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무엇 하나 증거도 없이 주장하던 거라서 결국 개소리로 묻혀졌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호찌민 연구가들도 꼼꼼하게 조사했지만 그가 사치를 누렸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긴 한데 실은 그도 사람인지라 화려하고 풍족하게 살고픈 욕망이 없던 건 아니다. 친구에게 털어놓은 고백을 보면 "나도 마음껏 먹고 싶은 걸 먹고 편하게 살고 싶다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걸 실제로 이루지 않으며 살았기에 전설이 되었다. 일화에 따르면 딱 하나 자신이 사치라고 부르던 것을 한 적이 있는데, 바로 영국제 담배 555였다. 이것만은 양보 못 하겠다고. 또한 자신이 가는 곳을 경호원들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이는 갈 곳을 알리면 그 곳에 있는 주민들이 귀찮기 때문에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하노이엔 호찌민이 기거했던 옛 주석궁이 있는데, 이곳은 본래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 총독부였다고 한다. 당연히 상당히 호화로운 곳이지만, 호찌민은 정작 이 옛 총독부 관저를 쓰지 않고, 주석궁 안의 연못 옆에 작고 허름한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아이들이 와서 수염을 당기면서 '파파 호호'라는 애칭으로 불러주면 미소 지으면서 손수 베트남 고유악기를 치면서 아이들을 위한 노래를 불러주며 같이 놀아주곤 했다. 하루는 아랫사람이 아이들이 마구 뛰어놀면서 시끄럽다고 화내자,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처럼 활기찬 곳은 없다면서 놔두라고 했단다. 그 시절 그를 돌보던 가정 도우미는 그가 화를 낸 걸 좀처럼 볼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베트남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호찌민 덕에 베트남에는 꽤나 많은 소수민족이 살고 있지만 큰 마찰은 없다고 한다. 호찌민도 생전에 소수민족도 우리의 동포라면서 그들의 풍습에 맞는 집에도 거주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베트남인들은 베트남의 정신적 지주이자 서민적인 모습으로 다가갔던 그를 기리기 위해 사이공을 호찌민으로 개명했다. 그의 사망일은 공교롭게도 독립선언과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9월 2일과 일치하는데, 이 날은 베트남 국경일로 지정되어 있다. 
그야말로 그는 전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