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사람들이 호찌민을 비판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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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사람들이 호찌민을 비판하는 이유


2017. 4. 3.

일부에서는 호찌민을 시대를 잘못 예측한 이상주의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첫번째는 그 유명한 토지개혁. 북베트남에서 토지 개혁을 무리하게 이끌다가 반발하여 저항군까지 이룬 이들을 철저하게 뭉갠 일이다. 이 와중에 약 5만에서 10만에 이르는 이들이 죽었다고 한다. 결국 80만이 넘는 이들이 남베트남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은 더 막장이라서 온갖 부정부패를 실천하면서 그도 토지개혁을 개판으로 이끌어서 남베트남으로 온 북베트남 유지들은 적어도 응오딘지엠은 호찌민을 이기지 못한다고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그리고 딱 그 한숨과 한탄이 들어맞았다.


사실 이 문제에는 좀더 깊숙한 내면의 문제가 있다.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중국의 도움을 받았기에, 베트남에는 중국 고문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문제는 이 때 중국은 대약진 운동 기간인데다 이 양반들이 마오주의에 물든 스페인 이단심문관급 인물들이었다는 것. 전쟁의 원조로 목소리가 높아진 것을 이용해 베트남에도 중국식 토지개혁과 사상개혁을 요구하고, 이를 소리높여 거부하기 힘든 호찌민 등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 일. 당시 베트남 공산당 지도자이던 쯔엉찐(Trường Chinh, 長征)의 지도 하에 이게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결과는… 북베트남에 오랫동안 공헌해온 베트민 고참 퇴역병부터 베트민에 꾸준히 협력해온 지주들까지 전부 쓸어버린 말 그대로의 중국식 개혁 뒤에서도 설명하겠지만 상당한 실용주의자였던 호찌민은 몇 차례나 이에 대해 경계했지만 북베트남 지도부는 호 아저씨의 조언을 씹었다. 사실 호찌민이 집단지도체제를 선호하기도 했고, 말년에 들면서 외교분야 이외의 실권을 차츰 놓아주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불쌍할 지경. 이 토지개혁의 참상은 베트남 지도부들이 토지개혁을 경제개혁만이 아니라 반대파 축출로써의 기능을 이용하려다 어딘가 삐끗나서 처참한 사태에 이른 것. 


중국인 고문들은 이것을 진정시킬 생각은 않고 오히려 부채질했다 ㄷㄷㄷ... 심지어는 호찌민도 반대파 축출로써의 이 기능에 일부 동의하기도 했다. 때 마침 모스크바 제20차 대회로 스탈린 격하 운동이 시작됨에 따라 스탈린이 했던 토지개혁의 당위성도 사라져버리고 중국도 더 이상 토지개혁을 하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되어 이 일은 멈추게 되었다. 그 후 베트남 총지도부 4명이 총사퇴, 게다가 당서기인 쯔엉찐마저 물러나는 대실패로 끝나게 된다. 호찌민조차도 자신이 민주주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자아비판을 해야 했고 호찌민의 위신은 이때 크게 손상을 입었다. 물론 이는 쯔엉찐의 실책이긴 하나 호찌민도 비판을 듣는데, 호찌민은 주석일 뿐이라 정치적 권한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며 호찌민이 뭐라 하든 무시해도 원칙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 호찌민의 조언이 통한 건 전부 "호 아저씨는 옳다" 라는 전통에 의한 것이였는데, 쯔엉찐은 전통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였다. 그러니 호찌민을 비난할 때는 정치적 생명을 걸 정도로 강도높은 반대를 하지 않은 것, 토지개혁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점을 비난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북베트남 내에서도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은 관대함 없이 진행되었다. 이건 사실 호찌민의 잘못이기보다는 당대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거의 필수적으로 진행되었던 일이었으니 무조건 흑역사라고 말하기는 그렇다. 물론 공산주의 하의 사상탄압의 한계로는 볼 수 있겠지만.

가톨릭 교도들을 탄압한 것도 문제였다. 이미 베트남의 가톨릭은 유서깊은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으며 베트민의 투쟁 시절부터 호찌민을 지지하고 응원하던 세력이었지만, 북베트남과 비가톨릭 베트남인들은 가톨릭 교도들이 매국노라는 선입견 하에 그들을 매우 박해하고 차별했다. 순전히 편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게 된 가톨릭 교도들은 크게 분노했고 북베트남의 150만명의 가톨릭 교도들 중에서 60만명이 월남하였다. 그러나 이게 북베트남인들에게는 충분히 이해될만했다. 역사적으로 베트남의 가톨릭은 식민지 지배국 프랑스로부터 전파된것이다. 즉 우리나라로 치면 일본제국 고유의 종교인 신토를 식민지국인 한국에 전파하여 한국인들이 이를 믿는것으로 해석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호찌민 스스로는 인자하고 관대한 성품을 가졌지만, 한참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던 시절 부하들의 난폭하고 무자비한 행동에는 별다른 터치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북베트남 정권의 학살은 북베트남 지도부의 책임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 당시 호찌민은 너무 늙어서 늘 멍하고 죽은듯이 잠자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전쟁이 어떻게 되가고 있냐고 묻는 게 고작이였는데 베트남엔 곧 죽을 노인에게 부하들의 행동을 말할 정도로 소신있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호찌민은 고의로 학살을 방관한것도 아닌데억울하게 욕만 얻어먹었다. 만약 부하들의 실태를 누군가 고발했다면 프랑스인들과 미국인들도 착하다고했던 그가 과연 그냥 내버려 뒸을까? 

그의 잘못은 절대 아니지만, 남베트남인과 북베트남인 간의 갈등은 꽤 심하다. 북베트남인들은 남베트남인들을 보면서 저 돈만 아는 박쥐같은 앞잡이놈들이라고 하고, 남베트남인들은 북베트남인들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같으니 하면서 서로 경멸한다. 남베트남이 적화통일되면서 대대적인 학살과 보복을 당했으니 어쩔 수 없다.

민족주의자인 호찌민이었지만 그의 최종 목표는 베트남뿐만 아니라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포함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의 독립이었다. 또한 베트남 공산주의 행동강령에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를 하나의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일찍이 하였다. 얼핏 봐도 캄보디아 민족과 베트남 민족은 전혀 딴판인데, 호찌민 입장에서는 동일하게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아왔으니 베트남이 큰 형으로서 같이 도와줘서 독립해서 함께 잘 살자(그러니 내 말 들어)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프랑스와 미국을 무찔러내고 내친김에 중국까지 따끔하게 혼내준 베트남은 위풍당당해져서 단숨에 인도차이나 반도의 깡패 패권국가가 되었다. 한마디로 호랑이가 없어진 동굴에서는 여우가 왕이 되어버린 셈.

물론 호찌민 사후에 일어난 한참 뒤의 사태이긴 하지만, 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를 점령해서 90년대까지 수년간 캄보디아에 주둔하게 된다. 이는 현 캄보디아의 불안정한 정치상황과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게 된다. 이는 서방 세계로부터 큰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니들은 그렇게 제국주의라며 프랑스랑 미국을 대차게 까내리면서 독립한다 아우성 치더니, 우리가 떠나고 나니 니들도 니들보다 약한 놈들한테 하는 짓이 똑같네. 우리한테 못된 것만 배웠나? 라는 것. 물론 이런 비난도 코웃음칠만한게 이런 주장하던 프랑스나 영국이나 미국이나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은 이전과 다르다고 해도 아프리카 및 여러 나라에서 그 당시 거저 집어먹던 무수한 경제적인 토대를 바탕으로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경제적 우위를 점하고 현지인에 대한 빈부격차에 이바지하기 때문...

그리고 캄보디아 침공에 대해서는 제국주의 논리로만 따질 수는 없는 것이, 당시 캄보디아의 상황과 캄보디아의 선제공격과 베트남인 학살이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공격했던 점을 고려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폴 포트와 킬링필드의 막장성은 누구나 인정하기 때문에, 베트남이 캄보디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부정적인 결과를 남기고 갔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어도 모든 책임을 베트남에게만 돌리기는 힘들다. 그리고 그 와중에 미국은 진영논리에 따라 크메르 루주를 지원하고 있었으니 이뭐병... 

그리고 일부에서는 현대 베트남의 경제적, 정치적 난맥이 극단적 이상주의자인 호찌민의 무조건적인 공산화 경제정책과 친중전략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호찌민의 친중은 공산주의자인 호찌민 입장으로선 프랑스, 미국 등과 싸우기 위해 필연적인 측면도 있었으며, 베트남 전쟁 이전에는 프랑스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측면에서라도 호찌민이 미국을 끌어들이려 했다는 점에서 호찌민이 미국의 힘을 잘못 평가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애시당초 호찌민 자체도 전술했듯이 극단적 공산주의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으며, 베트남의 경제정책 실패를 호찌민의 잘못된 이상주의 탓이라 주장하는 것은 베트남의 주석이 타 공산국가와 같은 독재자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주석으로서 호찌민의 역할은 주로 외교분야와 대외적 이미지 담당의 측면이 강했으며, 주요 정책들은 쯔엉찐이나 레주언과 같은 공산당 서기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들은 주석인 호찌민을 무시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호찌민의 지시를 받는 위치는 아니었으며 이들이 꼭 호찌민의 측근인 것도 아니었고, 특히 급격한 공산주의화 정책을 펼친 레주언은 자신을 호찌민에 맞먹는 이미지로 만들려 하다 실패하기도 했다. 

오늘날 베트남의 경제적, 정치적 난맥에 호찌민의 책임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이 모든 것을 베트남 주석과 공산당의 분리 없이 호찌민의 이상주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호찌민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평가라 할 수 있다. 한국인 입장에서 공산권을 공부 할 때 마다 강조 되는 항목이지만, 대부분 공산권의 국가들은 북한 김씨 왕조가 아니다. 일반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정은 당의 독재를 원칙으로 하고, 이는 개인의 독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물건이다. 천하의 그 레닌도 막상 정치국 내에서는 죽을때 까지 마음대로 다른 정치국위원들을 마음대로 찍어누르거나 하지 못했고, 중공이나 소련도 스탈린, 마오쩌둥 시절 중에서도 완전한 권력 장악 까지 일정 부분 당내 민주주의를 실행해야 했으며, 저런 전체주의적 독재자들이 죽어 사라진 이후 다시 과두 정치, 집단적 당의 독재 체제로 돌아갔다. 북베트남은 이 와중에서도 솔직히 하노이 정권이 단단하게 자리 잡았을 시점인 1950년대, 60년대에 들어서는 호찌민도 노인이었기 때문에 상징적 국가 원수 역할이 더 강했지, 실무 통치는 쯔엉찐, 레주언, 레둑토 같은 정치국의 고위 관료들 중심으로 돌아갔고, 산하 조직인 베트콩의 경우 쩐반짜, 응웬치짠, 팜반둥 같은 인민혁명당 중앙 행정 위원회 (미국측 자료에서는 그냥 남베트남 중앙 위원회, 줄여서 COSVN으로 일컬는다) 지도부가 하노이 정치국의 지령을 받아가며 독자적으로 운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