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음악계에 다시는 없을 천재 가수 김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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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음악계에 다시는 없을 천재 가수 김창완


2017. 3. 1.

형제들로 구성된 전설적인 가족 밴드(큰 동생 김창훈, 작은 동생 김창익)인 산울림의 맏형으로 기타와 보컬, 작곡 등을 담당했다. 특유의 실험적인 가사와 사운드, 독특한 발성법 등은 세계적으로도 독보적인 것으로 커버 곡 위주의 활동을 하던 당대의 다른 밴드들과는 차원이 다른 행보를 보여준다.



김창완의 음악세계에 대해 미8군에서 흘러나오는 곡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의 포크 뮤지션의 영향을 받았다 등등 여러 설들이 존재하지만, 그 무엇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기 힘든 그야말로 파격적인 데뷔를 했다. 1집 데뷔 이전에 이미 세자릿수의 곡을 집안 구석에서 작곡했다고 한다. 후덜덜. 그의 스타일은 장기하를 비롯한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척박했던 한국 락 음악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이 음악 저 음악 닥치는대로 듣던 하세가와 요헤이가 '뿌리를 찾을 수 없는 음악이다'라며 큰 충격과 함께 한국에 오게 된 계기가 된 뮤지션 중 한 명이기도 하다. 한국 대중 음악사에서 한 손에 꼽히는 인물.


산울림으로 활동하는 것과 별개로 본인 이름으로 솔로 앨범도 자주 냈는데, 산울림 스타일과는 달리 조용하고 잔잔한 발라드나 포크송을 불렀다. 또 아이들을 소재로 한 노래나 동요에도 관심이 있어서, 동요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오늘날 잘 알려진 <개구쟁이>나 <안녕>("안녕, 귀여운 내 친구야")이 김창완의 곡이다. 공연장에서 김창완밴드의 <개구쟁이>("우리 같이 놀아요, 뜀을 뛰며 공을 차며 놀아요")와 <산할아버지>의 라이브는 정말 일품이다. 동요에 맞춰서 뛰어노는 어른들... 심지어 슬램도 한다. 그 외에도 MBC에서 방영된 애니메이션 이크는 멋쟁이의 주제곡의 작사, 작곡, 노래까지 담당했고, 어린이 드라마 5학년 3반 청개구리의 곡도 담당했다. 드라마 주제가도 불렀는데, 한시대를 풍미한 미니 시리즈 한지붕 세가족의 오프닝이나 순풍산부인과의 노래들도 김창완의 곡이다. 8,9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알게모르게 김창완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셈이다.

김창완의 작곡, 그리고 보컬은 사이키델릭 록(산울림 1~3집)에서 정통 록(산울림 4집 이후)으로, 그리고 포크와 발라드를 병행하는 것으로(솔로 활동,산울림 12집까지) 로 변했다가 다시 사이키델릭 록(산울림 13집)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거쳤다. 김창완밴드로 활동하는 지금은 포크 록으로 노선을 잡고, 포크 페스티벌과 락 페스티벌에 동시참여하는 중. 여러모로 변화를 거쳐왔는데, 모든 활동이 성공했던 것만 봐도...

앨범과 앨범 사이에 공백기가 길긴 했어도 최근까지도 활동했으나 동생이자 산울림에서 드럼을 담당하던 막내 김창익 씨가 사고사를 당했다. 김창완밴드의 《The Happiest》 앨범의 5번째 트랙인 <Forklift>가 김창익 씨의 추모곡이다. 김창익씨의 죽음으로 결국 사실상 산울림은 해체되고, 현재는 자신의 이름을 딴 김창완밴드를 이끌고 있다.

이와 관련 인터뷰를 보면

"김창완 :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 있었고(산울림의 막내인 동생 김창익씨의 죽음), 그 원통함을 어떤 걸로도 풀 수가 없었어요. 지금은 부르지 않지만 Forklift 라는 저의 동생을 빼앗아간 지게차라는 노래를 만들었어요. 그 지게차라는 노래를 만들기 전에 '동생을 위한 노래가 한 곡만 나와줬으면 좋겠다.. 그 노래가 나와주면 위로를 받을텐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제가 캐나다에 갔다와서 며칠 사이에 동생을 빼앗아간 눈이 며칠 사이에 사라져 버린거예요. 이렇게 며칠 사이면 사라질 눈이 왜 동생을 데려갔을까... 이게 너무 원통해서 며칠 밤을 잠 못 이루다가 노래 한 곡만 나와주면 좋겠다.. 그러면서 제가 속으로 바람을 갖기를 슬픈노래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런생각을 했어요. 근데 뭐 노래라는게 뭘 만들겠다고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인연같이 다가왔어요. 의외로 그 노래를 자꾸 부르면서 제가 위로를 받았어요. 근데 여러분도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뭐 이렇게 아주 슬프게 들리거나 듣기에 따라서 그러지만.. 아주 담담하게 나왔어요. 얼마나 제가 고마웠는지 몰라요. 그렇게 크게 위로를 받고 다시 음악만이 내게 위로를 해 줄 수 있다고 생각을 했고, 밴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게 한 반년 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그 다음부터 김창완밴드가 앨범에 박차를 가하고 이렇게(웃음) 또 산울림 30년은 그냥 보내기에 아까운 유산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산울림 30년 레퍼토리들도 있고, 열심히 해서 김창완밴드의 좋은 곡을도 갖게 되었어요. 어려운 일이 있으시더라고 용기를 가지면 어디서든지 위로를 받으실 수 있어으니깐요. 얼마나 지금 행복한 밴드입니까.(웃음)"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잠사학과 출신인 엘리트다.(고등학교는 중앙고) 그런데 손석희가 진행하는 라디오에 나와서 말하길 그냥 담임이 원서 넣는대로 간 거라고 한다. 본인은 어디 붙었는지도 몰랐다고. 그래서 실제로 등교하고 실망했다고 한다. 본인이 잠사학과에 붙었다는 이야기를 친구로부터 전해듣고 잠수복을 사러 남대문시장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잠사학과는 누에와 섬유를 다루는 학과로 잠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여튼 본인은 원래 음대나 미대를 가고 싶어했지만 실기가 필요한지도 몰랐고, 아무튼 그땐 학사 상담이고 뭐고 없는 시대였던 데다가, 정보화 시대인 지금과는 달리 정보가 정말 제한되어 있었고 한정된 계층에게만 풀려 있었다. 그리고 담임이 왜 농대 잠사과에 넣었는지도 뻔히 보이는데, 어쨌든 서울대로 집계가 되기 때문에 담임 입장에서는 학생의 미래고 자시고 안전빵으로 넣어 놓으면 그만이다. 또 이렇게 학생을 서울대에 넣어놓을 경우 암암리에 교장이라던가 이사회라던가 동창회라던가 서울대나 연고대에 학생 넣은 수만큼 보너스가 들어오기 때문에... 과거 멋모르고 공부는 잘하는데 집안이 변변찮았던 수재들에게 자주 자행되던 참혹하고 쓰레기 같은 짓거리다.

김창완이 학교에 일찍 들어간 이유를 김창훈에게 묻자, 형은 워낙 수재라서 집에서 일찍 보냈다는 대답을 한 적도 있다. 2000년대 중반 쯤에 아침 프로그램에 나와서 김창완이 밝힌 바로는 어릴 때 동네에 나이가 한두 살 많은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학교갈 나이가 되어서 학교에 다니게 되자 김창완도 친구들을 따라 학교에 갔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창완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되고보니 1학년 과정이 친구들을 따라서 학교에 갔을 때 이미 다 배운 내용이라 울고불고 해가지고 2학년으로 올려줬다 한다. 아마도 김창완이 빠른 생일이라 7살 때 입학하러 갔는데 저 사건으로 인해서 6살에 입학한 것과 동등하게 처리된 것 같다. 이 방송이 김창완 공식사이트에 올려져있었는데 지금은 잘려서 볼 수 없다. 

김창완, 김창훈 등의 인터뷰에선 종종 집이 가난했었다, 부모님의 불화가 심했다는 말들이 언급된다. 사실 어렸을 때는 그런대로 잘 살았지만, 김창완의 아버지가 퇴직금 전부를 어떤 영화에 투자했다가 거하게 말아먹어서 집이 가난해졌다고 '이제야 보이네'에서 언급한다.

형제들이 창자 돌림에 가수라, 2000년대 중반에 사망한 가수 김창남과도 형제가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아니다.

요즈음에는 KBS의 교양 프로그램인 TV책의 MC로 등극했다! MC가 그렇게 주가 되는 방송은 아니지만... 김창완이 직접 책을 읽고 책에 대한 자연스러운 서평, 얽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주는데, 왠지 전래동화 읽어주는 할아버지 느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