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계 최초로 슈퍼볼MVP로 선정된 하인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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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계 최초로 슈퍼볼MVP로 선정된 하인스워드


2017. 3. 8.

하인스 워드 NFL 피츠버그 스틸러스의 레전드 플레이어 미국의 前 미식축구 선수이자 방송인이다.

주한미군인 아버지 하인스 워드 시니어와 용산 미군부대 인근 미군부대 클럽의 가수 김영희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음 만났을 때 아버지는 20살, 어머니는 25살로 여러 정황상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다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결국 아버지가 복무기간을 다 채우고 첫 돌이 지나기 전에 급작스럽게 부모와 같이 미국으로 넘어가 애틀랜타에 자리를 잡지만, 1년 후 독일로 다시 파견을 나가는 바람에 어머니와 어린 워드만 미국에 남게된다.


원하지 않는 미국행에 영어도 전혀 모르는 26세의 애 딸린 여자가 미국에서 혼자 생활을 영위하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보니 김영희씨는 트레일러 파크에서 청소부 일을 하며 아이를 키우게 된다. 하지만 1년 후에 돌아온 아버지는 루이지애나주에 살던 자신의 어머니에게 아들을 데려가 버렸고 졸지에 혼자가 된 김씨는 아들을 되찾아 자신의 삶을 정착시키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 하게 되고 워드가 8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는 어렵게 친권을 되찾아 워드를 기른다.


실제로 KBS스페셜로 방영될만큼 김영희씨가 하인스 워드를 열과 성을 다해 키운 이야기는 미국에서도 유명하며, 워드 본인도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기로 잘 알려져있다. 지금도 김영희씨는 애틀랜타 인근 초등학교에서 일하며 아들과 아들 가족과 함께 산다고 한다.

성실하게 자란 하인스 워드는 운동에 재능을 보이며 고교 때는 주에서 가장 뛰어난 운동선수로 성장, 졸업반 때는 고교 주전 쿼터백으로 1,500야드 이상의 패싱과 1,000야드 이상의 러싱을 기록했고, USA Today 등에서 고교 올 아메리칸 선수로 선정된다. 이런 그에게 당연히 여러 미식축구 명문 대학들이 장학금 제의를 해왔고, 메이저리그의 플로리다 말린스까지 드래프트 지명을 해왔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미식축구로 집에서 가까웠던 SEC의 조지아 대학교에 진학했다.

대학 풋볼 입성 첫 두 해 동안 워드는 입학 당시 포지션이었던 쿼터백 주전 자리보다는 빨리 1군자리를 원했기 때문에 포지션을 왔다갔다 했다. 1학년 때는 주전 러닝백 터렐 데이비스의 부상으로 러닝백과 와이드 리시버를 번갈아 뛰었으며 2학년때는 로버트 에드워즈에게 러닝백 자리를 내주고 리시버로 뛰다가 주전 쿼터백의 부진으로 인해 대체 쿼터백으로 나서서 시즌 종료 때까지 다시 주전으로 뛰었다. 피치볼에서 413야드 패싱으로 학교 기록을 세우기도 했지만, 열심히는 했으되 결과는 신통치 않은 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

3학년이 되자 워드는 자신의 재능을 집중하기 위해 리시버로 포지션을 굳힌다. 1996년 팀은 5할 승률도 못했지만 워드 본인은 52번 패스를 잡아 900야드를 전진했고 러싱으로도 26번에 170야드를 달리며 팀의 핵심 공격 무기로 완전히 이미지를 굳혀버린다. 이어서 4학년 자신의 대학 풋볼 마지막 시즌이 되자 워드는 팀의 에이스로 매 경기 두명의 집중마크를 당하면서도 그는 55개의 패스 캐치, 6개의 터치다운를 잡으며 컨퍼런스 올스타로 뽑히는 한편, 그 해 리시빙+러싱+리턴 합계 3,870야드 토털 전진으로 모교 선배이자 그 유명한 허셸 워커에 이어 학교 역대 2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하인스 워드는 워낙 여기저기에서 뛰다 보니 와이드 리시버 경력이 상대적으로 일천하며 리시버로서 특출한 강점이나 평균을 약간 밑도는 신체 조건 때문에 드래프트에서 정상급 리시버로 평가받지는 못했다. 보통 웬만한 대학 미식축구 스타 선수들, 특히 선수 생명이 짧은 NFL에서 신체 능력으로 먹고 사는 리시버들이 3학년까지만 뛰고 프로로 전향하는 것과 달리 4학년까지 채우고 드래프트에 나온 것도 대학을 갔으면 졸업장은 꼭 받으라는 어머니의 의견을 존중한 이유가 크지만, 리시버로서 좀 더 어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점도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이러한 평가가 이후 리그 정상급 리시버로 활약했던 그의 프로 커리어에 비하면 낮은 평가였다는 것이지, 드래프트 탑 5 리시버 재목으로 평가되어 2 라운드 정도에서 지명 될 재능으로 인정받고는 있었다. 그러나 드래프트 직전 어린 시절 다친 십자인대가 뒤늦게 발견되면서 선수 가치가 추락, 결국 3라운드 가장 마지막인 전체 92번으로 피츠버그 스틸러스에 지명되었다. 여담으로 드래프트 동기로는 그 유명한 쿼터백 페이튼 매닝, 와이드 리시버 랜디 모스 등이 있다.

프로 초창기에 워드는 대학 초기처럼 포지션이 확고하지 않았다. 당시 헤드코치 빌 카워는 그를 전천후 유틸리티 백업선수로 생각했기 때문에 스페셜팀에서만 주로 출장하고 리시버로는 선발 출장 없이 단 15개의 캐치에 246야드만 전진했다.

그러나 연습 때는 항상 열심히 운동하는 태도와 필드에선 플레이 하나하나에 열성적이고 몸을 사리지 않는 터프함으로 코칭 스태프와 동료들의 호감을 산 하인스 워드는 다음해인 1999년에 주전으로 발탁됐다. 99년 14경기에 나온 그는 61번 패스캐치에 638야드, 7터치다운로 급성장한 모습을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주전 쿼터백의 삽질로 팀의 패싱 공격은 리그 뒤에서 2등, 팀은 6승10패로 전년보다 더 나빠진 결과를 얻게된다.

사실상 피츠버그 스틸러스의 주전 와이드 리시버로 자리를 굳힌 하인스 워드는 드래프트 1라운드로 들어온 후배 트로이 에드워즈, 플렉시코 버레스등 강력한 경쟁자들이 차례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팀의 간판 와이드 리시버 자리를 유지한다. 이를 바탕으로 2001년부터 하인스 워드는 처음으로 시즌 1천 야드를 돌파했고 NFL의 올스타게임인 프로볼에도 선정되었다. 이로써 전국구 스타 등극.

본인의 성장과 팀의 성장이 맞물리며 스틸러스는 강팀이 되었지만 그 위에는 더 강력한 톰 브래디의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가 버티고 있어 번번이 슈퍼볼 문턱 앞에서 좌절, 슈퍼볼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하인스 워드와 벤 로슬리스버거를 중심으로 전력을 끌어올린 스틸러스에게 기회는 빠르게 찾아오게 된다. 2005년 정규시즌 69 패스캐치에 975야드를 거둬들였고, 11개의 터치다운를 잡아내며 팀의 1번 리시버 역할을 수행해 팀의 통산 최다 패스 캐치 기록을 갈아치운 그의 활약속에 스틸러스는 최하위인 6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지구 라이벌 신시내티 벵갈스, 시즌 최고의 연승기록을 세웠던 페이튼 매닝의 인디애나폴리스 콜츠, 덴버 브롱코스를 전부 원정에서 물리치며 6번 시드의 기적으로 40회 슈퍼볼에 진출했으며...

슈퍼볼 XL에서 시애틀 시호크스를 만나 전반 종료 직전 3rd and 28에서 잡아낸 결정적인 리시빙으로 7-3 리드를 만드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냄과 동시에 4쿼터에는 리버스로 공을 넘겨받은 앤트완 랜들-엘로부터 팀 승리에 쐐기를 박는 43야드짜리 TD 패스를 멋지게 잡아내며 터치다운. 5번 패스캐치, 123야드, 터치다운 1개로 커리어 첫 우승과 함께 슈퍼볼 MVP(아시아계 최초)로 선정되는 겹경사를 얻는다.

<아들 제이든과 함께>


그의 생애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게임이 된 슈퍼볼이 끝나고, 이미 한국에서도 그가 최고의 활약으로 승리한 슈퍼볼이 중계되어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하인스 워드는 자신이 태어난 한국을 1살 때 이후 처음으로 다시 찾았다. 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태에서 '어머니의 나라'에 돌아온 그는 온 국민의 관심속에 청와대까지 초청될 정도로 큰 대접을 받았고 명예서울시민이 되기도 하였다. 이에 하인스 워드는 한국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혼혈아동을 위해 백만달러란 거금을 기부하였으며 이 방문은 한국에서 혼혈아의 사회적 위치와 다문화가정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찍은 사진>

최전성기에 슈퍼볼을 거머쥔 이후 30대에 접어들면서 하인스 워드 본인도 점점 체력문제와 잔부상으로 개인 기록은 조금씩 떨어졌으며 팀의 주전 쿼터백 벤 로슬리스버거의 오토바이 사고로 팀이 내홍을 겪으며 다음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 하지만 여전히 74 패스캐치 975야드 전진으로 A급 리시버의 자격을 유지했던 그였다.

2007년 계약문제 등과 개인 스케줄, 그리고 30줄의 나이로부터 발생한 무릎부상으로 인해 오랫동안 지속해왔던 연속경기 출장 기록도 끊어지고 71캐치 732야드, 7터치다운이라는 줄어든 성적표를 받아든 하인스 워드는 결국 1번 리시버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그러나 대망의 2008년. 팀은 쿼터백 벤 로슬리스버거의 괴물같은 부상복귀와 트로이 폴라말루, 제임스 해리슨을 앞세운 무시무시한 수비로 지구 1위를 기록해 다시 슈퍼볼에 도전했다. 2년 연속 리그 수비 1위의 위용을 앞세워 정규시즌 12승4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 샌디에이고 차저스와 볼티모어 레이븐스를 연파하고 43회 슈퍼볼에 진출, 슈퍼볼 이전 경기에서 당한 부상으로 슈퍼볼 출장이 의문시되던 언론의 예측에도 불구하고 선발 출장해 첫 드라이브에서 38야드짜리 패스를 잡으며 커트 워너가 이끄는 애리조나 카디널스의 수비진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며 대각의 산토니오 홈스의 견제를 끌어주었다. 결국 난타전 끝에 40회 때의 주연이 아닌 조연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며 개인 통산 2번째 슈퍼볼 우승을 차지한다.

2007년의 무릎부상으로 인한 부진으로 한 물 갔다는 평을 받은 워드는 이해 1천야드를 다시 넘기며 완벽히 부활, 전성기의 화려한 움직임은 아니지만 선수경력 10년을 넘기는 백전노장의 여유를 과시하며 2009년에도 또다시 1천야드를 넘겼고 피츠버그 스틸러스 통산 최다 리시빙야드 기록까지 갈아치웠다.

2010년 시즌에는 마이크 월러스, 엠마뉴엘 샌더스, 안토니오 브라운 등의 신예 와이드 리시버들이 등장하면서 그들의 리더이자 멘토, 뒤를 받쳐주는 역할을 하면서 755야드에 TD 5개로 전년도보다 기록은 줄었지만 팀은 빅벤의 4경기 징계에도 불구하고 12승 4패로 AFC 2위를 차지해 숙적 볼티모어 레이븐스와 뉴욕 제츠를 꺾고 45회 슈퍼볼에 진출했다. 그러나 애런 로저스의 그린베이 패커스에 패배했다. 하인스 워드는 이날 경기에서 3:21로 뒤지던 2쿼터 종료 직전 3번 연속 패스를 받아내며 추격의 발판을 마련하는 터치다운을 성공시키는 등 총 7회 패스 캐치 78야드 전진 1터치다운으로 분전했지만 팀의 패배를 막아내는데는 역부족이었다.

현재 스틸러스의 리시빙 관련 통산 기록은 거의 그가 다 경신했으며, 명예의 전당 입성도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그야말로 피츠버그의 살아있는 전설.

그러나 36세의 나이에 2012시즌을 준비하는 하인스 워드의 높은 연봉을 스틸러스가 감당할 수 없었다. 스틸러스는 이미 샐러리 캡 한계를 천만달러 이상 넘긴 팀이라 무조건 연봉을 줄여야만 하고, 가장 중요한 팀의 퍼스트 타겟인 마이크 월러스가 자유계약선수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노장들을 방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인스 워드는 한국 시간 2012년 3월 1일 팀에서 방출되었다. 14년간 한 팀에서 활약한 프랜차이즈 레전드 치고는 씁쓸한 결말. 더 안습인건 같은 해 드래프트되어 똑같은 신세가 된 NFL 최고의 쿼터백 페이튼 매닝 때문에 이 소식이 완전히 묻혀버린 것.

2012년에도 하인스 워드는 선수생활을 이어나가기 원했으나, 결국 36세의 노장 와이드 리시버에게 새 팀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고 하인스 워드는 스틸러스 레전드의 자존심상 다른팀에서 커리어를 연장하는 길을 포기하고 현역 은퇴를 선택하고 말았다.

이후 오랜 세월 미식축구 선수로 뛰었던 경험, 그리고 오랜 방송 경력과 아래 언급된 댄싱 위드 더 스타의 인연으로 NBC의 선데이 나잇 풋볼을 통해 해설자로 데뷔하였다.

하인스 워드의 특징은 스피드 중심의 와이드 리시버이지만 그의 뛰어난 작전수행능력은 어떠한 플레이라도 가능하게 만들며 쿼터백에겐 확실한 패싱 타겟이 된다. 필드를 가로지르는 플레이나 짧은 패스 전술에서는 거의 최상급으로 꼽아도 손색 없는 작전 수행 능력을 보여왔고 쿼터백이 곤란에 빠졌을 때 근거리로 루트를 찾아 패스를 받아내는 것 역시 그의 장기. 무릎을 몇 번 다치고 나이가 들면서 롱패스 쪽은 조금 애로 사항이 있지만, 작전수행능력만큼은 NFL에서도 최정상으로 꼽힌다.


또한 NFL에서 가장 블로킹을 잘하는 와이드 리시버로 선정될만큼 허슬 플레이에 능하다. 자기보다 큰 선수들을 상대로 절대 물러서지 않고 블로킹이나 캐칭, 러닝 등에 있어서 매우 적극적이다.

거기다 그것이 굉장히 지능적이고 가차없기 때문에 NFL선수들이 선정한 최고의 더티플레이어로 찍히기도 했다. 같은 지구 라이벌팀, 특히 볼티모어 레이븐스와 신시내티 벵갈스의 수비수들은 하인스 워드라면 천하의 개쌍놈 취급하며 언제든 걸리면 죽이겠다고 이를 간다. 실제로 2008년 시즌에는 지구 라이벌 벵갈스와 경기중 신인 라인배커 키스 리버스를 교묘하게 후방에서 쳐박아서 시즌 아웃 부상을 입혔지만 반칙으로 걸리지도 않고 이후 징계도 받은 적이 없다. 이때문에 NFL에서는 2009년부터 볼 없는 곳에서 양팀 선수들이 측면, 후방 블로킹을 금지하는 룰을 만들었고, 이를 하인스 워드 룰이라고 말한다. 오죽 심했으면 이 시즌 Monday Night Football에서 스틸러스를 상대하게 된 라이벌 레이븐스 수비수들이 하인스 워드를 때려잡으려고 현상금을 걸었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이다.

실제 경기를 보면 하인스 워드는 경기 초반에 자기에게 따라붙는 수비수들을 절대 그냥 안넘긴다. 초반에 기싸움 하느라고 그냥 지나갈 거 한 번 툭 치고 지나가고, 지나가면서 트래쉬 토크라도 하면 같이 트래쉬 토크하고 멱살잡이도 대놓고 벌인다. 그러다가 다음 스냅에서는 합법적인 블로킹으로 냅다 쳐박아버린다. 상대가 과열양상이라도 절대 기죽지 않고 맞불을 놓으며 상황 종료되면 씨익 쪼개주는 썩소는 상대 선수와 관중들을 빡치게 만드는 최고의 무기.

바로 이렇게

그외에도 이런 거친플레이와 지능적인(?) 플레이에 관련된 자료가 많다. 물론 거기서 유발된 시비도 말이다. 대단한것은 수비수 포지션의 덩어리들과 시비가 붙어도 기 한번 안죽고 맞대응한다는게 대단한 점이다.

그가 남긴 명언들

"너는 수퍼스타가 될 수 없다"고 하는 말은 듣지 마세요. 인종에 대해서도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자기 꿈을 믿으세요."

"전 세계가 슈퍼볼을 지켜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절반이 한국인인 만큼 한인사회를 대표해 최선을 다하겠다."

"내 몸에 한국인의 핏줄이 흐른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동료의 패스가 좋았고, 나는 그저 달렸을 뿐이다."

"저는 늘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늘 부정적인 사람도 있어요. 왜 슬퍼하죠. 전 뭘 하든 즐기면서 살아요.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나요."

"풋볼을 포기하고 싶을 때는 어머니의 처지를 생각했다. 어머니는 나의 모든 것이다. 그녀는 내게 모든 것을 쏟았으며 그것이 오늘의 나이다."

"나의 미식축구 인생은 어머니 인생입니다. 많은 일이 벌어지지만 열심히, 긍정적으로 살면 좋은 일들이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