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금을 노린 투구꽃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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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금을 노린 투구꽃 살인사건


2017. 1. 21.

일본에서 일어난 보험금 살인사건

범인 카미야 치카라는 보험금 한화 18억 5천만원을 노리고 아내를 투구꽃과 복어독으로 독살시킨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오노 요키치(당시32세) 교수가 밝혀낸 사건이기도 하다.

1986년 5월 19일 범인 카미야 치카라(당시 46세)는 13살 연하의 아내랑 오키나와에서 여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9시 30분 호텔에서 조식을 먹은 뒤 10시 30분 체크아웃 하였다. 오전 11시 나하공항에 도착해 아내는 3명의 친구들과 이시가키섬에 놀러간다. 



그뒤 12시 53분 친구들과 이시카키섬에 도착했는데 택시를 타면서 아내의 상태가 이상해진다. 땀을 엄청 많이 흘리는 것은 물론, 오후 1시27분 호텔에서 체크인을 한뒤 방에 들어가던 도중 구토를 호소했고 경련이 시작되었으며, 이에 병원으로 옮겨져 조치가 취해지지만 결국 3시 4분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친구들은 형사를 동해 류큐대학교 오노 요키치 교수에 의해 부검이 실시되었고 심장쪽에서 작은 울혈이 발견되지만 장기들은 비교적으로 깨끗했다. 그녀의 사망원인이 나오지를 않자 오노는 직감적으로 이상하다는걸 느꼈으며 카미야와 만난 날 그가 너무 침착하게 행동하여 그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그는 '장기는 모두 제자리에 갔다 놓았냐?'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오노 교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심장과 혈액을 보존하였다


범인 카미야 치카라는 6개월전 술집 종업원이었던 아내를 만났다. 그녀에게 자신을 공인회계사라고 소개하였으며 모피코트와 400만엔 짜리 반지를 선물하였다. 

그뒤 카미야는 만난지 6일 만에 청혼하였고 아내는 친구들에게 카미야를 소개했다. 그녀의 친구들은 카미야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카미야 치카라가 공인회계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낸다. 하지만 그는 아내의 친구들의 추궁에 경영컨설턴트로 중소기업의 회계관리를 하고 있다고 답변하며 의심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친구들은 카미야의 낡고 해진 구두를 보고 고가의 선물을 선물하는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뒤 아내는 술집을 그만두고 오사카에서 혼인신고서를 제출한다. 카미야는 그뒤 아내의 친구들에게 이시가키섬에 놀러가달라는 부탁을 하였고 오키나와에서 카미야는 오전 11시 40분에 아내와 친구들 일행과 헤어진다. 



하지만 1시간 40분 동안 효과가 나오는 독극물이 증명되지 않았고 아내의 친구들은 카미야를 더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아내가 자주먹는 약때문이었다. 카미야와 결혼 후, 아내는 카미야가 제조한 영양제를 먹기 시작했는데 친구들은 그 부분을 의심한것이다. 

카미야는 친구들에게 캡슐의 사용 내역을 말한뒤 아내를 수령인으로 약 2억엔의 보험을 들어 놓았다고 말했다. 친구들은 그런 의심을 바탕으로 행동을 시작했고 경찰,신문사에 전화하여 조사를 의뢰하였지만 제대로 조사하는 곳은 없었다. 하지만 일간스포츠 오다기리 기자와 FOCUS 편집부 기자 츠지야 마모루 기자가 그것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언론에 의한 취재전쟁이 시작되었고 류큐대학에는 츠지야 기자가 방문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1965년 카미야는 간호사인 첫번째 부인과 만나 결혼하였고 7년뒤 직장상사인 2번째 부인을 만나고 회사를 옮겨 경리부부장이 된다. 이중생활 10년뒤 첫번째 아내는 가슴의 통증 및 구토를 호소했고 결국 1981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으며 그에게 보험금은 받지 않았다고 한다. 2번째 부인 역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며칠뒤 오노 교수에게 오다기리 기자가 방문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1985년 약국에서 캡슐형 강장제[1]를 다량으로 구매했고 아버지가 의사인양 주민들에게 나눠준다는 거짓말을 했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같이 살지도 않고 노망이 나지도 않았다고 하였다. 

한편 아내의 친구들은 보험회사에 닥치는 대로 전화해 보험이력을 조사를 의뢰했고, 이에 4개의 보험회사가 경찰에게 수사를 의뢰했다. 이렇게 밝혀진 보험금은 무려 1억 8500만엔 즉 매달 붇는 보험금이 36만엔이었다. 두 기자는 신문 1면에 이 내용을 대문짝만하게 실었고 오노 교수는 자신이 모은 자료를 경찰에게 넘겼으며 사망진단서의 사인을 심근경색에서 급성신부전으로 고쳤다. 

한편 경찰은 비밀리에 수사회의를 열어 카미야가 아내를 어떻게 죽였는지 조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인이 되는 독극물을 찾아내지 못했고, 결국 치바대학에 조사를 의뢰하지만 캡슐을 30겹을 해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미심쩍은 보험회사는 카미야의 보험금 수령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카미야는 자신의 수기문은 기자들에게 나눠주었고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를 않자 결국 언론의 보도는 사그라 졌다. 그러자 카미야는 보험회사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냈고 취직을하여 역시 경리부장의 자리에 올랐다. 

결정적인 증거가 잡히다!!

오노 교수는 경찰의 의뢰를 받아 전문가들이랑 사인을 찾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별다른 수확이 없었고 오노 교수는 영문으로 된 백과사전에서 그녀의 증상과 맞는 독초 투구꽃을 알아낸다. 그는 당시 초미량분석기가 있는 도호쿠대학교 미즈가키 교수에게 검사를 의뢰하였다. 

한편 카미야는 유흥에 빠져 애인 3명을 달고있었으며 애인들에게 차,맨션을 선물하고 있었다. 그리고 9개월뒤 투구꽃이 검출되었다. 1990년 10월 보험금 민사소송에 오노 교수의 증언으로 사건은 다시 큰파장을 얻었고 경찰은 투구꽃의 출처를 조사하였다. 그결과 한 원예용품점에서 투구꽃 화분 62그루를 구매한것이 확인이 되었지만 1시잔 40분의 의혹을 풀지 못하였다. 그리고 경찰은 한 아파트에서 카미야가 방을 빌렸고 그가 사용했던 시기에는 전기세랑 수도세가 비정상적으로 나온것으로 나왔다. 

그 아파트에 다다미에 검사를 의뢰한 결과 미량의 독이 발견되었다. 한편 경찰은 카미야를 조사하던 도중 카미야가 경리부장이라는 자리를 악용하여 회사의 주식을 팔아넘긴 것을 알았으며 그 금액이 무려 7억엔이 달하였다. 경찰은 카미야를 긴급체포하여 횡령죄로 기소 하였다. 그리고 경찰은 카미야를 살인 및 사기미수죄로 그를 또다시 기소하였지만 아직 1시간 40분의 공백이 채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 어민의 제보로 그가 복어를 다량으로 구매한것을 제보하여 복어랑 투구꽃이 길항작용을 하는 것을 알아냈다. 카미야는 아파트에서 실험을 반복하였고 아내에게 준 독약을 제조하고 전문가가 소지할수있는 기계를 구입하고 몇년동안 범행을 계획하였다. 결국 카미야는 첫번째, 두번째 부인의 사망은 기소되지 않았으나 세번째 부인의 독살혐의로 1,2심 무기징역에 선고하였고 2002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선고 된다. 

한편 오노 요키치 교수는 현재 도쿄대학에서 법의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2012년 11월 17일 카미야 치카라는 암으로 의료형무소에서 향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