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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피니는 1931년 4월 23일, 뉴저지의 아일랜드 이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보험사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간호사로 가정 형편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지만 성실한 부모 덕분에 세계 대공황을 잘 견뎌냈다.
하지만 그는 어릴때부터 타고난 사업가였다. 10대 때 크리스마스카드와 우산 등을 팔아 용돈을 마련했을 정도로 어릴 적부터 돈 버는 데 재능을 보였다.
코넬대 호텔경영학과 재학 시절에는 샌드위치 장사로 돈을 벌며 사업가의 자질을 일찌감치 선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에는 한국전쟁에서 미국 공군으로 복무한 경험을 살려 미 군함에서 면세 술을 팔기도 했다.
1960년. 29세의 나이에 대학친구들과 같이 DFS면세점을 공동 창업했다. 그리고 매년 천만 달러 이상을 벌기 시작해, 1970년대 후반 부터는 5천 여명의 직원을 거느리며 연간 3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게 되어, 1988년에는 약 1조 5,000억 원(13억 달러)의 자산을 달성해 <포브스>가 발표한 부자 순위 23번째에 이름이 올랐다.
그러나 그는 구두쇠로 유명했다. 직원들에게 이면지를 쓰게 하거나, 소송에 휘말렸을 때 변호사 수임료마저 깎으려 했으며, 경제인 모임에서도 계산을 하지 않으려고 일찍 자리를 뜨는 것으로 알려져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돈 많고, 잔인하고, 결단력 있는 갑부.'
그러던 중 1997년 DFS면세점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법정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로인해 회계장부가 언론에 공개되면서 미국 전역이 발칵 뒤집어졌다.
'뉴욕 컨설팅 회사' 라는 이름으로 15년 동안 2,900회 지출된 금액은 무려 40억 달러. (4조 4천억원)
사람들은 그가 재산을 빼돌렸을 것이라 추측했지만 곧 진실이 드러났다.
비밀 장부의 지출 내역은 모두 '기부'였다.
1982년 애틀랜틱 재단을 설립해 세계 각국에 자신의 자산 99%를 기부했던 것.
그가 이렇게 검소하고 남을 돕는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이유가 있다. 대공황 시절, 경건한 기독교 신자였던 아일랜드 노동자 부모의 자녀였던 그는 어려서부터 가난하지만 서로 돕는 공동체 의식을 배웠다. 이는 봉사와 기부 활동을 열심히 하던 그의 부모의 영향이 컸다.
특히 적십자사의 자원봉사 간호사로 일했던 어머니 매들린은 평소 남을 도울 때 “받은 이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다면 자랑하지 마라”고 당부했다. 돕는 행위를 통해 우월감을 느끼는 것을 경계시키는 한편 도움을 받는 이의 기분을 헤아리라는 뜻이었다.
비록 비밀은 들통났지만 그의 기부는 계속되었다. 척 피니가 1980년대부터 35년간 사회에 기부한 돈은 약 9조5,000억 원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는 매일 11억 원을 기부하기도 했는데 자신이 죽기 전까지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려면 그만큼의 액수를 기부해야 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척 피니의 소원은 비로소 작년 말에 이루어졌다. 마지막 재산인 약 80억 원을 모교인 코넬 대학교에 내놓은 것이다. 척 피니는 현재 아내와 재단 소유의 임대 아파트에서 지내며 어릴 때 부터 몸에 밴 검소한 습관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약 1만 4,000원짜리 시계를 손목에 차고 다니며, 이동할 때는 버스를 타고, 비행기도 이코노미석을 이용한다.
그는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돈은 매력적이지만 그 누구도 한꺼번에 두 켤레의 신발을 신을 수는 없다”고. 척 피니는 재산의 4분의 3을 기부한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처럼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를 원했다. 그의 신념은 ‘살아 있는 동안 기부’하는 것이었고 85세이던 2016년 말, 드디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당사자에겐 그 누구보다 행복한 파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