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과 연합군 포로를 강제 노역시킨 아소 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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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과 연합군 포로를 강제 노역시킨 아소 탄광


2014. 12. 8.

망언 제조기 아소 다로의 집안은 일제 시대에 탄광을 운영하였는데 조선인과 연합군 포로들을강제 노역시키고도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았다. 



1945년 8월 말 해방된 호주 전쟁포로들 사진.  그들은 아소 광업의 요시쿠마 탄광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  (사진 출처: 재팬 포커스).


일본 정부는 연합군 포로 강제노동에 대한 보상 문제가 샌프란치스코 평화 협정으로 종결되었다고 주장한다.   


1951년 9월 맺어진 샌프란치스코 평화협정 제14조는 일본 정부가 보상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명시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 보상금을 지급할 경제적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연합국들과 연합국 시민들은 보상권을 포기했다.  평화 협정 16조는 일본의 해외 자산이 적십자 국제 위원회로 양도된 후 연합군 전쟁 포로들에게 분배될 거라고 적혀있다.  이러한 조항에 의거하여, 1956년과 1961년에 14개국의 전쟁 포로였던 200,000 여 명에게 보상금이 지급된다.  하지만 영국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보상금은 한 사람당 80,000 엔 (222 달러)에 불과하였다.  미국에서는 미국내 일본 자산을 처분한 자금으로 1948년과 1952년에 일인당 약 3,000 달러를 전쟁포로였던 사람들에게 지급하였다.  


그후 1990년대에 아시아 전쟁 피해자들과 연합국 전쟁 포로들이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들에게 보상금 소송을 걸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전세계적으로 일본의 전후 책임을 묻는 목소리를 만들었고, 연합국이었던 나라들이 독자적으로 위로금을 전쟁포로 군인들과 민간인들에게 지급하도록 이끌었다.  다음은 위로금의 예이다. 


카나다, 1999년: 24,000 카나다 달러

영국, 2000년: 10,000 파운드

호주, 2001년: 25,000 호주 달러

뉴질랜드, 2001년: 30,000 뉴질랜드 달러

네덜란드, 2001년: 3,500 길더스



호주인 전쟁 포로로서 아소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한 죠 쿰스씨가 요코하마에 있는 영연방 전쟁 묘지를 둘러보고 있다.  묘 안에는 일본에서 사망한 335명의 연합군 포로들의 유해가 담겨있다.   


기록에 의하면 전쟁 당시 일본 전역에는 130여개의 포로 수용소에 약 36,000 명의 연합군 포로가 있었다.  특히, 아소 광업의 후쿠오카현 요시쿠마 탄광을 위해 1945년 5월 10일, 후쿠오카 전쟁포로 수용소 제26호가 개설되었다.  종전 당시 그곳에는 300 명의 연합군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호주인 197명, 영국인 101명, 네덜란드인 2 명).  전쟁 포로 연구회에서는 일본에서 사망한 3,500 여명의 전쟁포로 명단을 공개하고 있는데, 그 목록에서 아소 탄광에서 강제노역을 위해 설치되었던 수용소 제26호에서 사망한 두 사람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  또한 호주 전쟁 기념관에는 아소 광업 요시쿠마 탄광에서 강제노동했던 전쟁포로들의 회고록들이 보관되어 있다.   



죠 콤스씨의 전쟁포로 신분증.  맨 윗줄은 콤스씨가 1945년 5월 13일 수용소 제26호로 이송되었다는 내용.



2009년 3월 9일자 도쿄 방송(TBS) 뉴스에 아소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한 전쟁포로에 관한 내용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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