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7. 6.
1839년 어느 날 백인 두 사람이 온두라스와 과테말라 국경지대에서 카모탄 골짜기를 지나고 있었다. 두 사람 뒤를 인디오 짐꾼 몇 사람이
따랐다. 그곳은 오래 전부터 온두라스·과테말라·엘살바도르 게릴라들이 서로 싸우고 있어 아주 위험했다.
아니나 다를까. 골짜기를
벗어나 한 작은 마을에서 묵던 그들은 밤에 무장 괴한들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백인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미국인 존 로이드 스티븐스였고,또 한
사람은 화가 프레드릭 캐서우드였다. 그 날 스티븐스는 중앙아메리카 대리공사라는 외교관 신분증을 내보이고 죽음 직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1805년 뉴욕주에서 태어난 스티븐스는 법률가이면서도 이집트·그리스·터키를 두루 여행하며 고고학 유물에 빠져든 사람이었다.
1838년에 그는 우연히 육군의 한 보고서에서,1700년쯤에 푸엔테스라는 사람이 온두라스의 코판에 오래된 원형 경기장이 있다고 말했다는 문구를
보았다. 스티븐스는 즉시 그 유적을 찾기로 마음먹고 대통령을 움직여 외교관이 되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마을을 빠져나온 스티븐스
일행은 곧바로 밀림으로 들어갔다. 300년 전 스페인 정복자 코르테스가 지나간 뒤로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대밀림. 땅에서는 낙엽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빽빽한 나무들이 햇빛을 가렸다. 그들은 덩굴과 가지를 쳐내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나아갔다. 몸은 온통 긁히고 찔린 상처로
붉게 물들었고,벌레에 물려 여기저기가 붓거나 짓물렀다.
끝내 그들은 밀림을 뚫고 코판까지 가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몰골은 산송장
같았다. 밀림 속 작은 마을에서 며칠을 쉰 뒤 일행은 다시 밀림으로 들어갔다. 한나절 가량 밀림을 헤치고 나아가노라니 난데없이 돌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스티븐스는 몹시 흥분했지만 곧 냉정을 되찾았다. 이 밀림 속에 무슨 특별한 유적이 있겠는가. 아마도 옛날에 스페인군이 쌓은
요새이리라. 그 때 저만치서 인디오 안내자가 높다란 물체에 덮인 덩굴들을 칼로 쳐내고 있었다. 무대 커튼 같았던 덩굴들이 잘려 나간 곳에 커다란
돌비석이 드러났다. 높이 3.9m,너비 1.2m,두께 0.9m인 직육면체 돌의 전면에 새겨진 남자의 얼굴은 준엄하고 냉랭해 공포심을 자아냈다.
양옆에는 그림문자가,뒤에는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스티븐스는 자기가 고대 이집트 예술품에 못지않은 옛 문명의 자취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열대 밀림 속의 거대 문명
고대 유적을 많이 접한 스티븐스였지만,그 돌조각은 그 때까지 그가
보아온 어떤 고대 유물과도 완전히 달랐다.
“나는 이것이 옛 유적은 물론 예술품으로서도 커다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확신했다. 한때
이 대륙을 점령했던 민족이 결코 야만인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을.” 근처에서 비슷한 돌조각을 14개나 더 찾아낸 스티븐스가 마을에 돌아가
물어보았지만,인디오 중에 그 돌조각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뒤로 스티븐스는 밀림에서 돌조각과 성벽·계단·테라스 등을 수없이 찾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높이가 30m나 되는 피라미드를 발견했다. 그곳은 아득한 옛날에 꽤 강성했던 민족이 큰 도시를 이루고 살았던 곳이
틀림없었다.
1842년 뉴욕에서 ‘중앙아메리카·치아파스·유카탄 여행잡기’라는 책이 발간되자,세계는 놀라움으로 가득찼다. 콜럼버스를
따라 백인이 건너오기 이전에는 큰 나라나 문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해온 북아메리카 대륙에 피라미드까지 갖춘 거대한 도시가
있었다니! 더구나 세상의 모든 문명은 큰 강을 끼고 발달한다는 역사의 정설을 깨고 강이 없는 밀림 속에 도시가 있다는 스티븐스의 말을 아무도
곧이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고서는 믿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구체적이었다. 더군다나 캐서우드가 사진보다 더 세밀하게 묘사한 유적스케치를
책으로 펴내자 사람들은 절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명 가운데 하나이며,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유적과
유물이 발굴되고 있는 마야 문명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스티븐스의 책이 나온 지 1년쯤 지나서 이번에는 윌리엄 히클링
프레스콧이라는 사람이 ‘멕시코 원정’이라는 책을 펴냈다. 코르테스가 무너뜨린 옛 아스테카 제국을 밝힌 책이었다. 장님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시력이 나쁜 프레스콧은 그 책을 서재에서 자료와 증언만으로 엮었다. 그런데도 멕시코 땅에 아스테카라는 대제국과 뛰어난 문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우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세밀하고 박진감 넘치게 썼다.
멕시코시티에서 기차로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곳. 거기에 이집트의
것과 맞먹는,높이 60m가 넘고,밑변 하나의 길이가 200m가 넘는 피라미드가 있다니! 마야와 아스테카. 세계는 1년 사이에 두 번이나 놀랐다.
고고학자들의 관심은 하나같이 멕시코시티와 유카탄 반도의 밀림으로 쏠렸다.
프레스콧이 ‘멕시코 원정’을 펴낸 지 20년이 지난
1863년. 과테말라 인디오 마을에서 선교를 하는 샤를 에티엔 드 뷔르부르 신부가 스페인 왕립 도서관에서 케케묵은 옛날 책을 하나 찾아냈다.
제목은 ‘유카탄 유적들 간의 상호관계’. 1566년에 쓰인 책이었다.
인디오 말과 문화를 연구한 드 뷔르부르는 그 책에서 마야인들의
그림문자 스케치를 알아보았다. 그 책을 쓴 디에고 데 란다는 1564년 마야가 멸망할 때 유카탄 지방에서 주교로 있었다. 그는 마야의 모든
문서를 이교도의 것이라며 불태웠는데,어쩐 일인지 그렇듯 귀한 책을 써서 남겼다.
에드워드 허버트 톰슨
마야인들은 주기적으로 그들이 살던 도시를 버리고 새 땅으로 옮겨 다시
도시를 세우곤 했다. 따라서 스페인에 점령되기 전에 그들이 버린 도시는 그대로 밀림에 묻혀버렸고,스페인군에 정복된 도시는 이교도의 도시라는
이유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특히 카톨릭 신부들은 마야인들의 문서를 남김 없이 찾아내어 불태웠다. 오늘날 전해지는 문서는 단지 사본 세 필뿐이다.
이런 까닭으로 스티븐스가 유적지를 발견한 지 20년이 지나도록 마야의 역사는 수수께끼 투성이였다. 바빌로니아나 이집트처럼 수천 년 된 문명도
자료가 많이 전해지는데,겨우 300년 전에 멸망한 마야나 아스테카는 하루아침에 목이 잘리고 불태워져 그대로 잊혀지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마야인은 모두 100만 명쯤 되는데,그 가운데 자기네 옛 글자를 해독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데 란다 주교가 남긴
책은 마야의 돌비석과 건축물마다 새겨져 있는 기묘한 그림문자의 체계를 풀 열쇠가 되었다. 남북 아메리카 대륙을 통틀어 글자를 썼던 유일한 민족인
마야. 마야의 역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의 역사를 철저히 파괴한 데 란다의 책 덕분에 조금씩 조금씩 벗겨졌다. 그렇지만 워낙 남은 자료가 없어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그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많은 고고학자와 몇몇 천재 언어학자들의 피와 땀이 일구어낸
열매이다.
특히 1990년대 들어서는 유카탄 반도의 밀림 지역에서 마야 유적이 여러 곳에서 활발하게 발굴되고 있어,마야학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에는 서너 달에 한 번꼴로 마야 유적 발굴 기사가 실리고 있을 만큼 세계
고고학계의 눈과 귀는 온통 마야에 쏠려 있다.
트로이를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에 빗대어 ‘마야의 슐리만’이라고 불리는 에드워드
허버트 톰슨. 1885년 스물다섯살에 미국 영사로 과테말라에 간 그는 슐리만처럼 책 한 권에 쓰인 전설을 철석같이 믿고 유물 발굴에 나선
사람이다. 톰슨은 마야의 도시들 중에서 크기와 화려함으로 으뜸이었던 치첸 이차를 찾아갔다. 데 란다 주교의 책에 쓰인 ‘성스러운
우물(Cenote)’을 발굴하기 위해서였다.
가뭄이 들거나 재앙이 생기면,제관(祭官)은 아름다운 처녀들을 뽑아 성스러운 우물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물 속에 사는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 달래고 나면 제관이 처녀들을 우물가로 끌고 갔다. ‘온갖 장신구로 아름답게 꾸민 마야
처녀들은 자기들의 사명을 알고 엄숙한 마음으로 성지(聖池)로 다가갔지만,그들이 우물에 던져질 때마다 구슬프고 처절한 비명이 길게 메아리쳤다.
제관은 마야인들이 쓰는 자질구레한 물건들도 넉넉하게 우물에 던졌다. 만약 마야에 황금이 많았다면,그 대부분은 이 우물 속에 있으리라.’ 톰슨은
데 란다 주교가 쓴 글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일곱살 먹은 슐리만이 ‘그림으로 보는 세계사’를 읽고 그리스 영웅들의 전설을 가슴에 품었다가
트로이를 발굴했듯이,톰슨도 성스러운 우물을 발굴해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결심했다.
톰슨은 피라미드 위에서 성스러운 우물로
가는 길을 발견하자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학회에서 우물 밑바닥을 탐색하겠다며 자금을 요청하자 참석자들은 모두 그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다.
“자살하고 싶다면 그런 끔찍한 방법 말고도 얼마든지 있는데.”
어쨌든 돈은 모아졌다. 톰슨은 보스턴으로 가서
잠수훈련을 받고,흙 퍼낼 굴삭기를 마련해서 치첸 이차로 돌아갔다. 우물의 지름은 가장 넓은 곳이 70m,깊이는 25m나 되었다. 말이
우물이지,사실은 가파른 석회암 낭떠러지로 둘러싸인 연못이었다. 톰슨은 먼저 사람만한 통나무를 줄에 매어 던져보았다. 처녀들이 못가에서 얼마나
멀리 던져질 수 있는지 알고 나자 곧 준설기를 아래로 드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준설기의 강철통은 끈적끈적한 뻘흙을 수레 한 대를
채울 만큼 판자 위에 쏟아놓았다. 물론 거기에는 유물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준설기는 날마다 쓰레기와 진흙을 퍼올렸다. 태양은 숨막힐
듯이 뜨거웠고,썩는 냄새는 진저리가 쳐질 만큼 고약했다. 날이면 날마다 썩은 흙만 쌓여가자 톰슨은 애가 닳았다. 이런 식으로 끝난다면,자기는
전설이 헛되다는 것이나 증명한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 뻔했다.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던 어느 날,마침내 승리의 순간이
다가왔다.
어느 날 톰슨은 퍼올린 진흙더미를 뒤지다가 담황색 수지덩어리 같은 것을 보았다. 그는 냄새를 맡고,혀끝으로 맛까지
보았다. 언뜻 스쳐가는 생각이 있어 그것을 불 위에 놓자,정신을 잃을 만큼 강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마야인들이 인신 공양을 할 때 쓰던
향이었다. 그 날 톰슨은 몇 주일 만에 길고도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전설이란 근거 없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준설기가 갖가지 장신구·항아리·돌칼·작살촉·비취·접시 들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이윽고 유물이 꽤 많이 나온 뒤,톰슨이 나섰다. 준설기의
집게가 파고들 수 없는 틈새나 구석을 사람이 뒤질 차례였다. 그가 잠수복으로 갈아입자 인디오들이 다가와 슬픈 얼굴로 악수를 청했다. 그들은
당연히 톰슨이 살아 나오지 못하리라고 여겼다. 물속은 3m도 들어가지 않아서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냄새 나고 끈적끈적한 썩은 물에서 플래시는
쓸모가 없었다. 바로 옆사람도 보이지 않는 그 걸쭉한 ‘수프’ 속에서 톰슨과 그리스인 잠수부는 물 밑바닥을 장님처럼 더듬었다.
어느
날 우물 바닥에서 좁은 틈새를 손가락으로 후비고 있는 톰슨을 부드러우면서도 미끈거리는 것이 묵직하게 밀어붙였다. 톰슨은 소스라쳤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어 그 물체를 힘껏 떠밀었다. 그것은 통나무였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는데,거기에는 실수해 빠진 도마뱀
따위를 빼고는 큰 뱀이나,원주민이 믿는 용은 물론 살아 있는 것이 없었다. 건져낸 것 중에 사람 두개골이 많이 있었다. 모두 여자였다. 전설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 기록이었다. 어느 날 톰슨은 딱 하나 남자 두개골을 건졌다. 노인 뼈였다. 톰슨의 눈앞에 그 옛날 우물가에서
몸부림치던 처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녀가 자신을 던지려는 제관을 끌어안고 연못에 뛰어든 것이 아닐까?
몇 달이나 걸린
준설과 잠수가 끝났다. 톰슨이 얻은 유물은 갖가지 옥(玉)과 부싯돌·돌창·옷감·금접시·수지향덩어리와,금이나 구리로 만든 방울 따위 자질구레한
물건들이었다. 그것들에는 빠짐없이 상징적인 기호와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톰슨은 1935년에 죽었는데,유카탄에서 영사로 지내던
24년 동안 그는 사무실을 떠나 거의 밀림에서 살았다. 그는 인디오 오두막에서 인디오 음식을 먹고 인디오 말을 쓰고 살면서,유적을 발굴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성스러운 우물에서 소망한 것을 이루었지만,그것을 위해 치른 대가는 매우 컸다. 썩은 물에서
잠수하느라 한쪽 다리를 못쓰게 되었고 청력을 잃은 데다,멕시코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던 것이다. 톰슨이 진흙탕에서 금을 건져냈다는 소문이
퍼지자,멕시코 정부가 국보를 훔쳤다고 그를 고소하고 어마어마한 보상금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가 가진 모든 기물을 압수하겠다고 통고했다.
억울했지만,일단 닥쳐오는 위험은 피해야 했다. 그는 체포의 손길을 피해 재빨리 유카탄에서 빠져 나왔다. 그는 절반쯤 지어진 범선을 빌려 허겁지겁
바다로 탈출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그의 일행은 26명이었는데 그가 배에 실은 식량은 11명분밖에 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항해 도구를
하나도 싣지 못한 채 바다로 나섰다. 13일 동안 카리브해를 떠돌며 말할 수 없이 고생한 끝에 톰슨 일행은 쿠바에 도착했다. 그 뒤로 그는
멕시코 땅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톰슨의 후반부 인생은 이처럼 기구했지만,마야 발굴사를 말할 때 그의 이름은 언제나 맨
앞에 놓인다. 학자들은 그 까닭을 이렇게 말한다. “톰슨이 건진 유물은 그렇게 값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거기에 새겨진 기호와 그림은 고고학적
가치가 높다. 또 금붙이는 아주 많은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게다가 그는 목숨을 걸고 썩은 물에 들어가 전설을 역사로 바꾸지 않았는가.”
그렇다. 톰슨이 건진 금붙이들은 희귀한 가치를 지녔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금을 노리고 인디오를 약탈했으므로,아무리 정교한 장신구나 아름다운
그릇이라고 해도 운반하기 쉽도록 녹여서 금괴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마야인의 생활을 알 만한 금세공품은 거의 없었는데,톰슨이 진흙 펄에서 잘
보존된 금세공품들을 건져낸 것이다. 톰슨이 인양한 금붙이는 대부분 순금이 아니라 합금이었다. 그것은 세공 기술자들이 상당한 야금술을 지니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게다가 합금 재료들은 거의가 수입품이었다. 마야가 밀림 속에 도시를 세우고 고립돼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대륙에 걸쳐 무역을
하며 번성했다는 결정적 증거였다.
일생을 마야 문명을 발굴하는 데 바친 톰슨은 이렇게 말했다. “마야 문명의 자취는 역사라기보다
차라리 신비한 전설에 가깝다.” 마야 문명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마야인들은 유럽과 아시아로부터 뚝 떨어진 대륙에서 어떻게 혼자 힘으로 그런
훌륭한 문명을 이루었을까? 건조한 땅,사람이 살기 힘든 밀림에 도시를 세운 까닭은? 왜 힘들여 세운 도시를 하루아침에 버리고 떠나곤 했을까?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마야 문명은 수수께끼 투성이다.
데이비드 스튜어트
아메리카 대륙에 번성했던 세 왕국 마야,아스테카,잉카는 건축물이나 종교 의식은
비슷했지만 말은 서로 달랐다. 또 잉카는 글자가 없었고(끈을 엮어 제한적으로 의사 소통을 한 결승문자가 있었다),아스테카는 글자가 있었어도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는데,마야는 문법을 갖춘 그림문자로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러나 오늘날 남은 것은 거의 돌에 새겨진 것들뿐이다.
1562년 데 란다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미신과 악마의 희롱으로 가득 찬 마야의 책들을 보는 대로 불태웠다. 그럴 때 인디오들이
슬퍼하는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복잡한 그림이 그림이 아니라 글자라고 알려진 때는 1958년이 되어서였다. 독일인 발린이 어떤
건축물에나 옛 도시 이름이 새겨져 있음을 알아보았다. 1960년에는 미국인 프로스코리아코프가 출생,즉위,혼인,사망 따위 글을 풀음으로써,그것이
역사 기록임을 밝혔다.
같은 해 미국의 데이비드 켈리는 데 란다가 쓴 알파벳 대조표에서 힌트를 얻어 마야 문자가 문법체계를
갖추었음을 알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이집트 상형문자를 푼 프랑수아 샹폴리옹에 견줄 만한 천재 소년 데이비드 스튜어트가 나타났다.
스튜어트가 마야 문자에 끌린 때는 1975년 아홉 살 때로,유카탄 지역 조사 단원이던 아버지를 따라가 코판에 머무를 때였다. 어느
날 소년은 아버지 조수 린다 셀을 따라 팔렌케에 갔다. 셀이 ‘어린 아이’를 따돌리고 자기 일을 보고 싶어 마야의 돌조각이 그려진 그림 한 장을
숙제로 내주자,아이는 얼마 안 있어 “683년에 스네이크 재규어 왕이 즉위했다”라고 해독해 그녀를 놀라게 했다.
스튜어트는 열두 살
때 첫 논문을 발표했고,열여섯 살에 여덟 나라 말을 마스터했다. 1985년 프린스턴 대학에 들어간 뒤로는 당당히 세계적인 학자의 대열에 들어
연구해 오고 있다.
흔히 전세계 상형문자 중 마야 문자가 제일 까다롭다고 말한다. 뜻을 나타내는 중심 기호와 그것을 보완하는 기호가
함께 조립되어 있는데,같은 글자라도 다른 뜻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 마치 ‘can’에 ‘깡통’과 ‘가능’ 두 가지 뜻이 있듯이. ‘깡통’인지
‘가능’인지는 보완 기호가 알려 주지만,거기에 일정한 규칙이 없다. 스튜어트의 말.
“마야 문자는 1,000 가지가 넘는 데다
모양은 다른데 뜻은 같은 문자가 많다. 코판에는 스모킹 재규어 왕의 이름을 나타낸 글자가 20개 있는데 모두 다르다.” 그래도 스튜어트 같은
천재들 덕분에 오늘날 마야 문자는 75% 가량 해독되었다.
마야 문명 지역
마야 문화가 번성한 지방은 3개 지역으로 구분되나, 그 중심을 이룬 것은
과테말라 북부의 페텐지방으로부터, 서쪽은 멕시코의 타바스코, 동쪽은 벨리즈지방에 이르는 중앙지역이다. 여기에 유카탄반도의 북부지방 및
과테말라고지, 차파스지방으로부터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남부지방 등 2개 지역이 포함된다. 언어연대학적 연구에 따르면 마야어족의 조상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작은 부족으로서, 이들이 남진해서 BC 3000년대 중반에 서부 과테말라 고지에 정착한것이라 한다. 그후 1000년 사이에 이 부족이
두 어족으로 갈라져 하나는 북서로 진 출하여 멕시코만 연안의 아스테크어족을 형성하였고, 다른 하나는 북 쪽으로 나아가 페텐저지에서 유카탄지방에
이르러 유카테크어족이 되 었다. 다시 BC 1000년대 전반에 마야어족의 모체로부터 촐 및 촌탈 등 두 어족이 갈라져 나오서 중앙지방의 저지에
들어가 북부의 유카 테크어족과 접촉하였다.
초기는 연대 미상의 시대로부터 기원후 374년까지이다. 제일 오래된 도시는
우아작툰(uaxactun)으로 보이는데, 오늘의 과테말라의 북쪽 국경지대에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테 티칼(Tikal)과
나란조 (Naranjo)가 탄생했었다. 한편 오늘날의 혼튜라스에 코판시가 세워졌고, 그 후 우스마쓰타 (Usmacinta)강변에 피에드라스
네그라스(Piedras Ne′gras)가 생겼다.
중기는 서기 374년 부터 472년까지 약 100년간의 이 시기에 팔렌케
(Palenque) 그리고 멘체(Mencke′)가 치아파스 지역에 세워졌고 끝으 로 과테말라 지역에 퀴리구아(quirigua)가 세워졌다.
융성기는 서기 472년부터 610년까지, 세이발, 익스쿤, 프로렌스, 벤케 비에조 등 여러도시가 세워졌다. 이 융성기의 마지막에
엑소더스가일 어난다. 구제국의 도시들이 있었던 이상의 지역을 지도판 위에서 관찰하면 우 아작툰, 판렌케, 코판을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형이
그려짐을 보게 된 다. 그리고 이 삼각형의 바로 바깥이나 그 안쪽에 티칼, 나란조, 피에 드라스 네그라스가 있음을 본다. 마지막으로 세워졌으며
가장 단명했 던 제 도시들, 즉 세이발, 익스쿤, 플로레스는(비에로, 베케를 제외한) 삼각형 한 가운데 놓여있다.
마야 문명의 수학과 천문학
마야 문명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수학과 천문학이다. 그들은 0 개념을
알았으며,20진법을 썼고,막대기와 점 모양으로 숫자를 나타냈다. 이렇듯 뛰어난 수학 실력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천문학을
발전시켰다.
마야인의 태양력에서 1년은 365.2420일,오늘날의 365.2422일과 비교해 오차가 거의 없다. 달의 운행은
29.5320일,금성의 주기는 580일로 계산했는데,지금과 비교해 오차가 겨우 0.00039일(달)과 0.08일(금성)이다. 마야의 복잡한
역법(曆法)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마야의 달력은 서로 다른 날짜를 나타내는 그림 문자(그림 숫자) 20개로
되어 있다(그림의 왼쪽 바깥 원). 이것들은 다시 1에서 13까지의 숫자 기호(그림의 안쪽 원)와 조합되어 모두 260일을 만들어 낸다. 이것을
트졸킨이라 하는데,진짜 역년(曆年)과 구별되는 신성한 역년이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른 진짜 역년은 1년이 18개월로 이루어져 있고(그림의 오른쪽
큰 원의 일부),이것들은 한 달이 20일씩으로 되어 있어 모두 360일이다. 여기에 닷새밖에 없는 19번째 달이 덧붙어서 1년은 365일이
된다. 이 역년을 하아브라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의 60갑자(六十甲子)가 10천간(十天干)과 12지지(十二地支)가 맞물려 갑자·을축 등 60개로
조합되듯 트졸킨과 하아브가 서로 같이 출발해 똑같이 맞아떨어지는 데 필요한 날은 (260과 365의 최소공배수를 계산하면) 18,980일이다.
이것을 365일로 나누면 52년이 된다. 바로 이 52라는 숫자가 마야인들의 의식과 일상을 지배했다. 그들은 세상이 52년마다 한 번씩 끝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멕시코 땅에서는 52년마다 기존 피라미드 옆에 새 피라미드를 세웠고,유카탄 반도에서는 52년째 되는 날 살던 도시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새 도시를 세웠다.
마야의 모든 장식이나 조각들은 반드시 어떤 날짜와 관계가 있다. 어떤 건축물이든지 그 이마에는
생년월일을 복잡하게 써놓았으며, 일상 생활도 역법과 숫자의 신비에 따랐다. 그들은 그 엄청난 피라미드와 건축물들을 생활이나 예술을 위해서가
아니라 역법의 지시에 따라 정해진 날에 세웠다. 마야인들은 5년,10년,또는 20년마다 합당한 생일 날짜를 지닌 건축물을 세웠다. 가끔 피라미드
옆에 새로운 윤일(閏日)을 기억하려고 그때마다 피라미드를 세우기도 했다. 마야인들은 신관의 지시에 따라 어느 날 모든 건축활동을 딱 멈추고 한
사람 남김없이 도시를 버리고 떠나기도 했다. 수만명이 400㎞가 넘게 밀림 속을 이동해 다른 곳에 터를 잡고,신관들이 시키는 날부터 새 도시
건설을 시작했다. 가장 뛰어났던 문명인들이 가장 어리석은 미신에 사로잡혀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진 것이 바로 마야인이었다. 이 복잡한 역법과 건축
설계술은 신관들만이 알았다. 그들은 일식과 월식 따위를 예언해 평민들로부터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오로지 천체를 관측하고 역법을
계산하면서 시간의 비밀을 풀고 그 해의 길흉을 점치면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렸다.
신관들은 또 노예나 평민을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산 사람의 가슴을 돌칼로 가르고 뜨거운 심장을 꺼내어 신에게 바치는 잔인한 의식이었다. 신관들은 사람 제물을 많이 구하려고 포로를 잡기
위한 전쟁을 자주 부추겼다. 마야의 전쟁기록에는 어떤 사람을 얼마나 잡았다는 기록만 있을 뿐 어떤 도시나 땅을 빼앗았다는 기록은 아무 데도
없다.
마야 문명의 또 한 가지 약점은 잉카와 마찬가지로 쇠붙이를 쓸 줄 몰랐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복잡한 그림문자를 돌에 조각할
때 돌칼을 썼다. 그뿐이랴. 짐수레가 없었으며,심지어 밭을 가는 쟁기와 가축도 없었다. 그런데도 맨손으로 돌을 날라 밀림 속에 피라미드를 쌓고
도시를 건설했으니 노예와 평민의 고통이 어떠했을까.
이집트 문명과 관계
중앙아메리카(아스테카·마야)와 남아메리카(잉카) 대륙에 세워진 피라미드는
혹시 이집트 문명과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세계적인 탐험가 소르 헤위에르달은 잉카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 서로 닮은 점이 많은 까닭을 밝히려고
1970년 고대 이집트에서 쓰였던 갈대배를 옛날 방식으로 만들어 대서양을 건넜다.
고대 이집트와 잉카 사람이 탄 갈대배는 재료와
모양이 같았다. 두 민족은 거대한 신전과 피라미드를 세워 태양신을 섬겼다. 죽은 사람을 미라로 만들고,뇌를 수술할 줄도 알았다. 왕족이 집안끼리
혼인하는 풍습도 두 문명이 똑같았다. 헤이에르달은 남아메리카 문명이 이집트에서 건너왔다는 가설을 세우고,이를 증명하려고 옛 갈대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보인 것이다. 그러나 아메리카 문명의 독자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은,멕시코와 이집트 피라미드의 유사성은 겉모습뿐이라고 주장한다.
피라미드를 세운 목적만 보아도 양쪽은 너무 달랐다. 이집트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시신을 둔 방 주변에 돌을 쌓아올려 만든 거대한 ‘무덤’이다.
반면 멕시코의 피라미드는 밀림 위로 솟은 사원을 지탱하고,그 사원에 위풍당당한 규모와 높이를 제공하기 위해 지은 계단식
‘구조물’이다.
기능이 다르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다. 실제로 멕시코에 있는 피라미드 가운데 어느 것에서도 무덤으로 쓰인 자취가
발견된 적은 없었다. 가끔 피라미드 내부에서 작은 방이 발견되기도 했지만,다 비어 있었으므로 무덤으로 쓰였다고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1949년 멕시코인 고고학자 알베르토 루츠가 피라미드 내부에서 비어 있지 않은 작은 방을 발견함으로써 ‘기능 차이론’은 설득력을 잃고 말았다.
루츠는 팔렌케에서 사원을 발굴할 때 그냥 언덕처럼 보이는 곳을 파들어갔다. 한참을 파내고서야 그는 그곳이 8층 피라미드라는 사실을 알았다.
꼭대기 단 위에 세워진 사원 안에는 계단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다. 마흔다섯 계단을 내려가자 약간 넓은 곳이 나타났다. 스물한 계단을 더
내려가니 벽으로 가로막힌 수평 통로가 나타났다. 장애물을 제거하자 널찍한 장소에 주전자·옥세공품·진주들이 바닥에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시신과 함께 넣은 부장품이다!’ 루츠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 물건들은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나온 부장품들과 아주
흡사했다. 그의 짐작은 맞았다. 곧이어 예닐곱 사람의 유골이 나타났다. ‘순장된 사람들이다!’ 뒤쪽으로 뚫린 방으로 들어가 보니 가운데에
제단으로 보이는 석조물이 있었다. 석판을 들어내자 안에 50세쯤 된 남자의 유골이 놓여 있었다. 옥 장신구,마야 상형문자가 새겨진
귀고리,왕관,비취 가면,구슬 목걸이,열 손가락마다 끼워진 반지. 거기에 두개골 양쪽에 놓인 거대한 진주. 루츠는 마야 왕의 시신 앞에 서
있었다.
마야와 이집트의 유사성이 발견된 사례는 또 있다. 1947년 미국의 영화 제작팀이 ‘마야의 역사’라는 영화를 찍으러
치아파스의 보남파크를 찾았다. 그곳에서 머무르며 영화를 찍는 동안 길레스 힐리는 원주민의 호감을 사서,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채색된 벽화’를
보았다.
신이나 종교적 대상을 그린 종전의 마야 벽화와 달리 채색 물감으로 칠해진 벽화는 고대 마야인들의 일상 생활을 묘사한
것이었다. 그것은 고고학자들에게 그들이 몰랐던 것을 많이 일깨워 주었다.
어떤 서열에 의해 배치된 것이 분명한 다양한 인물들.
종교적 의미에 따라 결정되었을 다양한 의상,의미를 알 수 없는 상형문자들. 모든 것이 수수께끼였지만,그 중에서도 특별히 한 가지가 눈길을
끌었다. 놀라우리만치 이집트를 연상케 하는 그림의 형식이 그것이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가로로 배치되어 있었고,그들의 머리와 발은
완전한 옆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마야인들이 자기네가 살던 도시를 하루아침에 버리고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데 대해 학자들은 저마다
다른 의견을 내세운다. 강제 노동에 견디다 못한 평민의 반란,다른 민족의 침입,천재지변 등등. 그러나 그것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들의
도시에는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난 흔적이 없으며,마야를 정복할 만한 민족도 주변에 없었다.
마야 문명의 멸망
마야인들이 자기네가 살던 도시를 하루아침에 버리고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데
대해 학자들은 저마다 다른 의견을 내세운다. 강제 노동에 견디다 못한 평민의 반란,다른 민족의 침입,천재지변 등등. 그러나 그것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들의 도시에는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난 흔적이 없으며,마야를 정복할 만한 민족도 주변에 없었다.
가장 설득력 있는
말은,미국인 실바너스 모를리가 주장한 대로 화전(火田) 탓이 아닐까. 마야인들은 끝을 뾰족하게 한 막대기로 땅을 내리찍어 구멍을 낸 다음 거기에
옥수수씨를 몇 알씩 뿌려 농사를 짓는다. 오늘날의 마야인들도 여전히 그렇게 한다. 땅을 불태워 농사를 지으면,그 땅의 지력이 되살아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도시 주변의 밀림을 모두 일궈 먹은 마야인들이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곳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들은 화전을 일구려고 밀림에 터를 잡았고,그 때문에 밀림 속을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했다(그러나 이 주장도 1972년 계단식 논의 자취가
발견되고,낮은 늪지대에서 흙을 돋워 농토를 만든 증거가 몇 군데에서 드러남으로써 절대적인 설득력을 잃었다).
오늘날 마야의 문자와
유적은 80%쯤 밝혀졌다고 한다. 밀림과 땅속에 숨어 있는 이 문명의 신비가 모두 모습을 드러내는 날 우리는 얼마나 더 놀라게 될까? 이집트나
로마 문명에 대해 아는 것만큼 마야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될 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