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생애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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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생애와 작품


2018. 2. 19.

Leopold Mozart

풀네임은 요한 게오르크 레오폴트 모차르트(Johann Georg Leopold Mozart). 1719년 11월 14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출생, 1787년 5월 28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사망.


독일의 음악가,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 음악교육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아버지로 유명하지만 그 자신도 자수성가한 대단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제본공 요한 게오르크 모차르트(1679~1736), 어머니는 그의 2번째 아내 안나 마리아 줄처(1696~1766)로 모두 음악과는 별로 상관이 없었기 때문. 레오폴트 자신은 어렸을 때 성당에서 성가대 활동을 했는데 음악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건 대략 그때 쯤으로 보인다.

부모님은 레오폴트를 가톨릭 사제로 키우고 싶어하여 예수회 계열의 김나지움에 보내고, 일단 거기서는 괜찮은 성적으로 졸업했다. 레오폴트는 역시 같은 예수회 계열의 리세움(Lyceum)에 진학했는데 1년도 안 돼서 때려치고, 1737년 잘츠부르크 대학에 진학하여 철학과 법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1738년 철학 학사 학위를 따긴 했는데, 그 다음 해에는 자연과학 수업에 자주 결석했다며 퇴학당했다.

사실 애초에 부모님이 신부가 되라며 보낸 학교인데 멋대로 중간에 나와버리고 몰래 법학과 철학을 배운 것이기 때문에,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와 연결된 후원자들의 도움이 다 끊겨버렸다. 레오폴트는 별 수 없이 잘츠부르크의 명문귀족 요한 밥티스트 투른 발사시나 탁시스 백작가의 시종으로 들어가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작곡은 그 때부터 시작했고, 1743년에는 무보수로 궁정악단 제4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으며 잘츠부르크 성당에서 소년 합창단원들에게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가르쳤다. 1747년 안나 마리아 페르틀(Anna Maria Pertl, 1720년~1778년)을 만나 결혼하고, 1758년에는 제2바이올리니스트로 진급, 1763년에는 궁정악장이 되어 죽을 때까지 쭉 그 자리였다.

안나 마리아 페르틀 사이에서는 3남 4녀, 총 7명의 아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 중 5명은 이름도 없이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살아남은 아이는 셋째 딸 마리아 안나 발부르가 이그나티아 모차르트(Maria Anna Walburga Ignatia Mozart, 1751~1829, 통칭 나네를)와 셋째 아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명 뿐이다.

레오폴트가 어떻게 음악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는지, 정말 순수하게 음악가로서 높은 자리에까지 올랐는지 상세하게 기록된 자료는 없는 듯하다. 작곡 실력도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던 듯. 그러나 적어도 음악학자, 교육자로서의 자질이 뛰어났고 나름대로 사람의 기분을 맞추는 수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재능을 발견한 뒤 어린 아들을 데리고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모든 뒷바라지를 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또한 볼프강이 태어난 1756년에는 《바이올린 연주법(Versuch einer grundlichen Violinschule)》이라는 바이올린 교습서를 펴내는데, 이건 그냥 일반적인 바이올린 교습서가 아니라 거의 최초의 바이올린 교습서이며, 18세기 음악 이론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음악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이 책은 수십 년동안 바이올린 교습서의 지존 자리를 지켰고, 현대에도 추천할 만한 바이올린 지도서로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 책은 2010년 한국에도 번역돼 나왔다.

나네를이 아버지에게 음악 레슨을 받는 것을 보고 볼프강이 음악에 눈을 뜨기 시작하자, 그 뒤로는 딸 나네를, 아들 볼프강을 데리고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마리아 테레지아나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등을 비롯한 각계의 인사들을 알현하다, 그들이 장성한 뒤 제자리로 돌아와 악장 일에 충실했다. 1772년 잘츠부르크 대주교가 히에로니무스 폰 콜로라도 백작으로 바뀌자 이상하게 아들 볼프강이 문제를 일으켰다.


이 때는 볼프강도 아버지와 함께 궁정 연주자였는데, 볼프강은 하루빨리 잘츠부르크를 떠나고 싶어 안달이었고, 레오폴트는 그런 아들과 대주교를 중재하느라 너무나 힘들었다. 기어코 볼프강이 잘츠부르크 말고 다른 직장을 알아보기 위해 떠나려 하자, 레오폴트는 아들과 동행하기 위해 휴직계를 내려 했지만 "넌 그 동시에 해고"라는 통보를 받고 물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때는 볼프강이 어머니 안나 마리아와 함께 갔고, 안나 마리아는 파리에서 객사했다. 그리고 1781년, 볼프강은 기어이 대주교와 담판을 짓고 잘츠부르크를 나가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한다. 게다가 1782년, 아들 볼프강은 또 레오폴트의 결사반대를 뿌리치고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한다. 레오폴트는 집안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콘스탄체를 꼴도 보기 싫어했고 결혼식에도 당연히 참석하지 않았다. 다만 이로 인해 부자가 완전히 절연한 것은 아니었고 음악과 관련해서는 계속 서신을 주고 받았다. 

이처럼 볼프강은 취직문제부터 시작해서 결혼문제까지 아빠 말을 듣지 않았으며, 레오폴트는 기껏 키워놨더니 삐딱선만 타는 아들에 대한 걱정을 끌어안고 1787년 세상을 떠났다. 이 부분은 2017년 2월 14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그나마 말년의 레오폴트는 딸 난네를이 32살의 늦은 나이로 결혼해서 낳은 아들을 엄청나게 좋아했으며 죽을 때까지 이 외손자를 키우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레오폴트가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에 빈에 있는 볼프강은 너무 멀어 시간에 못 맞춘다는 이유로 참석하지 못했으며, 그 뒤로 누나 나네를과도 영영 만나지 못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묘는 잘츠부르크에 집안 사람 네 명, 곧 며느리 콘스탄체 베버와 그녀의 이모 제노베파 베버, 나네를의 딸 자네테 베르톨트 폰 존넨부르크, 장모 오이프로시나 페르틀과 함께 있다.

장난감 교향곡 (Kindersymphonie)
장난감 교향곡은 오랫동안 요제프 하이든이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악보 중에 이 곡을 사보한 자료가 있었고, 직접 연주한 적까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곡임이 밝혀졌다. 정확히는 장난감 교향곡 자체가 레오폴트의 곡은 아니고, 원제 《장난감 악기와 관현악을 위한 카사치오네 G장조》의 7악장 중 3개를 프란츠 요제프일 수도 있고 동생 미하엘일 수도 있는 하이든이 편곡한 것이다. 분명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1992년,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에드문트 앙게러 신부(Edmund Angerer, 1740년 5월 24일~1794년 8월 7일)가 작곡한 것으로 되어 있는 장난감 교향곡, '베르히톨즈가덴무지크(Berchtoldsgaden Musick)의 사보가 발견되었다. 사보한 사람은 같은 수도사제인 슈테판 팔루셀리(Stefan Paluselli)였으며, 시기는 1785년경. 게다가 이 수도원 근처에는 목제 장난감을 만드는 베르히테스가덴(Berchtesgaden)이 있었다. 타이틀로 봐도 이 장난감들을 위한 악보가 틀림 없었다.

물론 이 악보가 앙게러 신부가 교향곡을 작곡했다는 완전한 증거가 되지는 못한 듯 하지만, 여태까지 나왔던 작곡가 후보 중에서는 가장 유력하다. 다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직 이 교향곡이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곡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교향곡은 하이든의 악보대로 C장조로 연주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악보대로 G장조로 연주되는 경우도 있다. 에트문트 앙게러의 악보에 따르면 이 교향곡은 원래 C장조였다.

…진짜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곡으로 알려진 것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곡들은 다음과 같다.

▲ 사냥 교향곡 (Sinfonia da Caccia) G장조 1악장
▲ 트럼펫 협주곡 D장조
▲ 현악과 통주저음(basso continuo)을 위한 교향곡 B♭장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