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원이 자살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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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원이 자살한 이유


2017. 7. 1.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고국으로 왔다가 꿈을 접고 생을 마감한 비운의 발라더.

1990년대 선풍적인 발라드 열풍을 일으킨 재미교포 출신 가수. 유명 뮤지션 오태호가 작사/작곡한 1집의 타이틀곡 또 다른 시작으로 데뷔한 뒤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며 발라드계의 강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서울 용산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살며 코헹가 중학교, 존버로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4년 12월 가수의 꿈을 안고 대한민국에 돌아와 데뷔하게 된다. 1집 앨범을 발표하자마자 수많은 소녀팬들을 확보하고 단숨에 인기 스타로 떠올랐다.

184cm의 훤칠한 키에 예쁘장한 얼굴을 소유했던 미소년. 특유의 미성과 가창력, 감성이 넘치는 표현력을 갖추었으나, 불투명한 미래와 주위 사람들의 지나친 기대,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획사에서의 횡포와 지나친 혹사에 절망감을 느낀 나머지 2집 발표를 앞둔 1996년 1월 1일 1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사실상 기획사에서 죽인 거나 다름없다는 것이 팬들과 유족들의 의견이다.



타고난 음성이 맑고 고와서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 전까지 KBS의 합창단원으로 활동했었다. 미국에서도 Angels 합창단에서 활동하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으며, 첼로와 피아노, 바이올린 연주도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배워 수준급이었다고. 큰 키와 작은 얼굴, 날렵한 몸 덕분에 Bean X Model Agnecy 소속 (1990) Milo Print 패션모델로도 활동한 경력이 있다.
그러다가 그가 18살 되던 해,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 방송국과 신문사, 음반사가 주최한 신인가수 발굴 오디션에서 1,000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발탁되었다. 

가수의 꿈을 위해 이미 특례합격되어 있었던 버클리대 심리학과 입학과 미국 시민권도 포기하고서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그는 그로부터 오랜 준비를 거친 끝에 1994년 12월 첫 음반의 타이틀곡 '또다른 시작'으로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당시로선 보기 드문 10대 가수인데다 모성애를 자극하는 귀여운 얼굴과 큰 키, 그리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단숨에 큰 인기를 얻고, 적극적이고 활발한 성격으로 아직 데뷔한지 1년도 안 되었을 때 벌써 주말 예능쇼의 MC 자리에 오르기도 하면서 수많은 팬들을 확보했으나.......

그가 2집 앨범 발표를 앞두고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2집은 그의 유작이 되어 버렸고, 정재형이 작곡한 타이틀곡인 '내 눈물 모아'는 지상파 3사에서 1위를 여러번 차지하면서 명곡으로 남게 되었으며 정작 1위의 주인공으로서 피날레 무대를 장식할 서지원은 안타깝게도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기에 그의 공연은 뮤직비디오로 대체되었다.

서지원의 소속사에서는 그 후 그의 유작이 된 2집을 포함해 3년 동안 총 3개의 앨범을 발표했다.


그의 죽음

1996년 1월 1일 신정 저녁, 한창 새해에 대한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있던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뉴스가 보도되었다. 큰 인기를 누리고 있던 아이돌 스타 서지원이 19살이라는 아까운 나이로 요절했다는 소식이며, 더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토록 밝고 활발하던 그의 죽음이 그가 스스로 선택한 자살이라는 것이다.

서지원은 세상을 떠나기 전날인 12월 31일 밤부터 새해가 밝아오던 다음 날 새벽까지 후배 가수지망생인 박모 군을 비롯한 친구들과 송년회를 가진 뒤 함께 자신의 숙소인 동작구 대방동의 아파트로 들어와 아침에 라면을 끓여먹고 자기 방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그날 저녁 8시가 다 되어서야 잠에서 깬 친구들이 서지원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침대에는 노란색 알약 1알이 있었고 평소 그가 복용하던 약병과 아래에 서술된 내용의 유서가 놓여 있었다. 

그 때가 하필이면 신정이었던 데다가 때 마침 집의 전화기는 고장난 상태라 앰뷸런스조차 부를 수 없는 상황이었고, 친구들은 급히 그를 업고 서울 중앙대부속 용산병원 응급실로 옮겼으나 그 날 저녁 9시에 그는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다.

참고로 약으로 쓰러진 환자는 절대로 함부로 옮기는 게 아니라고 한다. 그의 경우 부득이하게 후배가 업고 뛰었을 때 약이 기도를 더 막히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또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이 때 병원에서 의사들이 위 세척이라도 해줬다면 살 수 있었을 거라는 점. 그의 직접적인 사인은 약물과다 복용으로 알려져 있지만, 진짜 사인은 그가 삼킨 약의 일부가 기도로 넘어가 호흡 곤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의 위에서 신경 안정제 300알 분량의 약 성분이 검출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소화되기 전에 호흡 곤란을 일으킨 듯하다.

안 그래도 1995년 11월 20일에 듀스의 전 멤버 김성재가 세상을 떠난지 2개월이 지난 상황이었기에 그의 죽음은 더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은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을 때 그는 혼자 절망에 빠져 있었던 걸까. 그가 세상을 떠난 얼마 뒤에 김광석도 그의 뒤를 따랐다.


사후 만들어진 '내 눈물 모아'의 뮤직비디오에서 자살같은 건 절대 안 할것처럼 생전에 행복하게 웃던 그의 모습은 오히려 많은 이들을 더 가슴아프게 했다.

서지원의 가족들이 전부 미국에 있었기에 그의 시신은 친하게 지내던 보컬 트레이너 겸 가수였던 박선주가 대신 확인했다고 한다. 그의 빈소는 이홍렬, DJ DOC, 박선주 등을 포함한 동료 연예인들과 소녀 팬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으며 여러 기자들이 찾아와 그의 죽음과 빈소의 모습을 취재했다.

발인은 1996년 1월 5일 치러졌으며 장례 행렬의 맨 앞에서는 그와 절친했던 동료 연예인이자 친구인 강태석이 연신 눈물을 훔치며 영정사진을 들고 앞장서고 있었다.

고양시 벽제 화장터의 뜨거운 불 속에서 그는 한 줌의 재로 돌아갔으며, 3년 뒤 지리산 꼭대기의 노고단에 뿌려졌다. 스무 살, 이제 막 꽃피기 시작할 나이에 서지원이라는 청년은 본래의 이름 박병철로 돌아가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졌다.

유서

아래는 총 3장으로 이루어진 그의 친필 유서의 내용이며 '내 눈물 모아'의 뮤직비디오에서도 오버랩하듯 화면을 스쳐지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지금 이 모든 일을 한글로 적는 것은 아무래도 유서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누군가 이 글을 봤을 때 나를 이해하길 바래서이다. 내가 오랫동안 각오해 왔던 바이지만 드디어 용기를 내어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나는 그 동안 약을 복용해왔다. 그 이유는 안정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 세상은 내가 존재하기에 너무도 험한 곳이고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 것 같다. 2집 활동을 앞둔 나는 더 이상 자신도 없고... 활동 중 군대도 가야하고 내 가족들을 또 사무실 가족들을 책임지기엔 너무도 벅차다. 새해를 맞이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다. 

난 이제껏 진실하지 못했다. 하지만 몇 사람들에겐 정말 죄송하다. 
하나님, 부모님, 전무님, 실장님, 정형.승만.세진(이 셋은 동등하다.) 태석이 등등 너무 미안하다. 그들은 남은 인생을 나처럼 살지 않길 바란다. 내가 못 이룬 꿈을 내 동생들이 이루었으면 좋겠다. 난 항상 생각해 왔다. 무엇이 날 이렇게 초라하게 만드는지... 그 무엇보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못 이긴 것 같다. 연예인으로서, 또 한 사람으로서... 난 더 이상 힘이 없다. 차라리 미국에서 평범하게 공부나 했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세상에게 할 말은 뚜렷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냥 진실한 세상이었으면 한다. 내 마음을 모두 표현 못 하겠지만 나를 정말 지켜오고 나를 아는 사람은 날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아픔도 알 것이다. 

나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은 정말 없길 바란다. 
전무님은 내가 죽은 뒤에라도 PR을 잘해 2집이 많이 성공적이길 빈다. 

내가 이런 일을 저지를 것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겠지. 난 항상 밝게 살아왔으니까..죄송하다... 정말 죄송하다... 정말, 사랑하고 싶었는데...그러고 싶었는데... 전무님께 정말 죄송하구요 실장님께도 죄송하구요 다른 바램은 아무것도 없구요.... 우리 어머니 좀 잘 돌봐주세요. 

그리고 정현이 승만이 세진이는 정말 끝까지 책임져 주세요. 그리고 저 용서해주세요....그게 저의 마지막 바램이에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서지원은 자신의 무선호출기 사서함에 흐느껴 울며 자신의 팬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마지막 메세지를 남겼다. 목이 메인 듯한 울음소리로 "여러분, 사랑합니다...부디 그것만은 꼭 기억해주세요."라고 간신히 힘겹게 이어가던 그의 마지막 음성은 후에 그의 베스트 앨범에 삽입되어, 많은 팬들을 눈물 흘리게 했다. 한 인간이 삶을 끝내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있는 그대로의 진심이 담긴 메세지다. 

자살한 이유

흔히들 언론에서의 편파적인 보도로 인해 마치 그가 단순히 2집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자살한 유약한 청년으로 알고들 있는데, 이거야말로 서지원이 들었다간 하늘나라에서 펄펄 뛸 소리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원인은 세간에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암울했기 때문. 

그가 소속된 기획사에서 서지원은 유일하게 성공한 연예인이었으며, 자연스레 모든 직원들과 후배 연예인들의 기대는 그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실제로 그의 기획사 사람들 전체를 서지원 혼자서 먹여살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압박감은 곧바로 자신의 2집도 1집 앨범만큼 성공할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활동 당시에 기획사로부터 받은 대우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나이 어린 동생 운동화 한 켤레 못 사줘서 마음 아파했다는 게 그의 죽음 직후의 시사 프로그램에서 밝혀지기도 했다. 그 외에도 그가 모친에게 전화를 걸어 경제적인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었으며, 기획사에서는 모친에게 직접 전화로 대한민국에 와서 지원이 보약 좀 지어주시라고 했었던 적이 있다.

실제로 그가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매니져가 지갑에서 1~3만원 꺼내주는 정도였다고 한다. 이미 이 때 서지원이 엄청난 방송 프로그램과 광고 등에 출연했던 걸 보면 그 수익금이 결코 적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서지원이 지냈던 오피스텔의 전세금도 그가 기획사와 계약할 시에 받은 계약금의 대부분으로 충당된 것이었다는 걸로 볼 때 대충 그가 얼마나 부당한 대우와 부담감을 견디며 지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가 어렸을 적 일찍이 겪어야 했던 고통 역시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서지원과 그의 가족들은 원래는 미국에 있을 때 꽤 부유하게 살았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큰 백화점의 소유주였는데, 1992년에 일어난 LA 폭동 때문에 그 백화점이 불타버리면서 풍족하고 여유롭던 시간은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으며, 그의 가족들은 그 때부터 쭉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고.

후에 그의 첫 음반이 예상보다 훨씬 인기를 얻자 그는 만약 2집도 소포모어 징크스로 그만큼 뜨지 못하면 그 옛날 겪었던 '추락'의 악몽을 다시 겪어야 한다는 악몽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부모님마저 이혼한 상태라서 돌아갈 곳조차 없어진 상황이었으니, 그야말로 희망이라곤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던 것. 하다못해 기획사만 좀 잘 만났었더라면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전 문서에는 주영훈이 미국에서 자살한 어느 가수에 대해 언급했던 것에 관련지어 서지원이 그 가수인 것처럼 써 있었는데, 이건 조금만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애초에 서지원은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자살했다. 게다가 상식적으로 19살밖에 안 된 서지원이 그것도 한창 인기가도를 달리던 중에 뜬금없이 결혼할 여자를 데려왔다는 것 자체도 넌센스다. 때문에 이 둘은 동일인물일 수가 없다. 아마도 재미교포 출신이라는 점과 자살이라는 점 때문에 생긴 오해인 듯.

이처럼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 편파적인 보도를 쏟아냈던 것은 당시 언론들이 X세대 때리기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88만원 세대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들의 시궁창스런 현실을 집중 조명하며 젊은 세대를 동정하는 기사들을 쏟아내지만, 당시 언론에서 다루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사치를 일삼는 개념없는 존재들이었다. 이런 기성세대들의 시각을 꼬집기 위해 당시 신세대였던 015B가 '요즘 애들 버릇 없어'라는 노래를 만들었을 정도.

이런 식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프레임을 씌우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애꿎은 자식 죽이고 자살한 가장은 동정해도, 젊은이들의 자살은 동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의 시각에서 봤을 때 곱상한 외모를 지닌 서지원은 나약한 신세대의 전형적인 이미지였다. 서지원의 외모에 대한 반응은 세대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었기 때문에 그가 세상을 뜨자 그 밥맛 없게 생긴 애라고 반응하는 이들이 다수 있었을 정도. 


그러던 것이 몇년 후 故 이은주, 유니, 정다빈의 안타까운 죽음을 계기로 연예계의 고달픔과 우울증의 무서움이 집중 조명돼면서 시각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론이 개과천선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이 또한 정치적인 목적과 아예 무관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청년 실업 해결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정치인들이 늘어남과 동시에 젊은이들의 자살을 다루는 언론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는 젊은 세대의 고통을 강조하는 것이 상대 정당을 까기에 유리하고, 청년 유권자들의 표를 긁어모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서지원이 그렇게 영원히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열렬한 팬이었던 인천의 한 여중생은 그가 보고 싶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한 돈을 위해 무리하게 연예인들을 혹사시키는 연예계와 기획사들의 횡포에 비난이 쏟아졌다.

'내 눈물 모아'가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1996년 3월 30일 방송분에서 1위를 하던 날에는 그의 어머니가 먼저 떠나 간 아들을 대신해서 무대에 올라 상을 받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우리 지원이도 지금 보면서 정말 좋아할 거에요." 라는 수상 소감을 남겼고, 같이 1위 후보에 올랐던 그룹 DJ DOC는 투표 결과를 확인하기 직전에 "우리의 소중한 동생이자 동료 가수였던 지원이가 꼭 1위를 했으면 좋겠다."는 훈훈한 한 마디를 남겼다. '내 눈물 모아'는 당시 MBC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서도 1위에 올랐을 때 1위 발표를 확인하기 위해 무대위로 올라온 많은 동료 가수들이 서지원의 1위를 진심으로 염원하는 장면이 나와 가슴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한 추모 콘서트에는 3,000여 명의 관객이 몰려들었는데, 당시 서지원과 친하게 지냈던 베이시스의 정재형 역시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던 중 끝내 치솟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무대 위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서지원의 자살 직전 2집 녹음을 할 때 많이 혼냈던 게 너무나도 미안했다고.

하지만 이런 훈훈한 추모 분위기를 망쳐놓은 주범은 다름아닌 서지원이 속해있던 기획사의 추태였다고 한다. 서지원의 동생의 학자금을 비롯한 그의 추모 행사에 쓰기로 한 콘서트 수익금과 그 많은 앨범 판매 수익금은 당초 의도대로 전혀 쓰이지 않았기 때문.

아까운 청춘에 자신에게 얹힌 부당한 현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떠나간 청년이었다.


죽음에 대한 루머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사실 서지원이 사망 판정을 받았을 때 아직 숨진 게 아니었으며 나중에 시체를 안치한 병원의 영안실에서 깨어났다는 이야기였다. 이 때 그가 시신 안치함 안에서 나오기 위해 필사적으로 소리 지르고 발버둥쳤음에도 아무도 열어주지 않아 끝내 그 안에서 생을 마감했고, 나중에 누가 열어보니 문 안쪽에 손톱으로 긁은 자국과 얼굴에 눈물 자국이 있었다 카더라는 당연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일단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기획사 사람들과 병원 사람들이 며칠 동안 밤낮으로 거의 십분 간격으로 영안실을 들락거리면서 시신 확인을 했기 때문에 그가 정말로 일어났다면 곧 누군가 그걸 알았을 것이기 때문. 참고로 이런 루머로 인해 그의 시신은 한 차례 부검까지 받아야 했다. 행여라도 그런 소릴 들어도 그냥 비웃고 넘기자. 그야말로 이미 죽은 사람 두 번 죽이는 악성 루머다.

음악적인 평가

그의 노래 스타일의 강점은 남자로서는 보기 드물 정도의 맑고 고운 미성과 노래 전체의 분위기를 목소리로 표현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는 것. 실제로 아무 생각없이 그의 노래를 들었다가 그 분위기에 동화되어 우울해지거나, 팬도 아닌데 눈물이 흐르더라는 등의 경험담은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아주 가끔 노래 중간에 가성을 쓴 것이 지적되기도 하는데, 노래방에서 노래해본 남자들이라면 가성을 잘 내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것이다. 보통 가성을 낼 때 성대를 쥐어 짜서 찢어질 듯한 소리를 내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고문이자 테러에 가깝다. JTBC 투유 프로젝트 슈가맨에서 정재형은 '내 눈물 모아'라는 곡을 녹음할 당시에 서지원이 가성을 내지 못하여 자신이 가성 부분을 대신 불렀다고 밝혔다.
이 가성이 고와지는 것은 타고난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가성을 위한 발성법을 따로 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한데, 실제로 서지원의 곡을 들어보면 가성으로 넘어가는 부분에서도 음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편이다.


그와 함께 작업을 했던 작곡가 유영석은 "가수가 노래를 할 때 기교에만 신경을 쓰면 노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망치는데, 서지원 군은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를 한 호흡으로 마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라는 평을 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가수로서도 기본 발성력이 탁월했다는 것. 그냥 단순한 아이돌 가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노래 부르는 것말고도 원래 글쓰는 걸 좋아해서 자기 노래의 가사를 직접 제작했다. '이별만은 아름답도록', '잊을 수 있겠니' 등의 가사도 그의 작품. 그가 작곡한 노래로는 '사랑의 기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