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풍미한 액션배우 이소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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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풍미한 액션배우 이소룡

이소룡은 중국계 미국인 영화배우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으며, 중국인 아버지인 유명 경극배우 이해천(李海泉)과 중국계+독일계 혼혈인 어머니인 하애유(何愛瑜)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하애유가 홍콩의 4대 명문 가족 중 하나인 하동가족(何東家族)의 자손 중 하나라고 한다. 명문가의 자손인 셈.

아버지 덕분에 이소룡도 매우 이른 나이에 데뷔했는데, 갓난아기 시절부터 영화에 나왔을 정도였고 아역배우로도 꾸준히 활동했다. 예명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소해천이라 하려고 했는데, 아버지 친구가 길을 지나다가 길거리 경극 공연에서, "대룡이 소룡을 낳으니 곧 이어지는구나!"라는 대사를 듣고, 대룡이 이해천이라면 진번은 소룡이 어떻겠느냐고 권해서 지었다고 한다.



어릴 적에는 몸이 약해서, 7살 되던 무렵 신체 단련을 위해 태극권을 연마하는 것을 시작으로 무술에 입문하게 됐다. 이소룡의 아버지 이해천이 과거 홍가권(洪家拳)을 배웠던 영향도 있었다고 한다. 이소룡이 본격적으로 무술 수련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무술의 기본이 된 영춘권(詠春拳)을 엽문에게 배웠으며, 그 외 같은 남권계열로 광동성의 유명한 권법이었던 채리불권(蔡李佛拳)을 익혔다. 원래 남권 유파들은 예부터 가족처럼 각별하게 지내던 풍속이 있던 분위기라서, 영춘권과 가까웠던 채리불권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실제로 이소룡의 하단 공격기술들은 영춘권이 아니라 채리불권의 초식에 가깝다는 말도 있다.

다만 쿵후의 고수라는 그의 이미지와는 달리, 어렸을 때는 끈기가 없어 금방 싫증을 내곤 하여, 한 무술을 깊이, 오래 배운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하며, 그나마 오래한 무술은 영춘권 정도였다고 한다. 근시라서 접근전에 유용한 무술을 찾다보니 영춘권을 택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어릴 때는 TV 등에서 아역으로 얼굴을 알리기도 해서 인기도 있었지만 학교에서는 골목대장에 가까웠고, 중고등 시절에는 부모조차도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없는 불량아로, 매일같이 다른 학교 학생들과 패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당연히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춤에도 일가견이 있어 당시 유행하던 차차차 댄스 콘테스트에서 일등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싸움질은 더욱 심해졌고, 삼합회 간부의 아들과 싸움을 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집에 경찰이 찾아와서, “한 번만 더 당신 아들이 싸움을 벌인다면, 녀석을 감옥에 처넣을 겁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1959년 4월, 부모는 이소룡에게 단돈 100달러를 쥐어주고, 미국 샌 프란시스코에 사는 이해천의 누나, 이추봉(李秋鳳, Agnes Lee)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이소룡의 어머니는 이소룡의 아버지 이해천의 본처가 아닌, 첩 같은 것이었다가 이후 본처가 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그가 불량아가 된 것엔 이런 이유도 작용한 건 아닐까? 그리고 미국으로 보낸 것엔, 미국은 속지주의(屬地主義)이기에, 미국에서 태어난 이소룡은 미국 시민권이 있었던 점도 작용했다.

이후 샌 프란시스코에서 시애틀로 옮겨가 고등학교 과정을 계속했고, 그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이충침(李忠琛)의 아내가 운영하는 식당, Ruby Chow에서 일하면서 마음을 고쳐먹은 듯하다. 고교과정을 마치고, 1961년, 워싱턴 대학교 연극학과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이후 알려진 독서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는지, 철학, 심리학 서적을 파고들었다고 한다.


영춘권을 비교적 오래 수련했을 뿐, 다른 무술들은 금방 싫증을 내곤 했던 어릴 때와는 좀 다르게 좀 더 본격적으로 복싱, 유도, 사바트, 태권도, 가라테, 말레이시아 권법 등 여러 무술을 접해 나아갔다. 나쁘게 말하면 산만하고, 좋게 말하면 한 곳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그의 면이 특정 무술의 형태나 한계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의 신체특성이나 스타일에 맞는 프리 스타일 파이팅을 추구하는 배경이 되었다는 말도 있었고, 나중에 절권도의 이념이 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1959년부터, Jun Fan Gung Fu(振藩功夫)라는 이름을 내걸고, 무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인근 가필드 고등학교에 쿵푸[功夫]시범 차 갔는데, 그때 이 학교 여고생들 중 린다 C. 에머리(Linda C. Emery, 1945~)가 있었다. 그녀는 이소룡의 쿵푸 제자가 되었고, 교사가 되려고 이소룡과 같은 대학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1964년 8월 17일에 그와 결혼하면서, 졸업까지 몇 학점만 남겨둔 채로 대학을 그만두게 된다. 그리고 1988년, 탐 블리커와 재혼했다가 1990년에 이혼, 1991년에는 브루스 캐드웰(Bruce Cadwell)과 결혼, 지금까지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그녀의 이름은 린다 리 캐드웰(Linda Lee Cadwell)이다.

이소룡의 20대 초반 시절, 진번쿵푸의 주요 골격은 영춘권을 기반으로 채리불권, 홍가권 등등의 남권에 기반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의 다양한 무술에 비해 건설적인 변화와 발전이 부족했던 중국의 남파권법을 크게 개신(改新)한 인물이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들어 기존의 체계를 없애버리고 새로 절권도를 만들 때는, 펜싱과 복싱, 레슬링을 조합한 뼈대를 바탕으로 재탄생시켰다고 한다.

이소룡은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많은 영화에 얼굴을 내밀었었고, 대학에서 전공으로 연극을 택할 정도로 배우를 꿈꾸었다. 그러나 1959~1964년까지 열심히 노력했으나, 끼니를 걱정하게 될 정도로 난항을 거듭하여, 1964년에는 마침내 포기하고 무술에 전념하자고 결심하고, 자신의 무술을 홍보하려 인맥을 동원해 롱 비치 가라데 선수권대회에 시범자로 초청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의 무술시범을 본 윌리엄 도지어(William McElroy Dozier)가 1964년, 그의 기획 《Number One Son》의 배역에 오디션을 보게 해준다. 이는 불발되었으나, 밴 윌리엄스(Van Willams)와 함께 TV 시리즈, 《그린 호넷(The Green Hornet)》의 케이토(Kato, 加藤) 역 오디션을 볼 기회를 잡아 배역을 따낸다. 이는 1966~1967년까지 단 한 시즌만 방영되었을 정도로 반응이 신통찮았으나, 《배트맨》과의 크로스오버 에피소드에 몇 번 더 출연할 수 있었고, 이후 TV의 《아이언사이드(Ironside)》(1967), 《신부들이 온다(Here Come the Brides)》(1969), 《블론디(Blondie)》(1969)의 찬조출연(guest appearance)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당시 이소룡의 제자들 중 할리우드 각본가, 스털링 실리펀트(Stirling Silliphant)와 배우 제임스 코번(James Coburn)이 있었는데, 이 둘은 이소룡과 함께 1969년, 《소리 없는 피리(The Silent Flute)》 각본을 쓰고, 인도로 촬영지 답사를 가기도 했다. 이 각본은 무산됐지만, 1978년, 데이빗 캐러딘 주연의 《서클 오브 아이언(Circle of Iron)》에서 활용되었다. 1969년, 이소룡은 스털링이 각본에 참여한 덕에 《말로우(Marlowe)》에 얼굴을 내밀 수 있었다. 이소룡 팬들은 이를 이소룡의 흑역사로 평하기도 한다. 주인공 필립 말로우(제임스 가너 분)을 협박하기 위해 고용된 부하 역을 맡은 이소룡이 주인공을 상대로 깽판 치다가 결국 주인공의 꾐에 빠져 죽는다는 내용인데…

안습한 최후를 맞이하기 전 깽판 치는 장면에서, 영화감독은 이소룡의 재량에 맡겨 적당히 깽판을 부려달라고 주문했고, 이소룡은 앞차기로 전등을 부수는 등, 방 안에 있는 기물들을 온갖 몸놀림으로 박살내며 놀라울 정도로 그 역할을 수행해냈다. 이때 감독, 촬영 스탭, 배우들 등등 모두는, 듣도 보도 못한 방식으로 아스트랄하게 과격하게 때려 부수는 모습에 컬쳐쇼크를 받았다고 한다.


《Enter the office》

그리고 딘 마틴, 샤론 테이트 주연에, 척 노리스도 잠시 나오는 《The Wrecking Crew》에서, 실리펀트의 도움으로 무술지도를 맡을 수 있었고, 역시 실리펀트가 각본을 쓴 덕에, 잉그리드 버그먼, 안소니 퀸(Anthony Quinn) 주연의 《봄비 속을(A Walk in the Spring Rain)》(1970)의 격투장면 연출도 맡을 수 있었다. 1971년, TV 시리즈 《롱 스트리트(Long Street)》에서, 주연 마이크 롱스트리트(제임스 프랜시스커스 분)의 무술교사로 얼굴을 내밀었다. 제자인 실리펀트가 각본을 맡았기에, 이소룡은 자신의 무술철학을 일부나마 자신의 대사로 넣을 수 있었다.

이소룡이나 린다 리 캐드웰에 의하면, 1971년, 이소룡은 《전사(The Warrior)》라는 제목의 TV 시리즈를 구상했고, 이는 워너 브라더스도 확인해주었다고 한다. 이후 1971년 12월 9일, 《The Pierre Berton Show》에서 이소룡의 주장에 의하면, 파라마운트와 워너 브라더스는, 서구적인 부분이 결여되었으니, 그런 면을 더 넣어서 현대적으로 다듬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의 아내의 말에 의하면, 이소룡의 그 구상은 이후 다듬어져 《쿵푸(Kung-Fu)》로 개명되었지만, 워너 브라더스는 이소룡에게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워너 측의 말은 공식 입장은 이와 다른데, ‘그들이 우리 작품과 동일한 컨셉을 잠시 구상했기는 했지만, 우리 작품은 다른 각본가들과 제작자들, 즉 에드 스파일먼(Ed Spielman)과 하워드 프리들랜더(Howard Friedlander)에 의해 창작된 것이다’.


여러 증언들과 증거들을 검토해보면, 이소룡이 캐스팅되지 못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그가 동아시아인이라는 것도 있긴 했겠지만, 주된 원인은 그의 투박한 영어발음 때문이라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서부시대의 소림승 역할은 데이빗 캐러딘에게 돌아갔다는 것. 《The Pierre Berton Show》에서 이소룡은, 워너 브라더스의 입장을 이해한다며, 사업에서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으니, 자신은 그들을 탓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만약 미국인 스타가 홍콩으로 왔고 그가 제작비를 대는 입장이었다면, 그 역시 그런 걱정을 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렇듯 이소룡(李小龍)은 인맥을 동원하고 각본을 쓰는 등 여러 가지로 애썼지만, 조연이나 찬조출연이 다였기에, 실망하고 좌절하던 차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제작자 프레드 웨인트라웁(Fred Weintraub)이 이소룡에게 충고한다. 홍콩으로 돌아가서 여기 할리우드 제작사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장편 극영화를 찍어보라고. 결국 홍콩에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도 있고 해서, 이소룡은 아메리칸 드림을 포기하고 홍콩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당시 홍콩, 대만, 일본 등에서는 왕우(王羽) 주연의 《용호투(龍虎鬪, The Chinese Boxer)》(1970)가 대성공하며, 예전의 무협영화, 검술영화가 아닌, 맨손, 맨몸으로 싸우는 무술영화가 뜨고 있었다. 친구인 소기린도 이소룡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홍콩으로 돌아올 것을 권유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소룡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린 호넷》의 케이토 역이 중국인이라는 것이 홍보되었기에, 인기가 없어 한 시즌 방영에 그친 미국과는 달리, 중국식 제목은 《청봉협(青蜂侠)》이었지만, 홍콩에서 비공식적으로는 《Kato Show》로 알려질 정도로 성공했었다. 이소룡은 이후 자신이 막 홍콩에 돌아왔을 때, 홍콩에서 사람들이 그를 알아봐서 놀랐다고 술회했다.

자신감을 되찾았는지, 이소룡은 홍콩 최대의 영화사인 쇼 브라더스(Shaw Brothers: 소씨제편창邵氏製片廠)로 가서 면접을 보았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웬 바짝 마른 건달 비슷한 놈이 미국물 먹었답시고 예의도 안 차리고 건들거리면서 들어와서는, 자기를 주연으로 해서 영화 찍으라고 해대니, 사장이 불쾌해 하면서 화를 내며 내쫓았다고 한다. 그런 이소룡을 잡은 게 쇼 브라더스에서 독립해 나와, 가화오락유한공사(嘉禾娛樂有限公司), 즉 골든 하베스트(Golden Harvest)를 세운 추문회(鄒文懷)였다. 이소룡은 골든 하베스트와 두 편의 영화계약을 체결한다.


그리고 이소룡은 《당산대형》(1971)으로 흥행기록을 세워 대스타가 되었다. 연이어 《정무문》(1972)으로 그 기록을 다시 갱신한다. 골든 하베스트와의 계약을 마무리한 이소룡은 협화전영공사(協和電影公司, Concord Production Inc.)를 설립하고, 스스로 각본, 감독, 주연, 무술지도, 제작까지 맡은 《맹룡과강》(1972)으로 다시 신기록을 세운다.

1972년, 골든 하베스트와 함께 《사망유희》를 기획한다. 그때 워너 브라더스에서 《용쟁호투》를 골든 하베스트와 합작으로 제작하자는 제안이 들어온다. 당시 이소룡은 스타시스(Starseas) 영화사와 소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영화 《기린장(麒麟掌, Fist of Unicorn)》 때문이었는데, 이 영화는 그의 어릴 적부터의 친구 소기린이 주연한 영화로, 이소룡은 무술지도를 도와주기로 슬쩍 동의만 해주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제작사가 마치 이소룡 주연인 것처럼 홍보한 것. 소기린 역시 이에 분노했다고 한다.

《용쟁호투》 촬영을 마무리하고 몇 개월 후, 7월 26일 개봉을 6일 앞둔 1973년 7월 20일, 그의 애인이라고 소문이 파다했던 여배우 정패(丁珮 Betty Ting Pei)의 집의 침대 위에서 만 3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이 때 그녀는 이소룡이 두통을 호소해서 진통제를 주었는데, 이소룡은 그걸 먹은 후 잠든 뒤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의 원인은 공식적으로는 복용 약품 부작용이지만, 부검의나 다른 전문가들에 의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는 등 상당히 논란이 많았기 때문에 복상사라느니 마약중독사라느니 등등 각종 소문이 무지하게 많다.

  • 중국 무술계 또는 삼합회에서 보낸 암살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 쌍절곤 연습 중 급소를 맞아서 숨졌다.
  • 복상사다.
  • 이소룡 가문의 저주다.
  • 이소룡의 친구였던 이준구는 누군가가 그를 살해한 거라고 주장했다.
  • 쇼 브라더스에 스카우트되었다가 나중에 골든하베스트로 이적한 정창화 감독은, 이소룡을 붙잡아 두기 위해 제작자 레이몬드 초우가 미인계와 마약까지 사용하다 부작용으로 숨졌다고 주장했다.
  • 아시아인이 할리우드에서 주연으로 성공하는 걸 용납할 수 없는 할리우드 백인우월주의자가 살해했다는 주장도 있다. 비슷한 맥락의 얘기는 《고르고13》에서도 나온다.


상당히 신화적인 인물이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버려서 허황된 음모론들이 양산됐다.

이소룡이 자신이 오래가지 않아 세상을 떠날 것을 예상했다는 주장도 있다. 《용쟁호투》 기획 이전부터 심한 두통을 호소했고, 기절해서 몇 시간씩 정신을 못 차린 적도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용쟁호투》 출연 당시 악당 두목 한을 맡은 석견에게, "아저씨(석견은 이소룡 아버지와 친구였음), 아무래도 제가 아저씨보다 먼저 죽을 것 같아요" 라고 했다고 한다.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죽기 몇 달 전에 거액의 생명보험을 들었고 아내에게는 내가 죽으면 프랭크 시내트라의 《My Way》, 블러드, 스웻&티어스의 《And When I Die》 등등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장례식 때 틀어달라고 했다. 실제 장례식 때 그가 좋아하던 노래들이 울려 퍼졌다.

2006년, 의학계 일각에서, '돌발성 간질로 인한 급사'(SUDEP)를 그의 사인으로 내세운 적도 있다. SUDEP는 그가 쓰러진 지 22년 뒤인 1995년 의학계에 처음 알려졌기 때문에 그의 사망 당시에는 제시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는 미스테리도 없고 환상도 없다. 상술했듯, 그는 무리한 훈련으로 허리에 큰 부상을 입어 오랜 기간 병상에 있었다. 그가 병상에서 일어난 이후에도 만성적인 통증은 계속되었고, 이를 견디기 위해 진통제를 남용하다가 화를 입은 것. 실제 WWE 프로레슬러들 중에도 진통제 남용으로 요절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발생한다. 워낙 프로레슬링이 험하고 시합이 많아서 자주 출전하다보니 여기저기 잔부상이 많아서, 진통제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한때 WWE에서 마쵸맨과 숀마이클의 악역 여자 매니저로 유명했던 퀸 셰리는 허리디스크로 고생했고, 역시 진통제 남용으로 숨졌다.
미국 시애틀에 위치한 이소룡의 무덤. 묘비명은 절권도의 창시자(Founder of Jeet Kune Do). 오른쪽은 그의 아들 브랜든 리의 무덤.

절권도는 무술이라기보다는 개념에 가까운 것으로, 이소룡은 이 개념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싫어했으며, 심지어는 과학적인 길거리 싸움이라 부르려 했다. 개념 자체는 다분히 실전 격투기인데, 문제는 수련 체계가 제대로 잡히고 제자들이 어느 정도 실력에 다다르기 이전에 이소룡이 사망하는 바람에, 현재에는 상당히 복잡한 사정을 갖고 있다.


이소룡은 어느 날 자신이 가르치던 도장에 온 도전자와 싸우게 되었다. 당시 중국인들은 비(非)중국인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이소룡을 못마땅하게 여겨 도전자를 보내곤 했다고 한다. 때문에 이때도 대수롭지 않게 승부에 임했지만, 상대방을 쓰러트리는 것에 3분이나 걸렸다는 것에 이소룡은 충격을 받고, 금방 승부를 내지 못한 것은 자신의 몸 상태가 최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라 생각, 웨이트 트레이닝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절권도 개발에 힘썼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모 다큐멘터리에서의 이소룡의 아내의 말에 따르면, 이소룡은 금방 싸움을 끝내지 못한 것은 절권도의 시스템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전면 개편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소룡의 아내, 린다 리의 증언도 때와 장소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그녀의 문제인지, 그녀의 말을 전달하는 매체의 문제인지는 교차검증되지 않았음도 덧붙여둔다.

그러나 과도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척추를 다쳐 이후 무술 스타일을 변화시킨 것도 포함된다.

수련한 무술들과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동적인 방어보다 능동적인 공격으로 우선권을 잡고 최대한 빨리 상대를 쓰러트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이소룡은, 곡선보다 직선, 복잡함보다 단순함을 강조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간단한 예를 들면, 손목이 잡혔을 때에 팔을 비틀어 꺾거나 몸을 움직여 빠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발을 밟거나 낭심을 차버리는 식으로 간략하고 경제적인 움직임을 선호한다. 

그외 《사망유희》는 이소룡의 무술철학을 집결시킨 작품이 될 예정이었으나, 일부 격투장면만 촬영한 상태에서 이소룡이 사망하는 바람에 반쯤 미완으로 제작되었다.


여기서 이소룡이 입는 노란 체육복은 이소룡의 캐릭터가 전통적인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캐릭터임을 강조하는 것이고, 또한 이소룡의 움직임을 캐치하기 쉽게 하려고, 튀어보이는 노란색을 썼다고 한다. 그의 움직임을 찍은 영상들을 보면 재생 속도를 줄여도 캐치하기가 힘들다는 말이 꾸준히 나온다. 다만 오해는 말자. 당시 촬영기자재 등의 한계나 움직이는 물체 등을 촬영하는 카메라맨의 경험과 기술 등의 요소가 많이 작용한다. 실제 이소룡과 비슷한 시기에 촬영된 다른 무술가들의 시범이나, 공식 시합 등을 보면, 이소룡보다 더 빨라 보이는 영상들도 적지 않다. 심지어 1990년대 영화인 《데몰리션 맨》 촬영 때도, 주연이자 가라데 유단자인 웨슬리 스나입스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감독과 카메라맨 등이 천천히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네이버에서 이소룡 속도 무예동 등으로 검색해보자. 꽤나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한 듯한 분석 자료를 볼 수 있다. 


실망이 클 수도 있으므로 받아들이는 것은 각자의 몫일 듯.

쌍절곤과 단봉을 가지고 싸우는 댄 이노산토는 고난에 대처하기 위한 유연함, 합기도의 지한재는 실수에서의 깨달음, 그리고 마지막의 카림 압둘 자바는 무형의 강한 고난을 상징한다고 한다.

문제는 대역 배우와 이소룡의 외모가 상당히 차이가 나서, 이를 처리하려다 보니 곳곳에서 다소 괴작스러운 부분이 보인다는 것….

《사망유희》의 원래 배경은 한국 법주사 팔상전 5층탑이었으나, 이소룡 사후에는 홍콩의 유명 음식점인 남북루(南北樓 The Red Pepper Restaurant)가 되었다.

참고로 《사망유희》에서 이소룡은 격투장면 일부를 제외하면, 노란 체육복(혹은 바이커복)을 거의 입지 않았으며, 그의 사망 후에는 대역이 노란 체육복을 입고 헬멧을 쓴 채 스턴트 연기를 했다. 즉 《사망유희》에서의 모습은 대역이 많다. 잘 보면 대역의 얼굴이 그대로 나오는 경우도 많다.

중국인으로서 유명하긴 했으나 실제로 표준중국어를 구사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어느 기자가 최영의에게 '당신과 이소룡 중 누가 더 강합니까?'라고 물었더니 살기를 뿜으며, "지금 날 영화배우랑 비교하는 겁니까?"라고 했다는 얘기가 있다. 최영의가 이소룡과의 비교를 불쾌해 했다는 것은 국내 출간된 가라데 교범에 있는 이야기다. 혹은 "이소룡은 체중을 더 불려야 한다"는 간단한 말로 대답했다는 얘기도 있다. 물론 어느 쪽이든 진위여부는 불명이다.


다만 후자의 경우는 당연한 얘기로, 둘의 절정기 체중 차이가 30kg 이상이다. 절정기 이소룡은 체중이 70kg를 넘은 적이 없고, 대개 63kg 내외를 유지했으며, 절정기 최영의는 100kg 정도의 체중이었던 적도 있고, 80kg 아래로 체중이 떨어진 적이 없다. 복싱의 체급으로 따지면 최영의는 라이트헤비급, 이소룡은 평소 체중으로 라이트급 정도. 사실 이 정도로 체급에서 차이가 나면 "승패를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위와 관련하여, 네이버에서 연재 중인 웹툰 《갓 오브 하이스쿨》 190화에서 간접적으로 최영의와의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는데, 댓글들을 보면 이소룡이 국내 청소년들에게 어느 정도로 신격화 된 존재인지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현실적인 비유를 해보면, 새로 태권도 도장을 연 헤비급(84kg 초과) 국가대표 출신의 관장에게, 기존에 있던 동네 태권도장의 에이스로 추앙받던 웰터급(61~65kg: 중학생 선수 기준)의 중학생이 도전하는 거와 비슷하다.


《용쟁호투》 촬영 때 웬 엑스트라가 와서 자기랑 싸우자고 시비를 걸었고, 이소룡은 귀찮아하면서 그러자고 했었다. 몇 분 후 이소룡은 영화촬영을 시작했고, 그 상대는 쓰러져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인인 린다와 친구인 밥 월의 증언이 엇갈리는데, 린다는 이소룡이 상대를 다치지 않게 하면서도 제압했다고 하고, 밥 월은 이소룡이 상대를 개 패듯이 팼다고 한다. 참고로 《용쟁호투》 촬영 때 엑스트라들은 모두 진짜 길거리 깡패들을 불러온 것이었고, 이들은 이 격투 이후 모두 이소룡에게 존경을 표시하기도 했다 카더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반론도 있다. 단역배우가 주연배우에게 싸움을 걸고 그로 인해 촬영이 멈추기라도 하면, 하루에 깨지는 돈이 얼마나 될까? 저런 상황을 주변에서 놔둘 리가 없으므로 비현실적이라는 것. 영화판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수긍한다. 목격자라고 전해지는 사람들의 얘기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 이런 얘기가 카더라에 불과하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연이겠지만, 《용쟁호투》 엑스트라들이 주변에서 모은 길거리 깡패나 양아치들이었다는 얘기는 당시에는 나오지 않았던, 즉 저런 반론에 대항하기 위해 뒤늦게 나온 얘기라는 것이 반론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 반론에도 적지 않은 근거가 있는데, 홍콩영화에 일가견이 있고 눈썰미 좋은 사람은 《용쟁호투》 곳곳에서 단역으로 나온 원표(元彪), 화성(火星: 성룡의 스턴트 팀, 성가반의 일원이기도 하다. 《용쟁호투》에서는 야간경비 실책으로 볼로(양사 분)에게 처형당한다), 임정영, 종발(鍾發: 역시 볼로에게 안겨서(?) 처형당하는 역할), 원화 등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고, 샅샅이 뒤져보면 여기저기에서 더 나온다. 물론 반론 측에서도 반대근거를 완전히 댈 수 없다는 문제가 있지만, 이는 카더라 류의 얘기가 겪어야만 하는 숙명 같은 것이리라. 그리고 반론하는 측은, 이런 종류의 얘기엔 결정적인 증거가 없거나, 분명 있었는데 없어졌다는 식의 변명이 따라 붙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반론은 이 일화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측의 말과 딱 맞아떨어진다. 《용쟁호투》의 감독이 이소룡과 이 단역배우의 결투를 촬영했었지만, 감독의 보관 부주의, 혹은 별로 필요 없겠다 싶어서 촬영된 필름을 파기했기에 증거가 없어졌다는 식의 얘기가 있는 것이다. 어찌됐든 결국 증거는 없는 셈이다. 

상술(上述)한 대로, 《사망유희》는 이소룡이 촬영하다 중단되었기 때문에, 대역이나 뱅크필름을 이용하여 짜깁기처럼 만들어진 영화. 그 때문에 편집에 시간이 많이 걸려 짝퉁영화인 《신사망유희》가 오리지널보다 먼저 개봉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인터넷에 이소룡 어록이라 하여 이소룡이 한 말들이라며 돌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나는 내가 1인자라고 하지 않지만, 2인자라고 인정하지도 않겠다였다. 이를 보면 다소 호전적인 성격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때문에 싸울 때는 적극적인 공격을 권장하는 동시에, 평상시에는 성격을 다스려야 된다고 생각한 듯하다.

유명해지기 전 아역이나 단역으로 다수 출연하였다. 가장 유명한 역은 전술한 《그린 호넷》의 가토 역. 이 《그린 호넷》에서 꽤나 인기를 끌었다며, 간혹 그를 아메리칸 드림으로 엮는 경우가 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전술했듯, 아메리칸 드림의 꿈을 씁쓸하게 포기하고 홍콩으로 돌아온 인물이다. 미국으로 쫓겨나듯 후닥닥 가서 접시닦이부터 시작해 별별 일을 해가면서 살다가, 아내인 린다와 만나 결혼할 당시, 아내의 안경이 깨졌을 때도 고칠 돈조차 없어 아내가 깨진 안경을 쓴 채로 지내야 했다. 참다못해 어느 정도 알던 사이인 재미교포 태권도 사범 이준구에게 부탁해 돈을 빌리기도 했다. 이준구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밥을 얻어먹으러 자주 찾아왔다고….

그러다가 홍콩으로 돌아가서 성공한 후 다시 할리웃에서 스스로를 홍보해보는 게 어떠냐는 조언과, 할리우드에서 평생 허수아비 같은 조연에 매달리느니, 홍콩으로 가서 이름을 알리자는 지인들의 설득으로, 홍콩으로 돌아가서 비로소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던 것.

이렇듯 이소룡이 미국에서 크게 이름을 알렸고, 그를 알아본 홍콩영화계가 지인들을 동원해 돌아오라고 계속 설득했다는 일부 주장은 사실무근이다. 《용쟁호투》는 이소룡을 할리우드에서도 크게 대접한 증거라는 반박도 있지만, 단적인 예로, 85만 달러라는 제작비만 봐도, 저예산 영화로서, 결코 제작사가 야심차게 투자한 영화는 아니었다. 다만 예상을 아득히 초월한 대성공을 거두었으므로, 이소룡이 살아있었다면, 영화사가 후속편을 제작했을 가능성은 높다.

영화상에서 척 노리스를 이긴 유일한 남자다. 


덕분에 인터넷상에선 누가 더 강한가 키배도 활발하다. 척 노리스는 주한미군 시절에 길어야 2~3년 정도 태권도를 배운 인물이다. 그러고도 미국의 가라데 대회에서 우승했다. 이를 통해 당시 미국 무술계 수준을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술(前述)했듯, 무술대회에 구경 간 이소룡이 척 노리스와 처음 만났다고 하는데, 척 노리스의 몸놀림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한 이소룡이 이후 《맹룡과강》에 출연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실제 척 노리스가 영화계에 기웃댄 건 이전부터였지만, 이 영화에서 호평을 받은 척 노리스는 본격적으로 영화판에 뛰어들게 되었다고도 한다. 원래 이 배역은 조 루이스를 염두에 둔 것이었는데, 이소룡과 조 루이스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척 노리스가 대신 들어왔다고도 한다.

그의 생애를 다룬 《드래곤: 브루스 리 스토리》도 있는데, 저주설을 중심에 집어넣은, 수준 이하의 영화에 가깝다. 다만 숱하게 쏟아진 이소룡 관련 전기 영화들 중에는 그나마 이 작품이 제일 완성도가 높다. 2010년에 또 이소룡의 삶을 다룬 영화가 나왔는데, 《드래곤》의 경우는 볼만한 영화였다는 평도 일부 있었지만, 이번 작은 좀 별로라는 듯. 2011년엔 그의 일대기를 드라마화한 《이소룡의 전설》이라는 TV 시리즈도 나왔다. 《소림축구》의 골키퍼 진국곤이 이소룡 역할을 맡았다. 이 TV 시리즈에서 눈에 띄는 건 이삼각(李三脚)이다.

그러나 이소룡이 유명해지기 이전에도, 청도관, 무덕관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태권도 유파들 대부분에는, 유급자 과정의 기본 발차기들 중에, 앞후려차기(이소룡 식으로는 스윕 킥 Sweep Kick)→앞돌려차기(훅 킥 Hook Kick)→뒤돌려차기(스피닝 훅 킥 Spinning Hook Kick) 같은 식으로 연속하는 발차기가 있었다. 이를 이소룡이 도입해 《당산대형》에서 활용했는데, 이런 발차기를 처음 보고 놀란 당시 홍콩의 관객들이 붙인 이름이 이삼각(李三脚)이었다. 이 TV 시리즈에서는 이런 이삼각을 무슨 무협영화스러운 기술로 묘사했다. 예비동작이 없는 낮고 빠른 앞차기에 가까운 무영각(無影脚)이 이연걸의 《황비홍》에서 공중을 날아가며 여러 번 차는 발차기로 과장된 것과 비슷하다. 

상술했듯, 이소룡의 소꿉친구인 소기린 주연의 《기린장(麒麟掌, Fist of Unicorn)》에서, 이소룡이 무술 연기를 도운 적 있는데, 멋대로 감독이 그 장면을 촬영하여 영화에 삽입했다. 이소룡 측의 소송제기로 개봉판에선 삭제했으나, 이소룡이 죽은 후, 그 잘린 장면도 빛을 봤다고. 이런 식으로 필름에 이소룡의 얼굴만 찍혀 있으면, 마구잡이로 여기 저기 영화에 무단 삽입하는 일이 홍콩에선 자주 있었다.

딴지일보에서 이소룡 대 김두한의 대결을 가상으로 예상한 기사가 나온 적이 있다.

케니 스타일스 주연으로 그를 패러디한 포르노가 2011년에 발매될 예정이었지만, 취소된 듯하다. 북미에서 동양인 남성의 위치가 좋지 못하다 보니, 이 뉴스는 미묘한 반응을 얻었다. 좋게 보는 사람들도 많지만, 배우인 케니 스타일스가 영국 출신이라 북미에서의 인종간의 알력에 대해 민감하지 못하다보니,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성룡은 이소룡이 발굴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상기(上記)했듯, 《정무문》에서 이소룡의 발차기에 날아가는 스즈키 관장의 대역을 성룡이 했다. 《용쟁호투》에서는 한의 경비원 중 한 명으로 나왔다. 성룡은 맨 마지막으로 이소룡에게 공격을 당하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촬영 전에 맞춘 합이 어긋나, 실제로 이소룡이 성룡을 호되게 때리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에 이소룡은 성룡에게 굉장히 미안해하며, 《용쟁호투》를 촬영하는 틈틈이 성룡을 여기저기에 출연시켜줬다. 그리고 이소룡은 성룡에게 《용쟁호투》 후속작에서는 자신과 공동 주연을 시켜주겠다고까지 약속했다고 하나, 《용쟁호투》를 촬영하면서 이소룡이 사망하는 바람에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성룡의 무술솜씨를 눈여겨보았던 라유 감독이 《신 정무문》에 그를 주연으로 캐스팅하는 등 제 2의 이소룡으로 키우려는 시도를 거듭했다. 하지만 그리 성공하지는 못했고, 결국 대성공을 거둔 《취권》 이후로 이소룡과는 다른 길을 갔지만, 성룡은 이소룡의 공백을 너끈히 메울 정도로 대성공했다.

훗날 성룡은 이소룡이 너무 많이 도와줘서 자신의 평생 가장 큰 은인이라고 말했다. 이견(異見)도 있다. 이소룡 전성기 시절의 그를 알던 이들이 이소룡에 대해 방송매체 앞에서 하는 증언과, 개인적으로 그들끼리 하는 얘기가 다른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걸 취재한 홍콩 신문 등을 통해 몇 번 논란이 된 적도 있긴 했다.

《킬 빌》을 "백인들에 대한 이소룡의 복수"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우선 주인공인 우마 서먼이 입은 이소룡 복장은, 생전에 이소룡 본인이 원해서 입은 것인데 비해, 1부에서 나온 적들의 의상은 이소룡이 백인의 부하인 케이토(Kato, 카토오, 가토) 역을 맡았을 때의 복장이며, 최종보스인 빌은 이소룡이 주연으로 나오려던 자리를 빼앗은 셈이 된 데이빗 캐러딘이다. 결국 킬 빌에서 이소룡의 복장을 입고 그의 철학을 이은 키도가, 백인들이 이소룡에게 뒤집어씌운 이미지(케이토)와 이소룡의 자리를 빼앗아 간 백인(빌)을 죽이는 셈이니, 졸지에 타란티노가 이소룡의 복수를 대신 해준 셈이 되었다는 것. 1970~80년대 홍콩 시네마키드였던 타란티노의 마니아 기질이 발휘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본인이 독일계 쿼터라 홍콩에선 영춘권을 배울 때 불이익을 당했고, 미국에선 황화론이 여전했기에, TV/영화계에서 차별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인종차별에 대해 상당히 민감했고, 인종을 가리지 않고 교류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비(非)중국인에게 무술을 가르치지 말라는 중국 무술계와 갈등이 있었다. 물론 결과는 상술(上述)한 대로….

포스트 아포칼립스 무술 영화 각본을 쓴 적이 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영화가 하나 나올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