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심쩍은 530GP 김일병 사건 12년만에 재수사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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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심쩍은 530GP 김일병 사건 12년만에 재수사 결정


2017. 5. 29.

2005년 6월 19일 경기도 연천군 소재 대한민국 육군 제28보병사단 530GP에서 김동민 육군 일병이 내무실에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하여 8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당한 사건으로 이른바 김일병 사건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사건을 저지른 범인 김동민 일병은 3년에 걸친 재판 끝에 사형이 확정되어 현재 국군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사건 당일 전방 GP에선 사고 발생 당시 조선인민군 육군의 공격으로 상황이 전파되기도 했지만 오래 안 가 정정되었다. 모 사단에서 당직 맡던 군필자의 말에 의하면 초기 상황연락 보고 받을 당시에는 영현백과 함께 태극기를 준비해달라는 보고가 있었으나, 이내 정정되었다고 한다. 이는 전쟁이나 어떠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초반의 혼란스러운 상황 및 한정적인 정보수집 때문에 정확하지 못한 내용이 발표되는 것과 비슷하다.

원인은 병영부조리.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1990년대에 비해 2000년대에 들어오자 그래도 노골적으로 대놓고 패거나 지나치게 가혹하게 다루는 일은 많이 사라져갔다. 그러나 이건 인식이 바뀐게 아니라 감시해서 구타를 못하게 막으니까 벌어진 것이므로 독립부대의 구타는 여전했고, 가해자 김동민 일병 본인도 다른 GP에서 이미 이런 일을 겪다가 견디다 못해 사고를 치고 전입을 온 자원이기도 했다. 해당 GP에서 심한 부조리가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여러 차례 마찰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아마 이런 여러 가지 요소가 결합해 총기난사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언론에선 김동민 일병이 스페셜포스, 서든어택 등 총으로 사람을 마구 죽이는 게임광이라서 이같은 범행을 저질렀다고 개소리를 쳤지만, 조사 결과 사실 김동민 일병이 플레이하던 게임은 메이플스토리로 밝혀졌으므로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무슨 일만 일어났다 하면 게임 등의 콘텐츠부터 걸고 넘어졌던 당시 언론의 오래된 악습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동민 일병은 부대원들 중에서 인성평가점수가 가장 좋았다고 한다. 모 국회의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애꾸눈 세상에서 멀쩡한 사람이 병신취급 당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약간 과장되게 말해서 대한민국 육군의 병영 문화는 이 사건 이전과 이 사건 이후로 나뉜다고 할 정도. 조사결과가 발표되자 대한민국 국군은 발칵 뒤집혔고 특히 육군을 위주로 모든 부대에 걸쳐 부대 조사와 소원수리가 행해졌다.(당시 경험으론 약 한달 이상) 육군 내 만연했던 구타, 갈굼, 내무부조리 등 병영의 악습들이 그럭저럭 사라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이 비극적인 사건에서 그나마 좋게 봐줄 만한 점이다. 특히 육군 28사단은 전면적으로 해체되었다가 재편되는 굴욕을 당했다. 당시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이 전부 옷을 벗었고 군단장에게 경고장이 발부되었다고 한다. 이들을 감독하던 담당 병기부사관은 보병으로 아예 전과되었다. 이후 28사단 역시 내무부조리가 많이 사라져갔지만, 2014년에 윤 일병 사건이 일어나면서 여전히 완전하게 개선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사건은 육군에게는 심각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내무 부조리가 심한 군의 특징은 굉장히 폐쇄적이라는 것이다. 실제 2005년 육군훈련소 인분사건 당시에 이런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당시 논산 훈련소장은 MBC기자에게 보도하지 말아달라는 청탁까지 했을 정도였지만 결국 폭로되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대대적인 관리, 감시가 이루어지고 이전보다는 좋아졌는데, 감시 체계가 투명해지는 것만이 가혹 행위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것이다.

지금은 많은 보도로 인해 많이 완화되었으나, 군대가 아니라 경찰 조직인 의경도 가혹 행위가 매우 심했고, 심지어 구청과 시청에 복무하는 공익마저도 가혹 행위 문제로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또한 상당수의 보수언론은 이 사건이 좌파정부의 영향으로 군인들의 정신이 해이해졌다고 하였지만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에도 똑같은 육군 28사단에서 똑같이 8명이 사살당한 제28보병사단 화학지원대 총기난사 사건이 있었다는 언론의 보도가 나오자 바로 버로우했다.


또 이전에도 군대 괴담이나 몇 가지 확인되는 소스로 비슷한 사건이 존재했으나 이전 사건들은 그대로 묻히고 개선의 여지조차 없었던 반면 이번 사건은 언론에 대서 특필 되면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

다만 그렇다고 해서 100% 개선이 이뤄진 것은 아니었고 대체로 지휘관들이 감시를 철저하게 하는 부대일수록 구타및 가혹행위가 점차 줄어드는 형태였다. 즉 수백명이 함께 생활하는 중대나 대대에서 이전처럼 대놓고 구타하거나 가혹행위하는 건 어렵게 되었지만 지휘관과 간부 감시가 상대적으로 소홀한 독립 부대에서는 가혹행위및 구타는 여전히 이루어졌다. 그 결과 2008년 모 사단의 GP에서 황모 이병이 수류탄 사고를 일으키는 등 사고는 계속 터졌으며 특히 해병대는 개선된 점이 거의 없어 2011년 한국군 최대의 흑역사 중 하나로 기록되는 제2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4명의 생명을 앗아간 이 사건의 진범 김모 해병도 현재 사형 선고를 받고 국군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목격자들의 말에 의하면 나이도 많고 덥수룩 한 스타일의 수감자가 지나가서 중사 쯤 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김일병이라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런데 2014년 4월, 똑같은 제28 보병 사단에서 의무대 후임병 폭행사망 사건이 터지면서 제28보병사단은 육군 사단 중에서 가장 최악의 인권 쓰레기 사단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사건도 외부와 격리된 사실상의 독립 부대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2012년 5월 16일, 유족들의 동의하에 당시 상황을 찍은 영상이 유포되었는데, 사망자 유가족들이 재조사를 요구하기 위한 여론 환기 차원에서 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육군 당국은 재조사 방침은 없다고 입장을 내놓았다.

이 사건은 2008년작 영화 <GP506>과 연관된 것처럼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감독은 공식적으로 관계 없다고 발언했다.


사건 발생 초기 국방부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사망자 시신을 한 곳에 안치하지 않았다. 국군수도병원(서울특별시), 국군양주병원(경기도 양주시), 국군일동병원(포천시), 국군벽제병원(고양시) 등 군병원 4곳에 분산수용하여 유가족들이 모이는 것을 원천봉쇄한 것이다.

그러자 당시 국방부장관인 윤광웅 제독의 정책 보좌관이었던 정태용은 현안 업무를 조정하는 국방부 현안점검회의에서 "왜 시신을 한 곳에 안치해 합동분향소를 차리지 않느냐" 고 따졌다. 이에 인사복지 업무를 총괄하는 김승렬 차관보는 "군의 실정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이렇게 해야 말썽이 안 난다" 라고 답변했다. 이에 빡친 정보좌관은 "그게 말이 되느냐, 시신을 국군수도통합병원에 안치하고 합동분향소를 차려 유가족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정 보좌관의 노력으로 시신들은 수도통합병원으로 옮겨지고 합동분향소가 안치되었다. 또한 1953년 국방부장관인 손원일 제독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해군 출신으로 장관에 오른 윤광웅 장관 등은 분향소의 유가족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국방부 간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분향소에 조문 갔다가 수십 명의 군인과 유가족, 언론사 취재진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된 와중에 거센 항의를 받았다. 평상시에도 좌파정권에 투신한 좌파군인이라던지, 해군 출신이라며 국방부 내에 온갖 견제와 조롱을 받던 윤광웅 장관은 국방부 특히 육군 간부들에게 "그럴 줄 알았다" 며 또 다시 조롱당했다.

그리고 이것이 사상 최초의 국방부장관의 조문이었다. 

그동안 육군의 행태를 보자면 일본군 전통을 답습해 군대에서 사람은 소모품이라는 사상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었다.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도 17명의 우리 장병들이 전사하였지만 시신들을 분산 안치해 개별적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합동위령제는 아예 열지도 않았다. 합동분향소나 위령제가 없는데 대통령, 국방부장관 기타 등이 올 일은 만무하다. 그리고 위의 사건 뿐만이 아니라 언제나 그랬다. 그리고 연평해전 당시에도 이와 같은 행태가 반복되었다. 

결국 이렇게 합동분향소가 차려지게 되어 유가족들이 뭉치게 되자 유가족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생방송으로 중계된 수사상황 발표에서도 유가족들이 집요하게 의문점을 물어보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유가족들이 물어보는 의문점들은 아직도 국방부에서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군복무가 끝난 뒤에는 민간교도소로 이관해야 하는데도 아직도 군교도소에 있다. 게다가 면회역시 일절 거부되고 있으며 cctv공개까지 거부하고 있다.어쨌든 합동분향소를 만들게 되어 유가족과 언론에 의해 국방부가 더 많은 질타를 받게 된다고 해도 그것이 국가와 군대로서의 당연한 도리이다. 그리고 그 당연한 것을 이제야 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역대 총기난사 사건 등 국군의 주요 사고 사건들을 죽 정리한 2005년도 기사를 보면 먼 과거에도 이런 사건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유가족들은 현재까지도 국방부의 수사결과를 강하게 불신하고 있다. 유가족 측은 당시 남북화해 분위기를 조성해나가던 정권에서 찬물 끼얹기를 방지하기 위해 북한 육군의 포격으로 530GP의 병력들이 전사한 사건을 은폐조작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사상 최대의 군 의문사 530gp>라는 책을 발간하여 군의 수사결과를 반박하였다. 

실제로도 '총'과, '수류탄 안전핀', '지환통'에서 김일병의 지문이 검출되지 않는등 직접적 증거 자체가 전무한데다 순순히 범행을 인정했던 김일병이 갑자기 "재판관님. 왜 직접적 증거도 목격자도 없는데 저라고 확신하시죠? " 라고 돌발적인 질문을 하는등 여러모로 의문점이 많은 사건이다. 수류탄이 터졌는데 내무반의 피해가 거의 없는 부분은 차지하고 일반적인 탈영, 구타, 총기 사건이 나면 윗선들은 거의 100% 징계 처분을 받는게 일반적이다. 물론 그래서 은폐되지만..그런데 징계처분은 커녕 오히려 승급하였다. 김관진 전 국방장관도 그 예.... 그리고 가혹 행위자 포함 22명이 국가유공자 된것도 의심을 부추긴다. 하지만 분명히 소대장부터 연대장까지 보직해임되었으며 사단장과 군단장은 감봉처분을 받았다. 김관진 안보실장은 당시 3군사령관이었는데 3군 휘하에 있는 수많은 부대들을 생각하면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군사령관까지 책임을 지기는 어려운 구조다. 그리고 3군 사령관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 위의 육군참모총장이나, 합참의장, 국방장관은 책임지지 않아도 될 문제인지 생각해봐야한다. 제 2해병사단 총기난사사건때도 연대장까지만 보직해임됐다. 또한 노컷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김일병의 변호사는 김일병에게 가해졌다는 가혹행위는 제 2해병사단에서 있었던 기수열외같은 것이 아니라 따돌림, 욕설정도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에 대해 군당국이 사법처리를 할 정도는 아니고 군생활중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국가유공자로 지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SBS 뉴스추적은 유가족들이 제시한 북한군의 기습증거 중 일부의 신빙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해당 GP에서 함께 군생활을 했던 병사들이 북한군의 공격증언에 대해 긍정적으로 밝히는 녹음파일에 대해 그런 진술을 한 병사들은 유가족들의 연이은 방문과 자백강요를 일시 모면하고자 그렇게 말했다고 증언했다. 녹음내용을 봐도 해당 병사들은 매우 소극적인 태도로 유가족들의 질문에 수동적으로 대답하기만 한다. 유가족들은 연천530GP피격사건전사자유족회, 연천530GP진상규명촉구국민협의회의 명의로 2014년 12월 16일 서울지방중앙검찰청에 은폐조작 당사자로 지목한 국방부 관계자를 고소하였으며, 국방부 민원실에 재조사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결국 2017년 3월 25일 12년만에 재수사가 결정되었다.
하지만 재수사를 한다고 해서 진실을 밝힌다는건 불가능 할것 같다. 늘 그래왔듯이 수사하는 시늉만 하고 말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