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넓고 도망칠 곳은 많다 '김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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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넓고 도망칠 곳은 많다 '김우중'


2017. 4. 20.

김우중은 前 대우그룹 회장이었다.

한때 정주영, 이병철과 함께 대한민국 3대 재벌 중의 하나다. 그런데 자산규모는 80년대 당시 10억 달러를 넘기지 못했다. 87년 당시 포춘지에 나온 10억 달러 이상 자산가에 정주영, 이병철은 있지만 김우중은 없다.

500만원을 25조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고 포춘지에도 대서특필 되는 등의 활약을 펼쳤으나...분식회계라는 죄를 지어 17조라는 어마어마한 추징금을 지게 되었다. 참고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 2013년에 납부한 추징금이 1672억 원. 전두환의 100배다. 하지만 이건희도 자산이 15조를 채 못 넘기는데 망한 기업인이 17조를 낼 수 있을리가... 내고 싶어도 못 내는 경우이기에 전두환의 추징금 환수때 반짝하더니 이제는 관심이 없다. 안습인건지 운이 좋은건지 언플을 잘 하는건지.


1999년 대우그룹 부도 및 해체 이후 베트남으로 도피했다. 99년 12월, 중국 연태를 시작으로 베트남에서 3년 6개월동안 거처로 삼다 영국을 경유해 프랑스에서 정부의 도움으로 임시국적을 만들어 2005년까지 있었으나, 대한민국 정부와 인터폴의 압박으로 2005년에 귀국 했다. 1989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베스트셀러를 썼는데, 지금은 세계는 넓고 도망칠 곳은 많다라는 비아냥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제주도 출신인 부친 김용하가 대구사범학교(지금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장을 하던 시절에 태어났다. 김용하(1896년∼1950년)는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읍 하귀리 출생으로 평양제2고보를 나와 일본 법정대학(法政大學) 예과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제2회)를 졸업하였으며, 함경북도 종성중학교의 교사, 대구 사범학교 교장, 경성공립사범학교 교장, 용산공립중학교 교장, 조선 민족청년단 서울시단 이사, 서울대 상과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학생과장, 정부 중앙물자행정처 기획국장, 중앙청소비조합 전무이사, 제주도지사를 역임하였다. 도지사에서 물러난 후 서울로 이사했다가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납북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동기생으로 배우 신구,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 등이 있다. 이종찬과는 둘 다 경기고 내에서 주먹패로 날렸다고 한다.

이후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친척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의 바이어를 하다 1967년 독립해 대우실업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창업 이후 유창한 영어 실력, 제2금융권으로부터 돈을 빌린 뒤 해외 회사에 오퍼를 내고, 계약이 성사되면 그 때 돈을 갚는 독특한 자금동원 능력,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맥과 경기고 인맥 등을 잘 활용해 창업 5년만에 100만 달러 수출을 기록했다. 그러나 전두환, 손영길 등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1973년 윤필용 사건 때 육군보안사령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다가 경기고등학교 동기생 이종찬이 중앙정보부에 근무한 덕에 큰 화를 면하였다. 이후 신군부의 비호를 받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문(대우전자),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등을 인수하면서 대우를 10대 재벌로까지 키운다. 

이후 동유럽의 민주화, 시장개방 바람 등에 편승해 세계 경영을 주창하며 구 공산권 국가에 진출해 전 세계로 사업을 확장했다. 대우의 수입차 생산 거점기지였던 폴란드는 지방 공무원의 관용차가 대우차 구종이었고, 수도 바르샤바에는 '세종대왕 고등학교'까지 있다고 한다. 

재벌 회장중에서는 제일 언론플레이를 잘하는 축이었고, 1989년 출간한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도 사실 언플의 일환이었다. 다른 언플성 책으로는 도올 김용옥이 대우측에서 모든 경비를 제공하여 김우중의 출장에 동행하고 난 후 쓴 기행문인 "대화"가 있다. 이 저서에서 김용옥은 상당히 김우중을 미화했는데, 당시 김우중은 다른 재벌 회장에 비하면 매우 이미지가 좋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지만.. 어쨌든 IMF 이후에 밝혀진 김우중의 비리를 보면 이 책은 김용옥의 흑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룹 이미지 개선을 위한 것으로 보기에는 이 책은 구라 투성이였다. 이 책에서는 자신이 소명의식으로 기업을 하며 대우는 비생산적인 서비스업은 절대로 손 안대고, 자기는 자녀들에게 절대로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식으로 이야기 했다. 실제 김우중은 자신을 전문 경영인이라고 자처하고, 대우 사태 직후에도 2~3년 안에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없이 물러날 것을 채권단에 약속했다. 그리고 이 말은 다른 의미로 사실이 되었다.

일각에서는 집안 배경, 인맥, 언플을 적극 활용해서 큰 케이스이기에 향간에 도는 "대한민국 원조 샐러리맨의 신화"는 허구라고 말하는데, 그건 결과론적인 이야기고 샐러리맨으로 시작해서 재벌 총수가 된 것 자체는 사실이기에 "대한민국 원조 샐러리맨의 신화"라는 평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다. 물들어올 때 노젖는 것도 재주다. 그럼 뭐, 맨땅에다가 헤딩해서 성공해야 샐러리맨의 신화라고 할 것인가? 

이런 언플 외에도 기술은 사오면 된다며 자체적인 R&D를 등한시한 것도 문제. 김우중의 "기술은 사오면 된다"는 개소리는 너무 유명하다. 당시 대우조선공업 기술연구소장 이 기술개발을 하자고 했으나 기술이라는 건 필요할 때 밖에서 사오면 되는 건데 왜 쭈그려 앉아서 기술개발 하냐고 반박했다고. 월간 조선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아들이 기술연구소에 재직했었다. 다만 전자부문에서 브라운관용 고강성 CRT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것과, 영국 워딩 기술연구소, 독일 뮌헨 연구소를 인수해 독자 플랫폼을 개발하는 등 90년대 초반부터는 김우중 본인도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결국 대우 계열사에서 생산하는 제품의 경쟁력은 점점 뒤쳐졌고, 결국 1997년 터진 IMF 구제금융사태는 은행 차입을 통해 큰 판을 벌리는 경영 스타일에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쌍용자동차를 추가로 인수하고 팔리지 않는 제품을 해외 법인으로 밀어내어 수출 실적으로 잡는 등 구조조정에 소홀했다.

현대, 삼성에서도 부채율 감소에 힘을 기울이던 상황이었지만, 대우그룹은 일본 증권가나 외국 평가기관의 경고가 사전에 있었음에도, 상황을 매우 낙관적으로 전망하였다. 실제로 구조조정 계획을 초과 달성한 삼성과 현대, 90% 이상 달성한 LG와 SK들과는 다르게, 대우는 18.5%에 그쳤다고 한다.

다만 대우가 청산회사를 세우고 나서 한동안 기업청산을 못한 데에는 팔리지 않는 제품들과 정부에서 빛으로 본 사업건들이 뒤늦게 빛을 봐 그것들의 흑자가 청산법인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나는 등 장기적인 성과가 있었다. 2001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레간자가 합리적인 가격대와 성능을 갖춘 차량으로 선정되기도 하였고 한때 북미 고객만족도 평가부문에서 현대ᆞ기아를 제치고 BMW의 뒤를 이어 4위를 차지한적도 있었다. 그러나 철수 후 미국시장에서는 대우라는 브랜드는 조롱거리로 전락하였다. 뭐 그땐 안전테스트가 워낙 개판이라 어느 잡지사에서 직접 차를 사 충돌실험을 했을 때 그냥 전원 사망 수준의 안전도를 자랑했으니.. 다만 동유럽을 비롯한 제3세계시장은 소련붕괴이후부터 시장에서 틀을 갈고 닦아 여전히 대우의 브랜드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다만 현재는 GM의 브랜드 일원화로 대우 브랜드의 부활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때 월간오토라는 잡지사에서 직접 90년대 중형차 3대장을 구매해서 실험했는데, 쏘나타 3는 핸들에 몸을 박고 크레도스는 의자가 뽑히고 레간자도 개박살이 났다. 사실 쏘나타 2는 북미 충돌테스트에서 B필러 앞이 무너질 정도로 차체강성이 쓰레기였던걸 생각하면 나아진건 맞는데...

여하튼 이때도 몸집불리기에 나선 덕택에 LG그룹과 삼성그룹까지 앞선 2위 재벌이 되었지만 내실은 부실해졌고 그 결과 1999년 8월 26일, 어음 만기 사태를 이기지 못하고 대우그룹이 워크아웃을 신청하면서 최종 부도처리 된다.

그룹 해체 이후 분식회계를 통한 사기 대출 혐의로 수사가 진행되면서 베트남으로 장기 도피하여 잠적하였다가 2005년 귀국하게 되었는데 이 때 공항에 나온 노동자들과 대우 피해자들이 몰려와서 그를 손가락질하거나 비난하였다. 한때 노동계와 시민단체 등로부터 해외 도피자 명의로 공개수배를 받기도 하였다. 2006년 징역 8년 6개월, 벌금 1천만원, 추징금 17조9천253억원(!)의 형을 구형받았고 2007년 말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로 사면되었다. 참고로 추징금이 전두환의 100배 가까이 된다. 물론 사면은 사면이고, 추징금은 내야한다. 전두환의 추징금이 화제가 된 2013년에는 김우중 추징금을 어떻게 받아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전두환은 재산이 있는 것이 너무도 뻔했기에 추징금 환수가 금방 이루어졌지만 김우중은 17조 원이 도무지 털어도 나오지 않을 돈임이 뻔해서인지 금방 묻혔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혹시 재기하는거 아니냐? 라는 관측이 있었으나 김 전 회장 본인이 그럴 생각은 없다고 일축했다. 사실 이런 관측이 나올만한 것이 경제 요직에 과거 대우맨 출신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을 둘째 치더라도 김우중 전 대우회장은 전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박근혜 대통령 일가와 상당히 깊은 관계를 이어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10.26 사건으로 박대통령이 사망하고 전두환 정권의 제5공화국 시대가 막을 내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남동생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남인 박지만의 마약사건이 터지면서 당시 재벌층은 거리를 두기 시작했던 반면, 박지만의 재기 계기였던 EG의 인수에 김우중 전 대우회장이 큰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즉 인맥적 상황으로 볼 때 충분히 나올만한 관측인 셈이다.

현재도 김우중 개인의 세금체납액이 상당하다고 한다. 아들이 유령회사를 통해 600억원대 해외 골프장을 소유하고 있다는 기사도 떴다.

2014년 8월 신장섭 싱가폴 대학 교수와의 대담 형식으로 회고록 '김우중과의 대화'를 출간하고 출판기념회에 잠깐 참석해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의 악연이 대우를 해체한 주범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일부에서 제기하는 김우중 회장이 대북사업에 소극적이어서 DJ정부에서 피해를 봤다는 음모론에 대해서는, 자신이 김일성, 김정일을 수십번 만나서 독자적 커넥션을 구축하고 있었다고 밝혀 부정하였다. 하지만, 인터뷰를 읽어보면, 요지는 대우라는 기업의 낙관적 전망을 강변하며, 결국 투자나 추가 대출을 설득하는 CEO의 그것이다.

참고로 미국에서 김우중급의 분식회계를 지시한 엔론 전 회장 케네스 레이는 24년형을 받았으나, 복역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 사람은 매출액만 터무니없이 부풀렸을 뿐 순이익을 부풀린 건 단 20%다. 아예 손해를 이익으로 부풀린 김우중보다는 낫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케네스 레이는 사실 바지사장 수준에 가까웠고 실제로는 그 밑의 CEO가 벌인 일이다. 무관심했던 케네스의 문제도 크지만 실제로 죄를 저지른 CEO는 더 큰 잘못이다. 당연히 이쪽이 더 많이 떼어먹었고 이쪽도 케네스 이상의 처벌을 받았다.

사실 털어서 먼지 안나오는 사람 드물다는 말이 있듯, IMF 사태 전까지 거의 모든 대기업들이 분식회계를 저지른 의혹을 받는건 사실이다. 그렇게 해서 절세 또는 금융혜택을 받는 경우가 많았던고로, 그 시절 분식회계는 대기업들의 관행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1998년 새로 출범한 국민의 정부에서 이헌재 금감원장을 통해 기업 부채율을 200%로 감축하도록 30대 그룹에 강공 드라이브를 건 것은, 첫째,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같이 죽게 생겼기 때문이다. 대마불사(大馬不死)의 기세를 보이는 30대 그룹도 평균 부채율이 387%로, 1997년부터 1998년 2년 동안 재계 100위귄부터 상위 30대 기업까지 매월 도산 소식이 들려오는 현실이었다. 부채율 300% 초반의 거평 그룹 임원이 부도 6개월 전까지 "우리는 평균보다 낮은 양호 수준"이라고 인터뷰했을 만큼, 기업인들이 은행빚의 무서움보다는, 과감한 투자에 시선을 돌려 앞만 보고 달린 후유증이 경제 전반을 덮은 상태였던 것. 둘째, 처음부터 예외를 두면 추후 빠져나갈 수 있는 허점으로 악용될 여지가 컸기 때문이다. "계열사 업종 고려없이 200%로 감축하는건 말이 안된다."는 주장이 나왔으며, 자동차, 조선업의 특성을 고려해보면 부채율 200% 유지는 실현할 수가 없다는 반발이 있었지만, 이 역시 이헌재 금감위장이 악역을 맡았을 때 이미 얘기가 나와, 이 회사 사정, 저 회사 사정 감안하지 않고 예외 없이 30대 그룹 구조조정안 일괄제출이 통보된 상황이었다.

"구조조정 작업에 소홀히 하며, 오히려 막대한 부채를 빌미로 배짱을 보였다."고 말한 강봉균 전 경제부총리의 입장, 과거 대우통신 상무 직위로 일하던 시절 한국반도체 인수 실패로 계약금 회수에 몰두하다 자진 퇴사한 이헌재가 한국신용평가 사장으로 취임한 후 당시 다른 5대 그룹보다 재무 평가에서 계속 불리하게 레이팅 되었다는 대우맨의 증언, 제 3자의 입장에서 봤을때 국민의 정부 경제 관료들에게 반기를 들며 밉보여 꼬투리를 잡혔다는 의견 등이 있다. 여담으로 국민의 정부에서 이헌재는 낙하산으로 금융감독원장 자리에 앉기도 했다. 하지만, DJ의 야당 총재시절 신문에 연재되는 무협지면까지 빌려 교묘하게 DJ를 깎아내렸던 중앙일보와 그 상관격인 삼성그룹에게도 대통령 측근들이 손을 대지 않았던 점이나, 여소야대 국면, 당시 경제적 상황을 감안하면, 아무리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다 해도 자신을 기술자로 여겼던 이헌재의 행동반경이 보복 수준에 이르기 힘들다.

비록, 호시절에 다른 5대 기업보다 기술개발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긴 했지만, 동유럽 및 동남아시아 시장을 선발적으로 개척한 상태였던 것, 조선소와 자동차회사를 운영하며 축적된 고급인력 등을 감안할 때, IMF 시기에 있었던 위기를 단지 신정부의 군기잡기로만 치부하지 않고, 좀더 심각하게 대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 또한 1999년의 대우그룹 사태의 모습이다.

미국 GM은 쉐보레 통합 이전 GM 대우 시절 경영 정상화에 대한 자금 지원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금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는데다가 채권단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방관하는 모습을 보여 대우자동차는 GM에게 단물만 빨리고 "제 2의 쌍용차" 신세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국내 전문가들을 통해 제기된 바 있었다. 실제로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 당시 미국 정부의 관리를 받으며 Government Motors라 불리기까지 했던 제너럴 모터스의 위기탈출 1등공신도 바로 대우가 보유한 소형차 기술이었지만, 그 직원들은...

전 세계 6개 연구소, 16개 생산기지, 19개 현지법인, 78개 해외판매망을 거느렸던 대우자동차가 GM의 생산기지 수준으로 전락해버린 모습을 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김우중은 전용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 인식 등의 문제로 체코의 어느 공항 어딘가에 있다가 유럽 다닐때만 사용했다고. 사실 그가 활동한 동유럽 지역까지 매번 전용기를 타고 날아간다고 하면 유지비도 상상초월급이기에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퍼스트 클래스 좌석이 비싸봐야 천만 원 단위이지만 전용기는 비슷한 거리를 갈 경우 연료비만 억대가 나온다. 해외출장이 특히 잦던 그가 계속 전용기를 탔다면 유류비 폭탄이 날아왔을 것이다.

극성 축빠였다. 사원 체육대회에서 축구 경기가 치뤄지면 선수로 몸소 출전해 풀타임을 뛰었다고 하고, 축구단 창단을 위해 당시 잘 나가던 여자 실업배구단까지 해체했다고 한다. 하여간 이렇게 해서 만든 부산 대우 로얄즈는 상당히 잘 나갔다. 현재 센텀시티 부지에 대우 로얄스의 축구전용구장을 지을 계획도 세워 놨을 정도였다. 삼성이나 금성이 야구단을 창단하자 우리도 야구단을 창단하자는 간부의 제안을 즉각 거부할 정도였다. 이런 축구 사랑으로 아낌없이 축구에 투자하니 대한축구협회 회장도 역임했을 정도다. 다만 대한축구협회에서 물러난 계기가 좀 거시기한데, 김 회장이 축협에 자금줄을 대 주면 당시 실무진이 다 떼먹고 일처리 제대로 한 건 하나도 없었다. 이걸 보고 분개한 김 회장이 "내가 두 번 다시 족쟁이들과 상종하면 인간이 아니라 축생이오"라는 명언을 남기고 축구협회 일선에서 손을 뗐다고 한다. 안정환의 해외진출도 김우중이 힘을 실어줘서 가능했다. 안정환이 이탈리아에서 씁쓸히 물러났던 이유 중 하나도 대우그룹이 기울면서 스폰서가 끊겼기 때문이다.

광주와 특별한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등경기장 건립기금으로 향토기업인 금호그룹보다 많은 액수를 출연해 지역사회에서 큰 화제를 모은 적 있다. 이후 해태 타이거즈의 활약으로 호남에서 야구붐이 일면서, 홈구장 건립에 1등으로 기여한 대우그룹의 이름이 호남 야구팬들에게 자연스레 인식됨에 따라 막대한 홍보효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노조를 극렬히 반대하는 삼성그룹가와는 달리, 노조에 대해 진보적이고 관대했다고 한다. 대우가 FSO를 인수했을 때 조건이 3년동안 자의적 퇴사를 제외한 모든 사원들의 안정적 고용이었다. 덧붙여서, 이에 관련된 에피소드 중에 현재 인천시 부평구 을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과의 일화가 하나 있는데, 1985년 대우자동차 파업사태 때 노조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공장 노동자들 내에서 영향력이 컸던 홍영표 의원과 몇몇 노조 중심인물들을 시청에 불러다가 즉석에서 직접 임금 협상을 했었다고. 그 결과 노조 측에서 요구한 임금 인상률 18%까지 아니어도 16.5%까지 인상시켜주었고, 노조와 노동자들의 복리후생을 철저히 약속했다고 한다. 또한 진보 노동운동에 참여한 홍영표 의원을 당시 경찰에서 예의주시하며 체포할 수 있는 것을 알아채 그를 자신의 자동차 트렁크에 숨겨 경찰이 둘러싼 시청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홍영표 의원은 그 후 대우자동차 공장의 지하 프레스실에 숨어 프레스실을 점거하고 대정부 농성을 계획하다 노동자로 위장한 경찰에 잡혀 결국 체포됐었다고 한다. 그 후 그의 대범함을 높게 산 김우중 회장은 그가 대우자동차판매에 복직할 때 영국시장에 고위직으로 파견시켜주었다고 한다.

대기업 총수답지 않게 식사를 매우 간단하게 하는걸 즐겼다. 임원들과 중국음식점에 갔을 때는 짜장면 한그릇을 뚝딱 비우는데 15분도 채 안 걸려서 주변을 당혹스럽게 했으며 해외 출장 때는 호텔 같은 곳보다 사업장 인근의 허름한 식당을 애용했다고 한다. 실제로, 유럽 출장 당시 작업복 차림으로 샌드위치나 햄버거를 먹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된 적도 있다. 하지만, 나중에 귀국하여 검찰 조사를 받을 때는 검사가 "식사를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묻자 곧바로 라면사리를 넣은 김치찌개를 요청했는데 해외 체류기간동안 한식을 거의 못 먹어서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언플이라는 논란도 있는데 해당 일화는 검찰쪽에서 직접 언급한 것이라서 애초에 언플의 여지도 별로 없다. 과거 김우중 회장이 대우조선 사태(1989~1991) 때 거제도 옥포조선소로 시찰갈 때마다 근처의 중국집을 자주 들렀던 것을 생각하면 그냥 일반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식사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봐야 한다. 어차피 김우중 회장도 소년기와 청년기 시절의 대한민국은 6.25 전쟁을 했던 가난했던 국가였으니까 당연히 음식같은 것도 풍족하지 않았을 것인데다 대우그룹의 회장으로 일한 1980년대에도 새마을 운동같이 경제개발했던 시절이라 아무리 대기업 회장처럼 부유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매일 귀족들마냥 비싼 음식만 먹고 살았을 상류층들도 그렇게 많았던 때도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실제로 성공한 기업가들 대부분이 소탈하고 검소한 구두쇠같은 사람들도 정말 많아서...

부인 정희자 여사는 부군의 창업 초기부터 음식을 해와 사원들과 같이 점심 식사를 했다고 한다.

롯데그룹의 신격호 회장과 더불어 한국에서 아직까지 생존한 재벌기업 창립주이다.대우가 망한 현재 유일하게 일선에서 활동하는 기업가는 신격호 회장 혼자밖에 없지만... 신격호도 생존은 했는데 건강이 너무도 나쁘다. 자기 회사 이름도 잊었다.

의외로 고령이다. 1936년생으로, 2017년 연세 82세(만 81세)이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가 노태우 정부 시절 북한에 비공개 특사로 파견 갔을 때 김일성이 이미 50대에 접어든 자신과 40대 중반의 김정일을 두고 '젊은 사람'이라 불렀다고.

한류스타 이병헌의 양아버지이다. 1990년, 아들 선재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스물셋의 나이로 세상을 떴는데, 부인 정희자가 TV에서 이병헌을 보고서 "선재와 닮았다"고 하면서 호감을 느껴 이병헌과 친분을 맺었고, 노조의 반발로 접기는 했지만 이병헌을 위해 신형 세단 아카디아를 선물하려 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병헌의 결혼식 때 개인 자격으로 참석한 재벌가 3세들이 꽤 있었는데 바로 김우중 부부와의 친분으로 만든 인맥이다.

골프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운동을 할 시간이 없을 때는 무협영화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풀었고, 훗날 대우전자 내에 비디오사업부를 설치해 20세기 폭스,워너브라더스 등의 작품을 수입하고, 1995년 케이블방송 사업자 선정 때 세간의 예상을 깨고 영화 채널 부문에 응모할 정도였다. 이것이 현 OCN의 모태가 되었다. 오리온그룹 계열 온미디어로 넘어가 버려서 이름이 OCN이 된건데, 오리온도 CJ에 사업을 다 처분해버려서 현재는 CJ E&M 산하에 있다.

경기고 재학 당시 공부를 제대로 안해서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반에서 꼴찌였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걸 카더라라고 치부하기 이전에 당시 경기고등학교의 위상을 고려해보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단 당시의 경기고는 서울대로 진학하는게 일반적일 정도로 당대 최강의 명문고였으며, 이 시절 연고대의 위상은 학비가 비싸서 지방국립대보다 위상이 낮았다. 그래서 대학 입시 상황 역시 서울대 전체 꼴찌가 지방 국립대 수석을 차지하는 전형적인 학벌지상주의 세태였다. 이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위키러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21세기에 들어서야 서울대 하위와 연고대 상위가 배치표에서 겹치고 지방국립대의 위상이 낮아졌지만 예전에는 그런 거 없이 서울대 농대까지 다 돌고나서 지방 국립대의 순번이 오던 판국이다. 따라서 2011학년도 입시에서처럼 연세대 경영대 떨어지고 서울대 경영대 붙는 현상이 애초에 일어날 여지조차 없었던 시절이다. 거기에 지방국립대에 갈 정도의 돈마저도 부족한 야심찬 수재들의 상당수는 육사에 갔다. 앞서 언급한 주먹패 전설을 감안하면 공부와는 담쌓고 지냈을 가능성이 크다.

연세대 졸업 이후 동문회장을 역임했고, 상경대학 건물 신축시 기부금을 내고 이 때문에 연세대 상경대학 본관의 명칭이 김우중 기념관이다. 또한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부지를 기증하는 등 여러 모로 연세대를 도왔다고 한다.한때 강연을 하려 연세대에 가자 학생들이 몰려와서 악덕 기업주라고 시위를 벌이자 굳은 살이 박힌 자신의 손을 보여주면서 '나는 이렇게 굳은 살이 박힐 정도로 일해서 돈을 벌었다. 학생들 중에서 나 정도로 고생한 사람이 있는가?'라고 말해서 학생들에게 일장연설을 했다고 한다. 허나, 김우중 본인도 금수저에다 인맥 버프였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경영 스타일은 전형적인 독불장군형이다. 대우그룹의 모든 일을 자신이 직접 챙겨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이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증언이 "구조조정본부장을 만나보니 그룹 실상조차 제대로 모르더라."(강봉균 당시 경제수석비서관). 심지어 협력사였던 GM에서도 디스를 할 정도였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것은 최악이다. 많은 이들이 과거 대우 회장이 그런 독재자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직원들이 자신에게 충성하는지만 신경을 쓰다가 회사를 말아먹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한창 때는 비서진도 일부러 체력이 좋은 남자 비서들을 골라서 선발했는데도 비서들이 김우중의 스케줄을 따라가기 힘들어서 몇달에 한 번씩 교체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을 지나치게 믿다가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대중을 믿었던 이유는 군사정권 시절 신문에 이름 좀 오르내린다는 기업들은 여당에 몰빵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는 여당 2, 야당 1의 비율로 정치자금을 제공했다고 한다. 그리고 경기고등학교 후배로 대우그룹 임원을 지냈던 박정훈이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이었다. 여튼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재계 총수들과의 첫번째 회의 자리. 내정간섭 수준의 각서까지 요구할 정도로 기세등등한 국제통화기금 하에서 1997년 외환 위기를 빨리 극복하기 위해 과감한 구조조정을 부탁하는 대통령의 말이 있었다. 이후 회의가 끝나고 김우중의 후배인 타 재벌의 총수가 김우중에게 "어떨 것 같습니까?"하고 묻자 김우중 왈 "뭐 별일 있겠어. 다 들어서고 나면 처음엔 저렇게 군기를 잡잖아. 이번에도 별 탈 없을거야." 참고로 당시(1998년) 대우그룹의 모기업이었던 (주)대우 한 회사의 부채만 22조원. 참고로 당시 국가예산의 30%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1998년 예산이 70조 정도였다. 그러니까 정부차원에서 정부출범에 대한 보은차원에서 부채를 다 보전해주고 싶어도 해주기 힘든 상태였다는 말이다.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 역시 김우중의 현실인식이 안이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대우사태 이후 도피 루트가 굉장히 파란만장 하다. 99년 겨울에 중국 연태에 신설된 대우자동차 중국공장 개소식 때 참여해 중국에 계속 머무른 것을 시작으로, 미얀마 - 라오스를 거쳐 베트남에서 3년동안 은거해 지냈다. 이 때 한국 정부에서 김우중을 넘기라고 베트남 정부에 요청을 했더니 베트남 공산당 부서기가 단칼에 거절했다고. 그 후 프랑스에서 임시 국적을 얻어 2005년까지 지내다 결국 서울로 돌아와 자수하고 검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IMF 사태 이후로 이미지가 만신창이가 되어버렸지만 베트남에서의 평가는 현재까지도 매우 높다. 이는 대우가 베트남 진출할 때에 라이따이한에 대한 복지 지원, 현지인 대우 등에 많은 신경을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베트남에서 존경하는 한국인으로 김우중을 꼽는 경우가 많다. 베트남에서 한국 대기업의 선전도 사실 대우가 만들어놓은 이미지의 수혜를 받은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실제로 이런 방식은 다른 다국적기업들도 본 받을 만한 것인데 많은 다국적 기업이 미성년자 노동, 개판인 직원복지, 고용인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 등으로 현지에서 욕을 먹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에 가서는 "너희는 노조라는게 없냐?"고 욕을 엄청 먹었다고 한다. 한편 2017년 초 삼성전자 베트남 공장에서 차별대우 때문에 일어난 노동자 시위로 인해 현지에서는 김우중 회장의 현지인 대우와 복지 능력이 재조명받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1985년, 김우중과 형인 김관중(대창기업 회장), 김덕중(전 교육부 장관) 등의 형제들이 모여, 아버지의 고향인 제주에 도서관을 짓고 이를 제주도에 기증했는데, 그 도서관이 아버지 우당 김용하의 호를 딴 우당 도서관이다. 본적지가 애월읍 하귀리로 되어 있다.

아버지가 납북될 때 둘째 형도 납북되었는데 2003년 제8차 이산가족 상봉 당시 둘째 형이 살아있음이 알려졌다. 당시에는 김우중도 도망다닐 때라서 만날 수는 없었지만.

베트남에서 청년사업가 양성 사업에 전념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대우그룹 경영 약 30년동안 해외에 있던 시간이 17년이라고 하며 총 이동한 거리가 954만 km로 지구 240바퀴를 돈 양이라고 한다.

자서전의 제목이자 그의 격언인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2016년 한 언론 매체에서 조사한 '기업인들의 명언순위'에서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참고로, 1위는 정주영 회장의 "이봐. 책임자. 해 보긴 해 봤어?", 2위는 이건희 회장의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꿔라."였다.

2012년부터 싱가폴 대학교의 신장섭 교수가 그와 극비리에 2년동안 나눈 비공개 대담록을 엮어 만든 '김우중과의 대화'가 2014년에 출판되어 잠시동안 베스트 셀러에 오르는 등, 대중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서울대학교의 '근대법학교육백주년기념관'의 대강당 이름이 '주산기념홀'인데, '주산(宙山)'이 바로 김우중의 아호이다. 그와 같이 이름을 붙인 까닭은, 위 기념관을 건립할 때 공사비를 가장 많이 대어 준 사람이 바로 김우중이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동아건설 회장 최원석, 서울방송 회장 윤세영도 출연을 하였다.

대한축구협회의 회장으로써 명성이 커서 가려진 감도 있는데, 부친의 영향을 받아 바둑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1983년 한국기원 2대 협회장을 지내기 시작하면서 프로 기사들을 대우그룹 임직원들의 바둑 선생으로 위촉하면서 그룹 차원에서 바둑에 소양을 쌓도록 했고, 홍익동 한국기원 기증과 국제기원 창설 등 바둑사업에 큰 공헌을 해 한국 바둑의 중흥기를 이끈 공헌자라는 높은 평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