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 억지스러운 스토리 전개
본문 바로가기

너의 이름은 억지스러운 스토리 전개


2017. 3. 5.

너의 이름은 에서 가장 많은 비판을 받는 부분은 극을 이끌어 가기 위한 뜬금없는 설정, 캐릭터들의 현실적이지 않은 행동들, 주된 전개가 억지스럽다는 점이다. 스토리는 진부한데 연출이 멱살잡고 리드한다는 지적도 흔히 나온다. 그래서 엔딩이 끝나고 아쉬움과 공허함을 느끼는 사람도 많은듯하다.



대부분 비판은 큰 대주제인 "간절함"과 "인연"을 연출하기 위한 미디어적 허용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위한 템포조절 과정에서 쳐낸 부분들을 납득을 하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좋게 말하면 관객이 파고들어 해석할 여지를 남겨둔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개연성에 구멍이 뚫려 헷갈리게 되는것.


가장 대표적으로 미츠하와 타키가 몸이 바뀌었을 때의 시간의 차이를 깨닫지 못하는 점이 꼽힌다. 아무리 하루씩이라고 해도 촌구석이라면 모를까 도시에서는 시간대가 다르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는 지적이 나오며 무리수가 아니냐는 이야기가 제법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중간에 9월 13일에 해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때 미츠하는 2013년으로 금요일이고, 타키는 2016년으로 화요일이다. 화요일은 둘째치고 미츠하가 된 타키 기준으로는 화요일이었다가 하루가 지나니 수요일이 아니라 토요일이 되어있다는 점을 눈치채지 못하기는 힘들다. 둘 다 학교 생활을 하고, 수업을 빠질 정도로 불성실하지는 않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날짜를 봤을 것이다.

이에 대한 감독의 설명으로는 이 때 타키와 미츠하의 상태는 일종의 꿈 같은 것으로 설정되었으므로, 우리가 꿈을 꾸고 일어나면 세세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듯이, 시간 개념도 비슷하게 이해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옹호자들은 인간은 대부분의 꿈의 내용조차 기억을 잘 못하는 경우가 많을 뿐더러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라도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세세한 설정 같은 건 따지지 않고 꿈을 꾸기 때문에 연도가 다른 것에 대해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거나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의견이다. 작중 인격 교체에서 깨어난 뒤에는 바뀌었을 때의 기억이 점점 흐려진다는 점을 계속 보여주고, 미츠하와 바뀌지 않게 된 이후에는 마을 이름도 기억하지 못해 풍경만을 단서로 찾아야 했고 나중에는 이름까지 잊어버렸다. 그러나 작중에서 둘은 서로에게 기록물을 남기며 분명하게 의사소통을 하고 몸이 바뀐 후에도 상대방의 대인관계 같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모자람 없는 적응력을 보이면서 한 사람의 완벽한 인간으로 행동하는데 스스로가 상대방의 몸에 들어가 있는 자신이라는 개념도 확실하게 서 있고 서로의 다른 환경을 자신의 방식으로 느끼고 반응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부분에서는 자신의 세계와 상대방의 세계를 분리해서 파악할 수 있는데 유독 연도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는 다분히 작위적이다. 일기를 쓰는 어플만 봐도 당연히 연도가 표시되기 마련이고 미츠하가 타키의 폰에서 대부분의 일기를 봤으면 모를 수가 없다. 감독의 설명 역시 충분한 해명이 되고 있지 못한 판국에 사전 지식 없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강한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감독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원래는 미츠하와 타키의 나이 차를 5년으로 하려 했다고 한다. 5년의 차이라면 날짜와 요일이 완벽하게 일치한다. 그러나 5년씩이나 차이나면 30살까지 노처녀로 있었을 미츠하도 불쌍하고... 관객들도 가엽게 여길까봐 대중성을 생각해서 약간의 오차가 있더라도 기간을 줄여 3년 차이로 조정했다고 한다. 다만 나이 터울이 5년인 원안 역시 ‘연도가 다르다는 사실만 유독 알아채지 못하는 것도 충분히 부자연스럽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당장 매일 두드리는 폰만 봐도 날짜표시가 되는데다가, 집안에 달력이 하나도 없을리가...심지어 신사라면 더더욱 달력이 중요히 여겨질 것이다. 2017년 1월 6일에 있었던 메가토크에서 관련 질문이 나오자 꿈에서는 날짜가 이상하다고 해서 그것에 위화감을 가진다거나 하진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식으로 무리하게 넘어갔다는 언급을 한다. 감독 본인도 어느 정도는 이게 말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

몸이 뒤바뀌었을 때 성격도 바뀌는 데다 자기가 다니던 학교, 일하던 아르바이트 가게의 위치까지 헷갈려하는 걸 본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 그저 하나의 해프닝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황당하다는 반응도 외국 커뮤니티에서 언급되는 비판 중 하나.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렇다고 이해하는 친구도 있지만, 영화판만 그러면 몰라도 특별판인 어나더 사이드에서는 미츠하의 몸으로 들어간 타키의 경우 아예 대놓고 자기(그러니깐 미츠하의 몸)랑 다른 사람으로 얘기한다. 그 때마다 주위의 반응은 누구에게 말하는거냐고 하는데 그 때마다 타키의 경우 "나에게" 라고 말한다. 당연히 돌아오는 반응은 '얘 또 뭔소리하냐'. 단, 타키, 미츠하 주변인물들은 모두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긴 느낀다. 다만 대부분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저런 면도 좋은데?' 라는 반응도 공통적으로 느낀다. 달리 생각해보면 몸안에 정말 딴 사람이 들어갔다는 상황 자체를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에 결국 나오는 말이 정신병원에 가보라는 말까지 밖에 안간다. 정신병원에 가보라는 말은 미츠하 아버지가 작중에서 언급했다. 물론 영화판에서 생략된 주변인물들의 심리적 상황이 많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전지적 시점 보다는 되도록 미츠하와 타키의 시점으로 묘사하다 보니 벌어진 한계점이라고 볼 수 있다.


미야미즈 미츠하가 운석이 떨어지기 직전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가는데, 운석이 떨어지기까지 남은 시간을 생각하면 아버지의 태도가 너무 급격히 변한다. 영화로만 보면 뜬금없을 수 있는 부분이다. 미츠하가 아버지와 단절되어 있다는 초반부의 묘사와 미츠하의 몸과 연결된 타키가 아버지와 갈등을 빚는 장면에서의 두 사람 간 대화를 연결지어 생각하면 보다 매끄러운 이해가 가능하지만 이것 역시 개연성 논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의도 외전 소설 'Another Side: Earthbound'에서는 심경의 변화가 묘사되어 있지만, 영화는 영화 자체로 설명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생각하면 외전에서의 묘사는 고려할 대상이 못 된다.
자세히 말하자면 이 부분에서 딸과 아내의 모습이 겹치며, 아내의 유언인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해요'의 진짜 의미가 오늘 딸을 구하라는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미츠하는 3년전에 죽어서 저승에 있어야 할 운명이었지만 원래 있어야 할곳은 이승이란 것. 따지고보면 아내가 죽고 자신이 정장 자리까지 오른것도 아내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과, 딸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했던 딸과 가족, 마을을 지키기 위해 결단을 내리게 된다. 정장의 위치를 이용해 재난대피훈련이라는 명목으로 대피시킨 것.

혜성 충돌 직전 짧은 시간에 사람들을 어떻게 대피했는지 나오지 않는다. 많은 리얼리티를 포기하면서 극적 긴장감을 드러내는 연출을 줄곧 유지하기 때문에 관객도 그런 흐름에 맞추어 하이라이트를 쫓아가는데 그 하이라이트 장면을 잠시간 의문점으로 남기면서 넘기고 사건의 해결을 이후에 바뀐 미래에서 타치바나 타키가 당시 자료를 보는 장면이 나오며 거기서 '기적적으로 대피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장이 활약을 했다'는 단순한 텍스트와 장면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스토리 연출에 있어 실망한 관객도 더러 있었다. 반전 연출이라는 것은 이해하나 반전이 임팩트가 있었던 것이 아니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감독은 이에 대해 "작품의 흐름에서 대피하는 장면보다 두 사람의 감정선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뺐다. 또한 관객들이 어떻게 대피했는지 상상하길 바랐다."(이상 파플렛 2탄 Q&A 中)라고 언급했다.

고증 오류라고 볼 수도 있는데, 분리된 혜성핵의 크기에 비해 피해가 매우 적다. 물론 운석이라는게 딥 임팩트마냥 큰 물체가 아니고서야 피해가 생각보다는 작긴 하지만 작중 묘사되는 분리된 혜성 핵은 무지 크다. 게다가 크레이터의 크기를 감안하면, 최소한 전술핵 정도 피해가 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작중 운석 충돌의 묘사는 제대로 되어서 퉁구스카 대폭발 수준으로 묘사됐는데, 아예 사망자가 없다는 건 너무 과소평가된 것이다.....라고 하는데 과학적으로 계산해본 결과 혜성이 분리후 낙하하기까지 1시간 정도의 텀이 존재하기때문에 대피 경로는 충분히 가능하다. 또한 미야미즈 신사에 떨어진 혜성의 크기는 5m 정도 규모로 추정되기 때문에, 전술핵 정도의 피해는 절대 나올수가 없다.

타키와 미츠하가 서로 좋아하게 되는 계기와 감정 묘사가 적어서, 실제로 둘이 언제부터 어떻게 좋아하게 됐는지에 대해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적다는 것도 많이 언급되는 비판점 중의 하나이다. 특히 이 영화의 장르가 로맨스이다보니 이 문제점이 크게 느껴진 관객들도 많다. 둘은 서로 몸이 바뀌기 때문에 직접적인 접촉을 할 수 없었고, 과거의 감정이나 기억을 공유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서로가 정한 규칙을 지키지 않아 완전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근데 미츠하는 갑자기 타키가 보고 싶다고 도쿄로 가고 타키는 선배로부터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냐는 말을 듣는다. 서로 몸이 바뀌는 판타지스러운 상황을 통해 바뀐 몸으로 살아가며 그 아이에 대해 알아가고 그 아이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은 자세히 묘사하지 않은 채 어느새 서로를 좋아하게 됐고, 타키는 미츠하의 손에 좋아한다는 말을 적게 되며, 마지막이 되어서는 서로가 서로를 '소중한 사람, 잊으면 안 되는 사람'으로 표현하며 서로의 이름을 되뇌일 정도인데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럽다고 느낀 관객들도 있다. 이에 대한 주된 반론으로는 호감을 가지게 되는 데에 정해진 시간도, 특별한 이유도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서로의 인생을 대신 사는 것만큼 상대의 긍정적인 점이든 부정적인 점이든 여과없이 느낄 수 있는 경험도 있으니, 사랑에 빠지는 묘사 자체는 적을지언정 개연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의견들이 있다. 또한 타키는 미츠하의 험담을 하던 3인조에게 계속 강하게 반발하면서 미츠하에게는 메모로 너는 좀더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고 격려하는 등 호감을 가질 계기가 어느정도 존재하긴 한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신카이 감독은 "사랑이란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하고 있다고 깨닫는 것이며,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이유는 없다" 라고 설명했다. 어나더 사이드의 경우 타키가 미츠하의 입장을 생각해보면서 살게 되고 자연스럽게 호감을 쌓는 식으로 묘사된다.

두 남녀가 몸이 바뀌었을 때 이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현실에 순응해버리는 부분에 대한 지적도 있다. 우선 몸이 바뀌는 현상에 대해서는 원인은 불명에 해결방법도 불명이므로 너무 막막하니 포기하는게 이해가 가지만, 전화번호는 교환해놓고 둘은 미츠하가 죽는 당일까지 한번도 통화나 문자를 주고받지 않는다. 소설에 "한번 시도는 해봤으나 연결이 안되더라"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단 시도는 해본 것으로 보인다. 다만 미츠하에게 전화를 하려는 타키의 휴대전화를 잘 보면 '긴급상황이 아니면 전화걸지 말 것.'이라고 적혀있다. 애초부터 맘대로 전화하지 말라고 못을 박아둔 셈. 여기서 문제는 왜 21세기에 멀쩡한 전화가 안된다는 것에 대해 일말의 의구심도 품지 않느냐는 것이다. 더군다나 몸이 바뀌었을 때 기록을 남기는 통신방식은 교환일기와 비슷하게 전화나 문자에 비해 상당히 번거로운 방식이다. 몸이 바뀌었을 때 이외에는 소통을 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더러, 몸이 바뀌어서 글을 남겨놨다고 해도 그 글에 대한 상대방의 대답을 들으려면 몸이 한번 더 바뀌어야 하니 몸이 2번 바뀔 때 1번의 대화가 오가므로, 1주일에 2~3번 몸이 바뀐다고 할 때, 1달동안 고작 4~6번의 대화밖에 오갈 수 없다는 소리가 되겠다. 스마트폰이 익숙한 21세기 고등학생들이 이런 답답한 방식으로 대화하려니 전화나 문자생각이 간절할 터인데도 그냥 전화가 안되자 "안되나보네"하고 넘겨버린다.


이는 작품의 진행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연히 둘은 전화는 물론이고 문자조차 주고받을 수 없으며, 만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시간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미츠하가 전화나 문자를 시도한다면 타키 입장에서는 3년 전 시점이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정신나간 소리밖에 듣지 못할 것이며, 이 경우 미츠하는 타키가 자신을 모른다는 사실을 통해 무언가를 알아챌 것이고, 타키가 전화나 문자를 시도할 경우 미츠하 입장에서는 이미 죽은지 3년이나 지난 시점이니 이 경우에도 타키가 무언가를 알아챌 것이다. 또한, 서로 전화나 문자가 아니라 몸이 바뀌었을 때 기록으로 어디서 만나자라고 약속을 하더라도 둘은 만날 수가 없다. 타키가 만나자고 적어놓고 찾아가면 미츠하는 죽어있을 테니 못나올 것이며, 미츠하가 만나자고 적어놓고 찾아가면 작품 후반부처럼 우연히 타키를 발견할 수는 있겠으나 당연히 타키는 못알아본다. 이 경우에도 타키나 미츠하가 무언가를 알아챌 것이다. 즉, 전화나 문자가 안되는 이유에 대해 파고들다 보면 미츠하가 이미 혜성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 빨리 알려질 수도 있다는 것.

혹은 둘에게 일어난 일을 꿈 혹은 망상으로 만들기 위해 둘이 현실에서 만나는 것을 의도적으로 막았다고 볼 수도 있다. 미츠하가 우연히 타키를 찾아갔을 때, 타키가 못알아보자 그냥 체념하고 돌아서는 장면에서 시간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차분히 "내가 그 선배랑 데이트 약속 잡아준거 기억 안나?"라던가 "너 항상 나랑 몸 바뀔때마다 내 가슴 주물렀던거 기억 안나?" 등의 질문정도는 해볼 수도 있었지만 미츠하는 아침부터 난데없이 휙 도쿄까지 건너와서는 타키가 못알아보자 그냥 "생각 안나니?" 한마디 던지고 돌아서버리는데, 자신의 망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타키의 경우에도 선배와 친구에게 어떻게든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다가 결국 자신의 망상이었을 것이라며 미츠하를 찾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이런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꿈에서 깨고 난 후 둘은 완벽하게 남남이 되고, 서로의 현실로 돌아오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잠에서 깬 후에도 둘이 계속 전화나 문자를 통해 연결된다면, 둘에게 일어난 일, 즉 몸이 바뀌는 현상은 더 이상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

비판점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후반부가 시작되면 시점이 타키에게로 이동하며, 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타키의 입장에서 풀어나가는 구조가 되어 미츠하의 이야기나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아쉬움의 목소리도 있었다.

혜성 충돌은 역사적으로 유례가 드문, 엄청나게 충격적인 사건이므로 타키가 그린 '호수 그림'만 보아도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보는 것이 정상이다.(마치 우리나라에서 여객선이 뒤집어진 그림만 보면 누구나 세월호의 비극을 떠올릴 수 있듯이.) 그런데 타키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그 그림을 잘 알아 보지 못한다. 더구나 타키가 그 마을을 찾아가는 시점에서는 미츠하와 협력하여 대피시키기 전이므로 수백명의 희생자를 발생시킨 크나큰 사건인데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