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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원자폭탄 피해자의 인터뷰 '피해자 코스프레'



미국 진주만 폭격으로 세계2차대전을 일으켰던 일본에게 이 방법 말고는 일본의 항복을 빠르게 받아내기 힘들었다.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직전까지 일본이 항복을 거부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며, 아래에서 주장하는 일본의 교섭 내용은 휴전 내지는 무승부 수준의 조건이라서 연합군이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그때 당시 미국 여론은 전쟁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몰락 작전 같은 대규모 군사 작전을 시행하기 꺼릴 수밖에 없었고, 또한 만주 작전이 유례가 없을 만큼 빠르게 성공한 것이지, 소련이 참전했다고 100만이 넘는 일본 관동군이 1주일만에 깨지기라고는 일반적으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결국 원폭 투하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몰락 작전이 실행되어 일본의 사상자는 급증했을 테고, 모 제독의 말처럼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말이 됐을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에 일본에 대한 전략 폭격을 담당하던 커티스 르메이 소장이 도쿄에 네이팜탄 폭포를 퍼부어 모조리 태워버린 작전을 쓴 이유에서도 나타난다. 저 작전을 시행하기 이전에 커티스 르메이가 상관으로부터 받은 명령이 "몰락 작전이 시행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본의 산업역량을 무력화시켜라"였다.

실제로 트루먼이 핵투하를 결정한 건 일본이 항복을 논의한 건 3건에 불과하고, 결사항전을 결의한 정보는 13건에 달한다는 사실을 울트라 특수도청팀이 도청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여기에는 당시 일본 외무재상이 주소일본대사에게 "우리는 러시아에게 무조건 항복 같은 중재를 요구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더군다나 미국이 원폭 투하와 전후처리를 서두른 이유 중에 하나가 소련의 대일 행동을 의식해서란 말도 있다. 일본 본토가 직접적인 전장이 된다면 소련이 일본 열도의 일부를 점령할 가능성이 크고, 이것은 4년 가까이 태평양에서 거의 혼자서 일본을 상대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도 스탈린이 트루먼에게 8월 내내 홋카이도의 남북 분할을 요구했지만 트루먼이 무시했던 바가 있다.

현실적인 의미에서 보더라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가 한국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보면, 이 원폭투하가 조금이라도 일본의 항복을 앞당겼으면 앞당겼지 그 반대의 효과는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만약 원폭투하가 일어나지 않고 일본 본토 결전이 일어나는 형식을 취하면서 훨씬 뒤에 일본이 항복했더라면 미국·소련에 의해 분단되는 것은 일본이었을 것이고, 한국은 분단을 피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 경우엔 전쟁 양상에 따라서 한반도가 전쟁의 직접적인 참화를 입을 수도 있었고, 소련 휘하의 공산국가가 되었을 확률이 존재한다. '공산국가가 뭐가 나쁘냐?'라고 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 이후이다. 공산주의를 순수하게 다 받아들여 사적 소유를 철폐한 국가는 하나같이 생산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사적 소유를 철폐한 관계로 현재 쿠바를 제외하면 대부분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망해버렸으며, 오히려 자본주의로의 복귀 이후 노동자 민중의 삶은 답 없는 막장 헬게이트로 빠져들었다. 쿠바도 딱히 서구 민주주의,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잘 산다고 보긴 매우 어렵다. 즉 소련 휘하의 공산국가가 되었다 하더라도 수많은 공산국가들처럼 부족한 생산력과 국유화된 집산 경제 사이의 모순에 봉착했을 것이란 이야기다. 북한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실 학살이라는 부분도 머리 아픈 부분이 있다. 민간인 지역에 대한 공중폭격이라는 것만 보면, 떨어진 폭탄의 종류만 다를 뿐이지 일반적인 공습이나 원자폭탄 투하나 그놈이 그놈이다. 2차대전으로 한정지어도 영국 대공습이나 드레스덴 폭격, 도쿄 대공습은 일상적인 전투행위이고,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투하만 별도로 떼어서 학살로 볼 이유는 없다. 도시를 거의 소멸시켜버리고, 군사적 목적보다 압도적인 민간인 피해를 냈다는 점에서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이 과정에서 영국의 코벤트리나 독일의 드레스덴은 수 년간 도시가 소멸해버렸을 정도였다. 이걸 학살로 부른다면 전략폭격기는 학살무기라고 불러도 이론이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일본 제국은 엄청난 악의 제국이었다. 당장 731부대의 경우만 하더라도 살아있는 사람을 생으로 잡아다 생체실험과 이를 빙자한 그냥 살육 파티를 벌였다. 또한 난징대학살 같은 짓거리나 저지르고 다녔으며, 100인 참수 경쟁 같은 절정의 미친 악행을 여러 번 자행하는 나라였기에 이 짓거리를 막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주민들의 무고함 여부는 훨씬 중요한 문제에 의해 뒷전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이 기회도 안주고 느닷없이 원자폭탄을 투하한것도 아니다. 포츠담 선언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이미 사이판 전투의 결과로 일본의 본토가 B-29의 폭격 범위에 들어가게 되었고. 45년 상반기엔 도쿄 대공습을 비롯한 굵직한 폭격 세례들이 날아왔고 이로 인해 일본은 궤멸적인 피해를 이미 입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항복하지 않고 연합국의 요구에 비협조적으로 굴은것이 바로 일본이다. 이는 정말로 바보 같은 행위인게, 협상에 있어서 무조건적으로 자기 주장만 하거나 상대방의 요구만을 들어준다면 상대는 자신을 협상 가치가 없다&호구로 볼것인데, 전자의 경우를 초래한것은 바로 일본 자신들이었다. 결국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일본의 고집이 원자폭탄 투하를 피할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