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실존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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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실존 인물들


2014. 9. 12.

막시무스

영화의 주인공인 막시무스의 모델이 된 인물로 기병대장이었던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라는 인물이 있다. 이 무렵 마흔 살 안팎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그는 원래 판노니아 속주 출신으로 로마 군단에서 밑바닥부터 갖은 고초를 겪으며 출세한 인물이다. 파르티아 전쟁 때 두각을 나타내어 인정받았고, 게르마니아 전쟁 때는 기병대 지휘를 맡았다. 그가 지휘한 '제1 울피아 기병대'의 기지는 빈과 부다페스트의 중간에 있는 아라보나(오늘날 헝가리의 지외르)이다.

게르마니아 전쟁때 그가 세운 공은 나리스테 족장과 일대일로 겨루어 상대를 쓰러뜨린 일이다. 야만족은 족장이 죽으면 순식간에 무너진다. 나리스테족은 마르코마니족 산하에 있는 부족이었다. 그들이 전선을 이탈하자 마르코마니족의 세력은 크게 약해졌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일부러 전군을 모아놓고 그 앞에서 기병대장 막시미아누스의 전공을 칭찬했다고 한다.

이후 막시미아누스는 186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는데 186년은 코모두스가 제위에 오른지 6년이 지난 해이다. 변경에 근무하는 군단장은 보통 황제의 추천으로 집정관 선거에 입후보하고, 황제 추천이라는 이점을 살려 당선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다시 말해서 막시미아누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죽은 뒤에도 최소한 6년 동안은 전선에서 사령관으로 계속 근무했다고 볼 수 있다.



코모두스

막시무스와 대립 관계를 이루는 코모두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들로 마르쿠스 황제 생존시에 이미 마르쿠스 황제와 공동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 흔히 말하는 왕위 계승자가 아닌 동격의 황제로서 존재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러므로 코모두스에게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죽일 이유가 없었다.

원래 마르쿠스 황제와 공동 황제로 있었던 인물은 마르쿠스 황제의 동생인 루키우스 베루스였다(그는 마르쿠스 황제의 딸인 루실라의 남편이기도 하다.). 169년 그가 젊은 나이에 죽고난 후 마르쿠스 황제는 175년 7월 7일 로마에 있던 코모두스를 전선으로 불러들여 그에게 '프린켑스 유벤투티스'(젊은 제일인자)라는 칭호를 주었다. 황제에게 이 칭호를 받았다는 것은 '황태자'가 되었다는 얘기였다. 당시 코모두스는 14세 생일을 두달 남겨놓은 소년이었으나 나이도 차기 전에 예정을 앞당겨 성년식을 치르고 황태자로 선언한 것이었다.

176년 가을에 황제 일행은 수도로 돌아왔고 11월 27일에 게르만인에 대한 승리를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황제와 황태자를 주인공으로 한 개선식이 있었다. 177년 1월 1일, 이날은 15세의 코모두스가 처음으로 집정관에 취임하는 날이었는데 새 집정관 취임 연설이 끝난후 마르쿠스 황제는 중대한 선언을 했다. 그것은 아들을 공동 통치의 파트너로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서 코모두스는 로마군 최고사령관만이 행사할수 있는 '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그누스'(최고통수권)과 일반 시민의 권익을 보호하는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호민관 특권), 병사들에게 '임페라토르'라는 호칭으로 불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코모두스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최고제사장'의 직위로 이것은 항상 한 사람만이 맡는 것이 로마의 전통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외에 코모두스의 지위는 마르쿠스 황제와 동격이 된 것이다. 그러한 코모두스가 마르쿠스 황제를 살해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후대의 역사서에도 마르쿠스 황제의 죽음이 타살이었다는 이야기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 유일한 예외가 디오 카시우스의 저술이지만 이 경우에도 마르쿠스의 시의가 코모두스의 총애를 받으려고 황제를 독살한 것 같다는 소문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마르쿠스가 죽은지 10년이나 지나서 코모두스 황제의 실정이 드러나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코모두스가 직접 검투사 시합에 나서서 막시무스와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코모두스 황제가 검투사 시합에 참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설정이다. 코모두스는 스스로를 유피테르 신의 아들인 헤라클레스와 비교하고는 하였다. 실제로 코모두싀 황제의 칼솜씨는 매우 뛰어난 것이어서 프로 검투사와도 막상막하로 겨룰수 있었다고 한다. 187년의 검투시합에서 그는 경기장에서 관중 앞에 직접 칼솜씨를 선보였으며 이로 인해 '검투사 황제'라는 별명이 붙었다.

코모두스는 제위에 오른지 12년이 지난 192년 12월 31일에 황제의 애첩 마르키아와 황제의 침실 담당 하인인 에클렉투스, 코모두스의 레슬링 코치인 나르키소스에 의해 살해 당한다. 영화에서는 검투사 시합 중에 사망하지만 실제 죽음은 황궁 욕실에서 목졸려 살해 당했다.





루킬라

영화에는 코모두스의 누이인 루킬라가 등장한다. 영화에서는 코모두스에 의해서 억압받고 그의 폭정을 막기 위해 막시무스를 도와주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루킬라는 마르쿠스 황제와 공동 황제였던 루키우스 베루스의 부인이었다. 또한 그로 인해 아우구스타(황후)라는 칭호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루키우스가 젊은 나이에 죽자 마르쿠스 황제는 그녀를 자신의 부하 장군과 결혼시키는데 그가 바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라는 인물이다.

그는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난 시리아인으로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야 로마 시민권을 얻은 속주 출신이다. 황제의 사위로 뽑혔을 당시 그는 '먼 판노니아' 속주 총독과 부다페스트에 기지를 둔 제2 아듀트릭스 군단의 군단장을 겸하고 있었다. 폼페이아누스를 사위로 고른 것은 정치적으로는 성공적이었으나 인간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루킬라는 남편의 낮은 출신 성분을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재혼한 뒤에도 계속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쓴다는 타협책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후 마르쿠스 황제가 죽은 뒤 코모두스가 단독 황제가 되었다. 루킬라는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진 것을 느꼈지만 아직 그녀는 단독 '황후'였다. 그런데 코모두스가 단독황제가 된지 2년 뒤인 182년에 코모두스 황제의 아내인 크리스피나가 잉태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것은 헛소문이었으나 소문을 들은 루킬라는 흥분했다. 혈통에 집착하는 루킬라에게 한낱 원로원 의원의 딸에 불과한 크리스피나가 황후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루킬라의 어머니 파우스티나의 경우처럼 '황후'라는 칭호는 첫 아이를 낳았을 때 받는 경우가 많다. 루킬라는 이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고 결국 그녀는 황후의 지위를 줄 권리가 있는 유일한 인물인 황제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황제 살해 음모는 탄로나 버렸고 관련자들은 모두 처형을 당했다. 루킬라는 카프리 섬으로 귀양을 갔지만 곧 살해당했다고 한다. 그전까지 폭군의 모습을 보이지 않던 코모두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폭군의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영화에서 마르쿠스 황제는 로마를 공화정으로 되돌리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실제 마르쿠스 황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당시는 로마에 제정이 성립된지 거의 2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고 그때에는 누구도 제국이 공화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생각은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이미 로마인들 사이에 인식이 되어 있었고 황제체제가 문제 없이 유지되던 마르쿠스 황제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마르쿠스 황제와 막시무스와의 대화 장면에서 마르쿠스 황제는 자신의 치세가 정복을 위한 치세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제국의 안전 보장을 위한 방위전의 성격이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전 황제였던 안토니누스 황제 치세까지는 로마 제국에 평화가 계속되었으나 마르쿠스 황제의 치세가 시작되면서 제국의 안전보장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르쿠스 황제의 능력을 떠나 시대의 움직임이 그러했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야만족의 대이동이 그것이다. 그로 인해 로마제국의 변경은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되었고 실제로 방위선이 뚫린 일도 있었다. 그렇기에 마르쿠스 황제는 제국의 방위를 위해 전쟁을 치루어야 했던 것이다.


180년 3월초 마르쿠스 황제의 병세가 심각해졌다. 그는 아들 코모두스와 주요 장군들을 병실로 불러 총독이나 군단장으로서 제2차 게르마니아 전쟁을 치르고 있는 장군들에게 두 가지 유언을 남긴다.

첫째, 코모두스를 도와 제국의 안전을 유지하는 데 진력해달라. 내란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된다. 둘째, 게르마니아 전쟁을 계속해달라. 아마 올 가을에는 군사력으로 야만족을 제패하여 속주화의 첫 단계를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유언을 끝낸 황제는 약도 식사도 거부했다. 물조차 마시지 않고 죽음을 기다렸다. 로마의 남자들은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목숨을 연장하는 것을 수치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180년 3월 17일 59세의 생일을 한 달 앞두고 마르쿠스 황제는 숨을 거두었다. 이로서 코모두스는 18세 5개월밖에 안된 나이로 단독 황제가 된 것이다. 이후 황제의 유언은 잘 지켜져서 코모두스의 제위 기간 동안 장군들에 의한 반란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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