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23.
1992년,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의붓아버지 김영오에게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하던 20대 여성 김보은이 남자친구 김진관과 함께 의붓아버지를 살해한 사건. 남자친구의 이름까지 더해서 '김보은·김진관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쉬쉬했던 가족에 의한 성폭행의 문제가 공개적으로 제기되었다. 실제로 당시 상담기관에서는 많은 가정 성폭력 사례가 접수되고 있었으나, 여성인권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미미하고 보수적인 국민 정서 때문에 숨겨지고 있었고 언론에서 공개적으로 떠오른 것은 이 사건이 최초였다.
사건의 이름에서 언급된 '김보은'은 이 사건의 피고인이자 살인범인 동시에 성폭행 피해자라는 점을 밝힌다. 사건 당사자의 실명을 밝히는 것이 인권이나 사생활 침해 등의 문제로 적절하지 않다는 논란이 있었으나, 이 사건의 경우 유영철 연쇄살인 사건이나 오원춘 사건처럼 당대에 상당히 이슈가 되었던 사건이고, 김보은은 이 사건의 가해자이므로 실명을 밝히는 것이 도의에 어긋나지는 않는다. 다만 후술될 내용이지만 김보은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기에 애매하긴 하다. 당사자인 김보은과 김진관은 현재 개명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보은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으며, 이후 그녀가 7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김영오'라는 공무원과 재혼을 하였다. 드디어 자신에게도 아버지가 생겼다며 기뻐했던 김보은의 생각과는 달리, 이 자는 인간의 도리를 벗어난 짐승과 다름이 없는 쓰레기였다. 의붓딸에게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해댔던 것이다. 그것도 그녀가 고작 만 9세에 불과했을 때부터!
심지어 김영오는 사건 당사자인 김보은 이외에도 여러 사람에게 강간을 일삼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검찰 관계자였기 때문에 거듭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다. 훗날 사건이 터지고 나서도 검찰이 재판정에서 그를 지나치게 옹호하여 굉장히 큰 논란이 되었다. 덤으로 자신의 직위를 악용하여 음란물 단속 시 압수한 물건을 자신이 집에 가져와서 '수사 참고'를 이유로 감상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심지어 김영오는 김보은을 강간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고 하며,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뉴스 라이브러리에 보면 김보은이 새아버지가 어머니와 자신을 같이 눕혀놓고 번갈아 성행위를 하기도 했다고 진술하는 그 당시 신문 기사도 볼 수 있다. 조금의 죄책감도 없이 김보은이 성인이 될 때까지 10년 이상 이런 짓거리를 계속했으며, 심지어 '내가 너와 네 엄마 둘 모두와 관계했으니 이제 엄마를 형님이라고 부르라'며 낄낄대기까지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반면 그 아버지에 그 아들들이라고 김영오가 전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들도 김보은을 추행하려 들었는데, 김영오가 엄청나게 분노하며 아들들을 무지막지하게 폭행해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유가 가관인데 성추행이 나빠서가 아니라, 보은이는 아버지 것이기 때문에… 나중엔 뉘우치면서, 그들마저도 '친누나가 어릴 때 죽은 게 다행'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자기 친딸이라도 살아있었으면 분명 보은이처럼 되었을 것이라면서...
이 당시 사회 분위기가 패륜 살인에 대해 동정론이 일기는 힘든 시기였는데, 이건 뭐 밝혀지는 족족 쌍욕이 튀어나올 사실만 나오니 지상파고 신문이고 결국은 한 목소리로 동정했다. 만약 막장 부모에 대한 인식이 당시보다 훨씬 나빠진 2010년대 이후에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면 동정여론이 더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김보은은 한 대학교의 무용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드디어 김영오에게서 떨어져 자유를 누리나 했더니 김영오가 김보은의 모든 행동의 자유를 하나하나 간섭하기 시작했다. '너 수업 시간표 좀 보자. 이 시간이 수업 시간이구나. 수업 시간 외에는 기숙사에 쳐박혀있어라. 그리고 주말에는 무조건 충주로 내려와라' 이런 식으로. 그리고 주말에는 반드시 집에 오도록 협박하여 성폭행을 저질렀다.
그런 와중에 김보은에게 남자친구(김진관)가 생겼다. 자신과 데이트할 시간이 없는 것을 궁금해한 김진관이 그 이유를 캐묻자 김영오의 행동이 너무 견디기 힘들었던 김보은은 결국 김진관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게 되었다. 큰 충격을 받은 김진관은 이 문제로 계속 갈등하다가 결국 '김영오를 처단한 후 강도 사건으로 위장할 것'을 김보은과 공모했다. 김진관은 범행 전날 서울 창동시장에서 범행에 사용할 식칼, 공업용 테이프, 장갑 등을 구입하여 범행 장소인 충주에 내려갔다. 그 후 김보은과의 전화 통화로 범행 시간을 정하고, 범행 당일 새벽 1시 30분 경 김보은이 열어준 문을 통하여 집안으로 들어갔다. 김영오는 술에 취하여 잠들어있는 상태였고, 김진관은 김영오의 방에 들어가 머리맡에서 식칼을 한 손에 들어 김영오를 겨누고 양 무릎으로 양 팔을 눌러 꼼짝 못하게 한 후 깨웠다. 김진관은 체대생으로 덩치와 힘이 좋았는데 그런 사람이 누르고 있는 데다가 잠이 덜 깬 상태이니 제대로 반항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상황. 그 상황에서 '김보은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놓아주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몇 마디 하다가 들고 있던 식칼로 심장을 공격하자 김영오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김보은과 김진관은 강도살인을 당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하여 숨진 김영오의 양 발목을 공업용 테이프로 묶은 다음 현금을 찾아 없애고 장농, 서랍 등을 뒤져 범행 현장에 흩어 놓았다. 또 김보은이 강도에게 당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김보은의 브래지어 끈을 칼로 끊고 양 손목과 발목을 공업용 테이프로 묶었다. 김진관은 달아나고 김보은은 양 손목과 발목이 공업용 테이프로 묶인 채 옆집에 가서 강도를 당했다고 허위로 신고한다. 사건 당시 김보은의 나이 만 19세였다.
이 사건은 의도대로 단순 강도 사건으로 끝날 수도 있었는데, 어느 경찰관이 왜 의붓아버지와 딸이 한 방에서 같이 잤지?라는 사실에 의문을 품었다. 친아버지라도 성장한 딸과 아버지는 같은 방에서 잠을 자지는 않는데, 대학까지 들어가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성인이 친아버지도 아닌 의붓아버지와 한 이불을 같이 덮고 잤던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한 경찰관은 김보은을 떠보기 위해 슬쩍 이런 말을 던졌다고 한다.
"야, 방금 병원 응급실 가서 너희 아버지 봤는데 살아있더라?"
"안 돼! 안 돼!!"
실제 강도 살인이었다면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도하거나 기쁜 반응을 보였어야 하는데, 이렇게까지 기겁하는 것을 보고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을 한 경찰관은 사건을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한다.
이 사건은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불러왔다. 아무리 의붓아버지라곤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인데 어떻게 아버지가 딸을 강간할 수 있느냐, 죽어도 싸다는 공분을 샀다.
법원은 김보은에게 정당방위의 요건 중 하나인 '현재의 부당한 침해'가 있다고 볼 여지가 있음을 인정했다. 지금 현재 성폭행을 당하거나 당할 위험이 있진 않지만,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볼 때 언제 갑자기 일어나서 성폭행을 할 지 모른다는 논리다. 하지만 김영오를 살해한 행위가 사회 통념 상 사회적 상당성을 결여하여 정당방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방에서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서' 살해한 행위를 정당방위로 인정하긴 어렵다는 것. 마찬가지로 김진관에게도 정당방위 성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사건에서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정당방위의 현재성은 인정될 수 없고 긴급피난의 현재성만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보충성 또는 균형성이 결여되어 긴급피난도 성립될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정상을 참작하여 형량 자체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낮게 인정되었다.
김진관에게 징역 5년, 김보은에게 징역 3년·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두 사람은 김진관의 복역 이후 헤어졌다. 김진관의 가족들이 두 사람이 너무나 끔찍한 사건을 겪었기에 함께 있으면 평생 그 상처를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김진관의 가족들은 김보은을 전혀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동정했으며, 김보은이 자신의 어머니보다 김진관의 부모님을 먼저 찾아뵙고 울며 빌자, 부친은 "네 잘못이 아니니 너무 괴로워 말고 앞으로 열심히 살아라"라고 다독여주기까지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