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년만에 잠 깬 포함 ‘메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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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5년만에 잠 깬 포함 ‘메리로스’


2014. 7. 8.

545년 7월19일,맑게 갠 일요일 아침. 전함 235척에 3만 병력을 태운 프랑스 함대가 전투 대형을 갖추고 영국군 해군기지인 포츠머스항 앞바다를 가로막고 있었다. 영국 함대의 전함은 고작 60척. 그러나 영국왕 헨리 8세는 수적인 열세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바닷가 포대에 대포를 많이 배치해 놓은 데다가,프랑스 함대를 격파할 히든 카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바람이었다. 웬일인지 아침부터 바람이 불지 않았다. 프랑스 전함은 노를 젓는 갤리선이어서 바람과 상관없었으나 영국 전함은 바람이 불어야만 움직이는 범선이었다. 바닷가 보루에서 양쪽 함대를 지켜보는 헨리 8세의 가슴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당장이라도 프랑스 함대가 몰려 들어오면,영국 함대는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너질 것이 뻔했다. 바람이 없으면 비장의 카드도 무용지물이었다.

헨리 8세는 프랑스군이 움직이기 전에 바람이 불어 주기를 애타게 고대했다. 하늘이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어느 순간 축 늘어져 있던 영국 전함들의 돛이 팽팽해지더니 바다 쪽으로 불룩해졌다. 조수도 흐름을 바꾸었다.

영국 함대의 기함(旗艦·함대사령관이 탄 지휘선) 그레이트해리호가 꿈틀하더니 앞으로 나아가자 거함 메리로스호가 바짝 따르고,그 뒤를 함대 전체가 천천히 따랐다. 바닷가에 대기한 영국 군인들의 눈은 기함 그레이트해리호가 아니라 그 뒤를 따르는 메리로스호에게 쏠렸다. 지휘는 기함이 하겠지만,실제로 해전의 승패는 메리로스호에 달려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메리로스호는,1509년 헨리 8세가 왕이 되자마자 직접 명령해서 만들었다. 당시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데다가(670t),대포를 91문이나 갖춘 포함이었다. 게다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우람한 청동 대포를 1문 장착하고 있었다. 그것은 왕이 유럽에서 제일 가는 포장(砲匠)인 오웬 형제에게 특별히 주문해 만들었다.

이 거포는,이를테면 함대함 미사일이었다. 당시의 대포는 사거리가 짧아 배들이 서로 접근해야만 포격을 할 수 있었는데,메리로스호의 거포는 사거리가 길어 적에게 다가가지 않고도 멀리서 격침시킬 수 있었다. 접근전을 하면 이겨도 어느 정도 피해를 보기 마련인데,이쪽은 손가락 하나 다치는 사람 없이 적을 물리칠 수 있으니 그야말로 무적이다. 왕은 자신의 히든 카드인 메리로스호가 프랑스 함대를 풍비박산 내는 모습을 그리며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메리로스호의 돛이 바람을 한껏 머금었다. 배 옆구리 가운데쯤에 있는 포문들은 벌써 활짝 열려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포문들이 물위에서 겨우 40㎝ 높이에 있었다. 선체가 흘수선보다 더 위쪽까지 물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물결이 높아지면 바닷물이 포문 안으로 들이칠 것 같이 위태위태했다. ‘아니 어쩌자고 저렇게 짐을 많이 실었을까?’ 보는 사람마다 가슴이 졸아드는 듯했지만 설마 저렇게 큰 배에 무슨 일이 있으랴 했다.

메리로스호에는 열네 살부터 마흔네 살에 이르는 병사가 700명이나 타고 있었다. 그것은 메리로스가 태울 수 있는 415명보다 285명이 더 많은 숫자였다. 그들이 쓸 중장비까지 합쳐 25t이나 초과했으니 배가 깊이 잠길 수밖에 없었다.

메리로스는 거함의 위용을 뽐내며 프랑스 함대를 향해 나아갔다. 그런데 배가 항구에서 1.6㎞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난데없이 강한 돌풍이 몰아쳤다. 공교롭게도 메리로스호가 배 옆구리의 포문을 적진으로 향하게 하려고 급히 뱃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던 참이었다.

강풍에 휘말리자 배는 오른쪽으로 기우뚱했다. 그 때문에 오른쪽 포문들이 물에 잠겨 배가 더 빨리 기울어졌다. 왼쪽에 있던 대포들까지 오른쪽으로 굴러가 처박히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모든 것이 ‘어어’하는 사이에 일어났다.

병사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바닷가에까지 들려 왔다. 갑판 위에 늘어서서 시위에 화살을 재고 있던 궁수와 대포 뒤에 서서 화약에 불 당길 준비를 하고 있던 포수들은 적군이 배 안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둘러친 그물에 걸려 배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헨리 8세는 그만 눈을 감았다. 왕의 옆에 서 있던 한 귀부인은 까무러쳤다. 그녀는 메리로스호 부함장인 조지 캐루 백작의 부인이었다.

마지막 숨을 토해 내듯이 길게 내뿜은 뱃고동 소리. 그 서글픈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메리로스호는 파도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거함이 있던 자리에는 포문을 통해 쓸려 나온 병사 30여명만이 물결에 떼밀려 허우적대고 있었다.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까지도 그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그때 메리로스호는 대포와 궁수들이 거의 다 배 위쪽에 있었으므로 아래쪽이 가벼웠다. 배가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급하게 뱃머리를 돌린 데다 거센 돌풍에 휘말렸으니 무게가 한쪽으로 쏠려 쓰러졌으리라는 가설이 제일 그럴 듯하다.

1840년 어느 날 포츠머스 항구에서 잠수부로 일하는 존 딘이라는 사나이에게 어부 몇 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그물이 바다 밑의 무엇엔가 걸려 있으니 좀 풀어 달라고 사정했다. 딘이 잠수해 보니,그물은 굵은 나무에 걸려 있었다. 주변에는 옛날 대포 몇 문이 묻혀 있었는데,1535년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1535년에 만든 대포라면 가라앉은 장소로 보아 메리로스 호의 것이 틀림없었다. 딘이 그 대포를 건져 올리자 메리로스 호는 한동안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물살 거센 소울런트 해협의 12m 해저에 묻힌 배를 건져올릴 기술이 없었다. 얼마 못 가 메리로스 호는 다시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메리로스가 가라앉은 지 420년 만인 1965년. 전쟁사학자 알렉산더 매키가 포츠머스 항구 앞바다에 가라앉은 옛날 배들을 찾으려고 소울런트 해협에 나타났다. 신문기자이자 아마추어 다이버이기도 한 그는 고고학자인 마거릿 룰과 함께 매년 여름 주말마다 소울런트 해협을 찾아 바다 속을 뒤졌다.그들은 처음에는 아무 난파선이나 찾으려 했으나 얼마 지나자 메리로스 호만 찾기로 했다. 포문을 달고 대포를 설치한 서유럽 군함 중에서 제일 오래된 배여서 고고학적 가치가 높은 데다 선체가 바다 밑바닥 흙에 묻혀 별로 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다 밑을 뒤진 지 6년째 되던 1970년. 매키는 오래된 해도(海圖) 한 장을 구했다. 그 지도는 존 딘이 그물을 건지려고 하다가 메리로스 호를 발견한 다음해인 1841년에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메리로스 호가 가라앉은 위치가 똑똑히 표시되어 있었다. 그해 가을 매키와 룰은 수중 음파 탐지기를 써서 메리로스 호를 찾아냈다. 배는 60도 가량 기운 채 뻘에 7m쯤 파묻혀 있었다. 그들은 먼저 대포를 몇 문 건졌다.

1971년 봄 두 사람은 ‘메리로스 호 보호위원회’를 만들어 스쿠버 다이버들을 이끌고 메리로스 호를 샅샅이 조사했다. 그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거센 물살과 콩국물같이 흐린 시계(視界) 탓이었다. 카리브 해처럼 맑다면 한두 주일 걸릴 일도 소울런트 해협에서는 서너 달이 걸렸다.배는 드러난 좌현 쪽은 거의 없어져 버렸지만 뻘에 파묻힌 우현 쪽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매키는 흙 위로 삐죽 솟은 참나무 들보들을 보았을 때부터 그 배를 통째로 건져 올리겠다고 마음먹었다.

1975년 찰스 왕세자가 처음 잠수한 것을 시작으로 메리로스보호위원회는 배에 남아 있는 유물들을 건져 올렸다. ‘난파선 보호법’ 때문에 배 안에는 손을 댈 수 없었으므로 겉으로 드러나거나 둘레에 흩어진 물건부터 건졌다. 그 일만도 4년이 걸렸다.1979년 메리로스보호위원회가 메리로스보존위원회로 바뀌었다. 위원회는 국가사업으로 배를 건져 올려 복원하기로 했다. 총재는 찰스 왕세자가,회장은 에릭 드레이크 경이,수석 고고학자는 룰이 맡았다.

배 안에 있는 물건들은 430여년 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밀물과 썰물이 들고날 때마다 아주 가는 흙이 배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틈이란 틈은 몽땅 메운 덕분이었다. 탐사대가 처음 발견한 것은 한 사나이의 뼈였다. 그의 등뼈에 화살 한 뭉치가 든 가죽주머니가 가죽끈으로 묶여 있었다. 나중에 배에서 찾아낸 활은 모두 139개,화살은 2,500개였다. 모두 조금만 손질하면 언제라도 쓸 수 있을 만큼 보존상태가 좋았다.

가죽으로 만든 벙어리장갑도 여러개 나왔는데,모두가 왼손 것이었다. 불화살을 쏠 때 왼손이 불에 데지 않도록 지켜준 방염장갑이었다. 메리로스 호 같은 중무장 포함에서도 궁수가 매우 중요한 존재였음을 말해준다. 기록에 따르면,그 무렵 영국 해군의 궁수들은 화살을 5초마다 300m 거리에까지 날려보낼 수 있을 만큼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탐사대는 군의관이 썼던 큰 궤와 병사들의 사물함,그밖에 자질구레한 물건과 음식찌꺼기도 찾았다. 의료상자에서는 수술기구 등 의료품이 64가지나 쏟아져 나왔는데,어떤 연고에는 그 약을 마지막으로 쓴 의사의 손자국이 생생히 남아 있었다. 병사의 사물함에서는 자석식 나침반과 포켓용 해시계,낚싯바늘 따위가 나왔다. 주방에서 찾아낸 돼지고기와 강낭콩,오얏씨는 아직도 신선했다.

배가 너무 갑자기 가라앉아 쥐들도 미처 피할 사이가 없었던 것 같았다. 쥐와 몇몇 벌레들,그리고 조그만 개구리의 뼈도 발견됐다. 개구리는 폭풍이 일어날 조짐이 있으면 물통 밑바닥에서 헤엄치고,날씨가 좋으면 물 위에서 헤엄친다고 알려져 있어 날씨를 알고자 기른 것 같았다. 4년 동안 스쿠버다이버들이 자맥질한 횟수는 3만번,건져 올린 유물은 2만7,000점이었다. 그것들은 400여년 전 튜더 왕조 때 영국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살필 수 있게 해준 거의 유일한 유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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