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당 최초이자 단 둘뿐인 3선 의원 '노회찬'
본문 바로가기

진보정당 최초이자 단 둘뿐인 3선 의원 '노회찬'


2017. 6. 21.

노회찬은 한국의 정치인이자 노동운동가이다. 노심조의 노. 대중정치의 감성을 갖고 있는 진보정당계 유일한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1956년 부산에서, 유복한 환경 가운데 태어나 문화적으로 풍부한 유년시절 속에 성장했다. 부산 초량국민학교, 부산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때부터 첼로를 배웠으며, 펜싱과 육상에 뛰어났다고 한다. 

<중학생 시절의 모습>



1972년 부산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하여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때부터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생활했다.

경기고 재학시절에는 10월 유신에 반대하여 반독재 투쟁에 참여했다. 유인물을 만들어서 배포하는 일을 하며 이 시기부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 시기 다양한 책을 접하며 함석헌, 선우휘, 백기완 등 재야인사들과 만나게 된다. 당시 경기고 동기 중에는 이종걸과 황교안이 있다. 나중에 박근혜 정부 말기 탄핵 정국에 "황교안 대행과 고교 동창인 점은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1976년,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 입시에 낙방했다. 그는 곧바로 군대에 지원해 입대한다. 군복무를 마친 뒤 1979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 후 민주화운동을 계속 하던 중 광주 민주화 운동에 크게 충격을 받는다. 그는 조직화된 노동자가 앞장서야 근본적인 변혁이 가능하다는 판단하에,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고려대학교 재학 중인 1982년 영등포 청소년 직업학교(현 서울산업정보학교)에서 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 등을 따서 용접공으로 현장 노동자들 틈으로 섞여들어가, 일명 '학출'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노회찬은 1980년대 초중반부터 시위를 조직하고 노조를 결성한 죄로 수배되었다. 그는 꽤 긴 시간 동안 수배자 신분으로 도망다녔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노회찬은 인천, 부천의 노동조합과 노동운동 단체들을 연합하여 인천민주노동자연맹(약칭 인민노련)을 출범시키는데 핵심 멤버로 활동한다. 이 조직은 당시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를 목표로 활동했으며,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인민노련은 당시 노동현장에 뿌리를 둔 조직 중 가장 전위적이고 가장 큰 조직이었다.


1989년, 인민노련 결성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검거된다. 인민노련 멤버들은 이 당시 법정에서 자신들을 사회주의자라고 떳떳히 밝혀 큰 파문이 일기도 했다.

인민노련은 기존의 주체사상파나 제헌의회파가 너무 교조주의적이고 이상론에 머물러있다며 보다 실질적인 노동계급 운동을 표방했다. 이에 따라 인민노련은 현재 PD 계열의 원류로 평가된다.

사실 노회찬의 정계입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른 90년대 초반에 이루어졌다. 이는 그가 속한 인민노련의 노선 변화와도 관련이 있었다. 90년대에 들어 동구권의 붕괴와 소련 해체를 경험하면서, 이제는 제도권으로 나와서 활동해야 한다고 노선을 전환하게 된 것이다. 인민노련은 합법 정당 운동을 위해 한국 사회주의 노동당 창당위원회로 전환하게 되고, 노회찬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의 대표를 역임하게 된다. 진보정당추진위원회는 95년 9월 24일, 또다른 진보정당운동세력인 민중정치연합과 결합하여 '진보정치연합'으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95년에는 '반3김'을 구호로 내세운 개혁적국민정당 창당준비위에 가담했다. 이 정당은 그해 10월 창당하여 꼬마민주당과 결합하여 통합민주당을 이루었다. 노회찬 역시 통합민주당에 합류하였고, 강서을을 지역구로 총선을 준비했지만 사면복권이 안되어서 실패. 매일노동뉴스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원외인사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여담으로 이당시 원외인사로 활동하던 노회찬은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대중역사서를 집필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하였다.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와 같은 책들에 비하면 그 수명은 참으로 짧았지만, 이색적인 이력.

제도권 정치를 향한 노회찬의 발길은 진보정치연합의 대표로 권영길의 대선 출마를 지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같은 흐름은 국민승리 21과 민주노동당을 거치며 성공적으로 안착. 이후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 공천을 받고 2004년 17대 총선에서 당선되었다. 여담으로 이때 노회찬 의원이 각종 토론 프로에 나오며 촌철살인과 함께 일명 대중을 웃기는 유머러스한 컨셉의 토론으로 인기를 끌게 되고 이후 대중적인 인지도의 진보 정치인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NL-PD 갈등이 심해지면서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 초기의 공동 당대표를 역임하였다.


2010년엔 서울시장선거에 진보신당 후보로 출마했는데, 이때 민주당 한명숙 후보와의 단일화를 거부하고 완주한 것 때문에 일부 야권 지지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당도 성의있게 단일화 협상을 하지 않았음이 훗날 나꼼수에서 밝혀지는데, 이때 노회찬 의원이 게스트로 출연해 밝힌 바에 의하면 민주당쪽에서 자신에게 선거기간 동안 전화 한 통 걸지 않았다고 토로하며 물러나려고해도 물러날 명분조차 안주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민주당 지지자들도 이 부분에선 반성(?)한다는 모습. 무엇보다도 2년 전 선거 때는 도리어 노회찬이 민주당 때문에 패배한 것을 감안하면...

만약 이때 서울시장 선거에서 한명숙 후보와 단일화에 성공하여 오세훈 시장이 떨어졌다면 훗날 박원순 시장은 역사에 없었다.

이후 민주노동당과의 합당을 밀고 나가다 결국 부결되면서 심상정, 조승수와 함께 당을 탈당했고, 이후 통합진보당 창당에 참여해 치른 19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서울특별시 노원구 병) 국회의원을 지냈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 때에 탈당하여 정의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2013년 삼성 X파일 사건의 떡값검사(일명 떡검)들의 실명을 공개한 혐의로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유죄를 선고받고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2013년 재보궐선거에서 아내이자 노동운동가인 김지선 씨가 노원병 지역에 출마했지만 당시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당선되었다.

2014년부터 정의당에서 제작하는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 고정멤버로 출연했다.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서울시 동작구 을 지역에 출마하였다. 새정치민주연합, 정의당, 통합진보당, 노동당 이 4당이 후보 단일화로 막판까지 시끌벅적하였다. 통합진보당 후보가 노동당 김종철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하였고, 새정치민주연합의 기동민 후보가 노회찬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해 마지막에는 나경원 VS 노회찬 VS 김종철의 3자 대결로 갔지만 결과는 노회찬 48.7%, 새누리당 나경원 49.9%로 나경원 후보가 아슬아슬하게 당선되었다. 참고로 이때 김종철 후보 표를 합치면 50.1%가 되어 나경원 의원을 이길 수 있었다.


2015년 결선투표제로 치러진 정의당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였다. 1차 선거에서는 큰 표 차이로 1등을 차지했지만 2차 선거에서 심상정 의원에게 역전을 당해 낙선하였다. 당시에 상당수가 노회찬이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덕분에 노회찬의 캠프 쪽에서 방심한 반면 심상정의 캠프에서는 필사적이었다고 한다.

2015년 11월 경에는 다시 서울시 노원구 병 지역구로 이사해 총선을 준비한다고 알려졌다. 국민의당 안철수 현 의원, 그리고 새누리당 이준석 전 혁신위원장과의 3파전 양상이 예상되었다.

그러던 중 창원 성산 출마설 기사가 나왔다. 노유진의 정치카페 84편에 따르면, 창원시 성산구의 경우 지역과 정의당 경남도당의 출마요청이 있어 고심을 하고 있었다. 또 같은 방송에 따르면 광주 광산구 출마 역시 요청 받고 있다고 힌다. 2016년 1월 30일 전국위에서 결국 창원 성산 출마가 결정되었다. 하지만, 해당 지역구에는 현역의 새누리당 강기윤 후보, 더불어민주당 허성무 후보, 민주노총 소속의 손석형후보가 이미 있다. 국민의당 후보 출마설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야권 단일화는 필수로 보인다. 허성무 후보는 이에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손 후보와는 민주노총 지지 후보 투표로 단일화 투표가 진행 중이다. 두번의 단일화와 본선거, 모두에서 승리하여야 당선되는 상황이라 매우 어렵다.

MBC경남의 여론조사에서는 야권 단일화를 이룰 경우 가장 경쟁력 있는 후보로 노회찬이 24.6%로 가장 앞섰다.

2월 20일, 민주노총 단일화 후보 투표에서 승리했다. 당초 예상보다 훨씬 박빙의 승부였다고.

더불어민주당 허성무 후보와의 단일화 여론조사가 3월 27~28일 양일간 진행될 예정이다.

더불어민주당 허성무 후보와의 단일화 후보 투표에서 승리했다. 양측 합의로 조사결과는 비공개하기로 했다고 한다.

2016년 4월 3일 선관위로부터 야권단일후보라는 홍보 문구를 지적 받았다. 아직 국민의당 후보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당일 선거 결과에서 51.5%로 여유있게 승리하며 당선됐다. 단일화 두번과 본선에서까지 모두 승리하며 노회찬의 저력을 입증한 셈이다. 문젠 선거제도 안고치면 4년 후 또 '본선보다 단일화가 더 어려웠어요' 상황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것.

당선 이후, 정의당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

2016년 11월 11일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게이트 긴급현안질문에서 "속단하지 말라"는 황교안 국무총리의 반론을 '속단'이 아니라 뒤늦게 안 '지단遲斷'이라며 맞받아쳤다.

2017넌 1월 6일 성폭력 무고죄 고소를 성폭력 수사 종결후라는 괴상 망측한 법안을 내놨는데 이는 무죄추정원칙을 무시하는 언사로서 오늘의 유머에서 조차 반발이 심하다.

2017년 1월 11일, 이명박계 정당인 늘푸른한국당 창당 시, 축하 인사 차 찾아와서 이재오에게 반갑게 인사한 다음 축사를 낭독하기도 했는데, 그가 이명박에 대해 평소 비판적인 것을 생각한다면 좀 이례적이다. 하지만 노회찬은 과거에 이명박과도 인연이 있었으며, 특히 이재오의 경우 존경하는 운동권 선배 중 한 분이라고 언급했다. 거기다가 이명박과 노회찬 모두 같은 고려대학교 출신. 한편으로 이재오 또한 2013년 당시 안기부 X파일 문제로 노회찬이 의원직을 상실할 때 안타까움을 표현했으며 그의 의원 상실직을 막고자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발의에 이름을 올린 적이 있다.

2017년. 이낙연 총리 후보자의 인준 투표 중 신 새누리당의 조원진 의원이 여당 상대로 마구 항의를 했는데 그걸 조금 떨어진 곳에서 페이스북으로 라이브 중계를 했다. 근데 이때 모습이 안 찍는 척 안 보면서 조 의원을 찍는 게 언론에 잡히면서 노 룩 라이브라는 평가를 받았다. 나중에 기자가 왜 안 보면서 찍었냐고 물으니 찍고는 싶었는데 보고 싶진 않았다고.



법원행정처가 안경환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혼인무효소송 관련 판결문을 상대방 여성의 개인정보가 노출된 상태로 공식 요청을 받은지 불과 8분만에 자유한국당 의원들에게 제출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진정한 노동 지향적 정치인이다.

정치 인생 내내 노동자와 서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성향을 지키고 있으며 대한민국 정치판에 만연해 있는 권위주의나 엘리트주의를 지양하고 대중주의적 정치를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같은 정당의 심상정 조승수 등과 더불어 학생 운동 출신이라는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제도권 정치에 성공적으로 연착륙한 몇 안되는 정치인이다. 특히 노회찬은 원래 유복한 가정 출신이었는데도 고시나 인맥 등을 통해 입신양명에 치중하지 않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했는데, 환경이 아니라 소신으로 형상한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장점과 더불어 운동권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강성의 이미지 대신 소통력과 친화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름 많은 풍파를 겪었음에도 유명세에 비해 비판이 비교적 적은 편. 2016년 메갈 문제로 정의당과 심상정이 한참 비난을 받았을 때에도 노회찬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인 평가가 많았다. 다만 그에 대한 비판이 적은 것은 기본적으로 주목도가 낮은 소수 정당에서만 활동하였으며 검증압박이 심한 대선이나 광역단체장의 유력후보가 된 적도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과거 이력들이 많이 발굴되지 않은 측면도 있다. 

한편 나름 유명 정치인이 되었음에도 주류정당에 편입되지 않고 계속 진보성향의 정당에 몸담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소신과 초심을 잃지 않고 있다고 호평하는 반면 다른 일각에서는 2000년대 이후 민주당 등의 중도성향의 정당과 정치적 지향성 측면에서 별 차이가 없어졌는데도 분파적 성향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성격이나 성향 측면에서 봐도 진보 정당보다는 좀더 대중적인 정당에 어울린다는 평가가 많다.


언변이 뛰어난 것으로도 유명한데, 같은 정당 소속인 유시민 못지 않게 뛰어난 말솜씨를 자랑한다. 다만 말하는 스타일은 두 사람이 전혀 다른데, 유시민이 뛰어난 논리력과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사안에 대해 분석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노회찬은 상황에 맞는 적절한 비유와 풍자를 통해 복잡한 사안을 직관적으로 이해시키는 능력이 탁월하다. 또한 특유의 유머감각과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여유가 있어서 일단 그가 방송에 출연하면 민감한 사안에서도 험악하거나 민망한 분위기가 잘 연출되지 않으며 항상 최소한의 재미가 보장된다. 이런 능력 덕분에 정치인 노회찬은 단순히 진정성이 있는 정치인을 넘어 대중적인 인기도 높아졌다.

박근혜 정권에서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으로 통진당 세력이 무너진 후, 노회찬과 심상정이 이끌고 있는 정의당이 사실상 진보세력의 원내 입성을 기대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되어 버렸다. 정의당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나름의 입지와 지지도를 얻는데는 성공했지만 기존 주류정당의 대안으로까지 부상하지는 못한 상황이다. 그 원인으로 당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특유의 진보성을 구축하는 대신 대중성에만 치중하다가 진보정당 특유의 선명함이 많이 퇴색하고 기성정당과의 차별성이 모호해진 점, 노회찬/심상정/강기갑/유시민 등 소수의 스타 정치인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고 인재 영입이나 양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 2016년 현재 이들도 이미 환갑 줄에 들어섰기 때문에 빨리 지명도와 자질을 갖춘 후배 정치인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 그마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진보세력이 크게 위축될 우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