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 '지석영' 친일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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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 '지석영' 친일 논란


2017. 5. 15.

1878년부터 188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일본을 통해 종두법을 연구하여 접종하였다. 조선에서 우두 접종은 헌종 시기 정약용과 박제가 등에 의해 연구되어 소아에게 실험한 바 있으나 보급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는데, 지석영은 1880년대 개화파와 손을 잡고 지방에 종두법을 보급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 이후 개화가 전면적으로 부정되면서 그 또한 유배를 떠나게 된다.

복직 이후 그가 두각을 보인 것은 대한제국 시기였다. 그는 의학교에 복귀하여 천연두 퇴치에 노력함과 동시에 '신정국문'을 비롯한 국어 문법서를 저술하고 국문 연구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관립의학교(일제강점 이후 경성의전이 되고 해방 이후엔 서울대 의대가 된다) 초대 교장이면서 종두법을 도입한 인물이다. 많은 이들이 지석영을 의사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사실은 한의사에 해당하는 의생(면허번호 6번)으로 현 한의사협회에 해당하는 전선의생회의 회장까지 지낸 인물이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나온 사망으로 인한 면허 반납 기사에도 지석영은 의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관립의학교의 체제는 한의학과 서양에서 들어온 의학을 같이 배우는 체제였다가, 후에 경술국치 이후 통감부에 의해 의학교가 폐지되면서 대한의원의육부로 개편되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밀려나게 된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대외 활동이 거의 없이 진료만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토 히로부미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친일 논란이 불거진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