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트곡 없는 국민가수 '인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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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트곡 없는 국민가수 '인순이'


2017. 5. 11.

1957년 4월 5일 생으로 본명은 김인순, 가톨릭 신자로 세례명은 세실리아. 1978년 희자매로 데뷔했다.

'히트곡 없는 국민가수'라는 평이 있고, 인지도나 위치, 가창력에 비해 히트곡이 정말 적은 것만은 사실이다. <친구여>는 조PD의 곡에 피처링 한 것이고, <거위의 꿈>은 카니발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것이기 때문. 다만 세대를 뛰어넘어 기억될 정도의 곡이 적은 것일 뿐, 사실 세자매 시절에도 상당한 히트곡이 있고, 90년대에 박진영과 협업한 <끝> <또> 등의 곡들은 발표 당시엔 상당히 인기를 얻었다. 나는 가수다 출연 이후 <아버지> 역시 상당한 슬리피 히트가 되었고... 어쨌든 스탠다드에 가까워진 <밤이면 밤마다>가 있기 때문에 히트곡이 완전히 없다고 말할 순 없고 오히려 원 히트 원더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겠다.



유명한 사실이지만, 한국인 어머니와 흑인 미군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하지만 아버지는 인순이가 태어나자 나 몰라라 식으로 대처하고 떠났기 때문에 인순이는 아버지를 본 적도 없다고 한다.

지금도 혼혈에 대한 편견 및 인식과 대우가 좋지는 않은데 1960년대의 대한민국에서 혼혈, 그것도 흑인 혼혈이고 아버지가 없는 홀어머니 혼자 키우는 딸에 대한 주변의 시선은 매우 좋지 않았다. 어렸을 적 뿐만이 아니라 가수로 성공한 이후에도 이러한 차별은 은연중 따라다녔다. 결국 이는 인순이의 인생에 커다란 상처로 남게 되었다. 자녀로는 외동딸이 있으며 원정출산했다. 대놓고 원정출산을 했지만 심지어 90년대 당시까지만 해도 흑인 혼혈에 대한 사회의 차별의식은 어마어마했기에 (2010년대에도 사라졌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다지 비난받지는 않았다. 


당시 홀어머니 혼자 키우는 대부분의 가정이 그렇듯 인순이의 가정 역시 경제적으로 매우 빈곤했으며 인순이는 장녀로서 힘겹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생계 활동을 시작해야 했다. 그때 김완선의 이모이자 프로듀서로 잘 알려진 故 한백희의 눈에 들어 가수 생활을 시작한다.
먼저 한백희의 무대에 백댄서로 일하다가 우연히 인순이의 노래 실력을 본 한백희가 자기 대신 인순이를 무대에 세우며 가수로서의 길을 시작했다. 인순이의 고백에 따르면 '연습생도 뭣도 아니었고 그저 한백희 씨를 따라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시작한 가수 생활'이었다고.

희자매는 대히트를 쳤지만 그 수명은 짧았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이 탈퇴한 후에도 인순이는 한백희를 따라 1981년부터 솔로로 활동하게 되는데 지금도 많이들 부르는 '밤이면 밤마다' 가 1983년에 공전의 히트를 친다. 또한 그 후 '인순이와 리듬 터치' 로 활동했는데 '리듬 터치' 는 한마디로 인순이의 뒤에서 춤을 추는, 지금의 백댄서 개념의 팀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인순이에게는 슬럼프가 찾아오고 이와중에 한백희가 김완선을 데뷔시키고 그녀의 뒷바라지에 집중하게 되며 인순이와 한백희의 관계 역시 끝나게 된다. 이때 인순이가 한백희에게 '너는 지는 해, 그 아이는 뜨는 해' 라는 말을 들었다는데 사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긴 하지만 한백희의 생전 성격을 봤을 때 저보다 더 심한 말을 했을 수도 있다.


인순이는 한백희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녀가 없었다면 데뷔도 할 수 없었을 거고 마지막 말이 없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없었을 거다' 라면서 그리워하기도 했는데 한백희의 조카인 김완선도 똑같은 애증을 밝힌 적이 있다.

여하튼 한백희와 헤어진 이후로 인순이에게는 긴 슬럼프가 찾아오고 이때부터 TV 활동이나 가수로서 화려한 무대는 거의 오르질 못하고 주로 야간 업소 혹은 복음성가 계열 등의 공연을 돌게 된다. 이 시기의 대표곡으로는 트로트 풍의 '착한 여자(1992)'이지만, 그것보다 더 유명한 곡은 김형석이 작사 작곡한 '이별연습(1989)'. 그리고 '착한 여자' 이후 결혼과 출산으로 긴 공백기를 갖게 된다.

이후 90년대 초 KBS '열린음악회'가 인기를 끌던 당시 이 프로에 자주 나와 댄스, 트로트, 스탠다드에 민요까지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모습을 보이면서 대중의 눈에 다시 들어오고 이에 박진영과 작업한 '또(1996)' 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인순이는 여기서 '트로트 가수로 머무르는 게 아니라 소울이라는 영역에 도전할 수 있었다' 고 밝히는데 엄밀히 말해서 '또' 가 정통 소울이라고 보기는 힘든 댄스 음악을 기반으로 한 노래였지만 한국 나이로 마흔에 '트로트' 가 아닌 다른 장르에 도전하는 정신이 비범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 '또' 는 1996년 후반기 가요 차트에서 10위권 내에 오르는 준수한 성적을 올렸다.

그 후 2004년 조PD의 히트곡 '친구여' 에 피쳐링으로 참여했는데 지금도 친구여 노래 하면 인순이 노래라고 착각할 정도로 젊은 세대 뿐만 아니라 기성 세대들까지 큰 인상을 남겨주었다. 또 2006년에 원곡이었던 Jean Roch의 Can You Feel It을 리메이크한 '열정'을, 2007년에는 이미 10년 전에 발표한 카니발의 '거위의 꿈을 리메이크하는 등 리메이크곡을 연달아 활동곡으로 히트치면서 과거 '밤이면 밤마다' 를 통해 그녀를 기억하는 세대 뿐만 아니라 10대와 20대에게까지도 유명한 가수가 되었다.



슬럼프였던 시기 밤무대 가수로 활동하던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실력에 대해 아직도 편견을 가지고 있으며 '밤무대 뛰다 출세했네' 라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는 인순이의 실력을 지나치게 평가절하하는 것. 오히려 침체기에 댄스 음악이 아닌 다른 여러 장르들을 시도하면서 인순이가 소화할 수 있는 장르의 폭이 넓어졌고 음악적 깊이도 그만큼 깊어졌다고 할 수 있다.

'거위의 꿈' 뿐만이 아닌 모든 노래에서 드러나지만 인순이의 발성은 음역대가 굉장히 넓다. 단순히 폭이 넓은 정도가 아니라 저음, 고음 모두 꽉 차있고 매우 안정적이다. 고음을 못 올린다는 트집을 잡는 사람들도 있는데 택도 없는 소리다. 한때 조PD의 '친구여' 가 유행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인순이의 피쳐링 부분을 쉽게 보고 도전했다가 좌절했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카니발이 어디 가서 쉽게 발릴 그룹이 아님에도 '인순이-거위의 꿈' 라는 공식이 생길 만큼 인순이의 버전이 히트였다기 보다는 정작 원곡 가수인 카니발은 각자 활동하면서 새 음반을 발표하는 등 <거위의 꿈>에 얽매이지 않고 음악활동을 계속하는데 비해 인순이는 십수년간 주야장천 <거위의 꿈>을 불렀기 때문에 인순이 버전을 들은 사람이 더 많다. 한마디로 인순이의 <거위의 꿈>이 공급과잉이라 그런것일 뿐 음악적으로 뛰어나서 알려진 것은 아니란 얘기. 그래서 카니발의 담백한 곡을 감정 과잉으로 부담스럽게 소화했다는 평가도 많다. [2004년에 모 종교 단체의 단합대회에 나와서 노래를 부른 적이 있는데 무대에서 조PD의 '친구여' 를 부르다 갑자기 운동장 트랙을 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뛰어서 한 바퀴(약 500미터)를 도는 동안 숨도 안 차고 노래를 전부 소화했다.

음색이 다른 여가수들에 비해 탁하고 굵은 편이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인순이의 고음은 다른 가수들보다 높으면 높지 낮지 않다. 보통 여가수들이 온 몸에 힘을 주고 인상을 찌푸리며 내는 곡의 절정 부분에 가서야 한두 번 '찍고 내려오는' 정도로 등자하는 3옥타브 미(E)나 파(F)정도 되는 음을 춤을 추면서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불러버리니까(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고음을 못 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고음을 참 편안하게 내기 때문에 '고음을 내면서도 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케이스. 김연우 예를 들어 이 글의 밑부분에 있는 인순이가 부른 '링딩동' 에는 미(E)가 엄청나게 자주 나온다.[6] 게다가 애초에 보컬의 자질을 고음 하나로만 따지려 드는 건 고음병 걸린 사람이나 하는 짓이다.

거기에 갖가지 장르를 넘나들고 또 그것을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역량과 테크닉도 압도적. 단순히 그녀를 트로트 가수로 평가절하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트로트라는 장르가 무시 받을 만한 장르는 아니며 또 저 나이와 저 세대에서 인순이만큼 다양한 장르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가수도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일보에서 김연우 등의 보컬 트레이너들을 대상으로 한 최고의 보컬리스트에서 여성 부분에서 80년대에 이선희에 이어서 2위를 차지했으며 또한 2000년대에도 3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음악 전문가 20인이 선정한 '가장 노래 잘하는 가수' 에서 조용필, 이승철에 이어서 3위를, '기술적 능력이 가장 뛰어난 가수' 에서 이승철, 김범수에 이어서 3위를, '감성 전달 능력이 뛰어난 가수' 에서 역시 공동 3위에 오르면서 다양한 측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지닌 가수로 모두가 인정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보컬로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만 뮤지션으로서의 역량은 글쎄. 상술했듯이 본인의 온전한 히트곡이나 명반이 없다. 실제로 17장의 정규 음반을 발매하는 긴 세월 동안 인순이가 대중적으로 히트한 곡은 '밤이면 밤마다', 리메이크곡 '거위의 꿈', 피쳐링을 맡은 조PD의 '친구여', 신중현의 리메이크 앨범 정도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2000년대 초반에는 <친구여>, 2000년대 후반에는 <거위의 꿈>으로 나뉠 정도. 34년차 가수라는 경력이 무색한 히트곡 앞에 국민가수 칭호를 붙일 수 있는지는 의문. 이선희나 조용필같은 국민적 지지를 받는 가수들이 단순히 노래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칭송받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가요계의 역사를 재조명한다고 할 때 인순이가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할지는 다소 물음표가 남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나가수 출연을 아쉬워하는 팬들도 많다. 나가수 출연으로 인순이의 히트곡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이 리메이크에 집중된다면 그동안 인순이가 해왔던 수많은 실험과 음악적 도전이 폄하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함께 인순이가 앞으로도 창작적으로 뛰어난 음반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건 아닐지 하는 우려 때문이다.

사실 이 제 2의 전성기가 찾아온 인순이의 진정 위대한 점이라고 한다면 50이 넘어가는 나이에도 다른 장르에 도전하는 도전 정신과 철저한 자기 관리라 할 수 있다. 래핑, 댄스, 소울, 미디엄 템포, 발라드, 트롯, CCM 등등.

운동과 식이요법을 통한 건강 관리와 철저한 연습, 목 관리는 존경 받아 마땅하다. 인순이와 동년배의 여가수들이 모두 활동을 접거나 디너쇼 등 특정 세대만을 공략하는 데에 비해 인순이는 여전히 넓은 연령대를 대상으로 다양한 도전을 펼치고 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나와 샤이니의 링딩동을 혼자 부르고 춤추며 소화하기도. 팔팔한 10대 20대 청년 다섯명이 합동으로 부르고 춤추는 무대를 50이 넘은 여성이 혼자 소화해내는 모습은 상당한 임팩트였다.


2016년 상반기에는 머슬퀸 프로젝트에 출연했는데, 같은 팀으로 나온 후배 유정연은 "연세가 많으신데 나보다 운동도 잘하시고 몸도 정말 좋으시다."고 말하기도했다. 참고로 정연은 96년생으로 인순이와 약 마흔살 차이가 난다...

나는 가수다의 원년 멤버 YB, 김범수, 박정현이 무대를 떠나면서 2011년 8월 21일 방송분을 통해 윤민수, 바비킴과 함께 합류했다. 인순이의 나는 가수다 합류에 대해 자문위원단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었는데 인순이 같이 '레전드급 가수가 나는 가수다에 출연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는 게 논란의 원인.

나는 가수다 데뷔 무대인 가수 선호도 조사 공연에서 마지막 순서로 등장하는데 무대 등장부터 나가수를 정리하겠다는 듯한 모습으로 최종보스의 포스를 뿜어내더니 본인의 17집 수록곡 '아버지' 를 열창하며 27.7%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1위를 차지했다. 임재범의 '여러분' 에 이어 역대 득표율 2위. 임재범이 '여러분' 을 불렀을 때와 마찬가지 분위기로 관객들도 가수들도 매니저들도 그리고 인순이 본인도 모두 눈물을 흘리는 폭풍감동의 무대가 연출되었다.

나는 가수다에 합류한 이유는 '인순이가 나가수에 출연하면 하차하겠다' 는 박명수의 발언을 듣고 박명수를 하차시키기 위해 출연했다고... 결국 박명수를 하차시키는 대신 자신의 매니저로 삼아 끝까지 고통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는 건 반 농담이고 "이렇게 가수마저 긴장시키는 무대를 언제 또 해볼 수 있을까, 놓치면 후회할 것 같다" 는 진짜 이유를 인터뷰에서 밝혔다. 또한 자신은 나이에 얽매이게 되면 결국은 아무것도 못하게 될 것 같다며 계속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다는 의욕을 보였다.

그 이후 1차 경연에서 진주의 '난 괜찮아' 를 부르게 되었다. 자문의원단은 최적화된 공연, 즉 인순이에게 맞는 곡이 인순이에게 맞는 스타일로 인순이에게 맞게 불러졌다고 평가하였고 모든 매니저가 다들 인순이가 1등을 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아쉽게 3등을 하였다.

2차 경연에서 故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를 불렀다. 할 말이 없다. 직접 들어보자. 관중석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속출할 정도. 중간에 자신의 인생살이를 나레이션으로 읊는 대목이 곡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1위를 예상했지만 1차 경연까지 성적이 저조했던 자우림이 이번에 실패하면 탈락이니까 장렬하게 전사할 각오로 노래를 불러 1위를 가져가고 자신은 2위.

7라운드 1차 경연에서 박정운의 '오늘 같은 밤이면' 을 불러서 또 2등을 했다. 계속 상위권에만 머무르는 셈이다. 이런 장르의 미디엄 템포의 곡은 처음으로 해본 것이었다는게 흠좀무. 자문위원단 중 한 명은 브로드웨이에서의 공연을 본 것 같다고 평가하였다.

조용필 스페셜로 치러진 7라운드 2차 경연에서는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 을 불렀다. 애절한 무대를 선보이긴 했지만 탈세 논란 등으로 인해서인지 컨디션이 다소 떨어진 듯 평소만큼의 당당함은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순위는 4위.

이후 나가수 첫 듀엣 경연으로 펼쳐진 8라운드 1차 경연에선 가수 김도향 씨와 함께 김도향 씨의 명곡인 '바보처럼 살았군요' 를 명쾌한 분위기로 풀어내는 모습을 보였으나 자문 위원단으로부터 "꼭 신나게 갔어야 했는가가 아쉽다" 라는 평가를 받으며 나가수에 들어온 이후 첫 하위권인 5위를 기록하며 위기에 빠졌다.

하지만 호주에서 펼쳐진 2차 경연에서 뉴욕 공연에 의한 컨디션 난조를 이겨내고 도입부에 애국가를 가미해 '봄여름가을겨울' 을 강력한 에너지로 풀어내 무대를 장악하며 선호도 조사 이후 첫 1위를 차지했다. 다만 애국가 사용에 대한 문제 등 청자에 따라 호불호는 심하게 갈리고 있다.

호주 경연 1위 이후 파워풀한 가창력과 변화로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시즌 2 10라운드 1차 경연에서 어쿠스틱 언플러그드라는 대중의 취향과는 엇나간 변화를 한 끝에 최초로 7위로 굴러떨어졌다. 2차 경연이었던 산울림 특집에서 산울림의 '청춘' 을 자신의 스타일로 잘 소화했으나 5위에 그치며 최종 7위로 탈락하여 결국 나는 가수다에서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