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베트남 독립의 영웅 '호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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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베트남 독립의 영웅 '호찌민'


2017. 4. 3.

베트남의 유명한 공산 혁명가이자 정치가이며, 현대 베트남의 국부(國父). 식민지 베트남의 독립과 베트남 전쟁을 통한 베트남의 통일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본명은 응우옌신꿍(Nguyễn Sinh Cung, 阮生恭, 완생공). 자(字)는 필성(必成, Tất Thành). 호찌민은 가명이며 '깨우치는 자'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베트남인들은 '호 아저씨'(Bác Hồ, 박 호, 伯胡)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또한 호찌민은 생에 세계를 떠돌며 살았기 때문에 호찌민을 포함 대략196개의 가명이 있었다고 한다.


호찌민은 베트남 응에안(Nghệ An, 乂安)성에 있는 호앙쭈(Hoàng Trù)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민 출신으로 가난한 유학자였다. 그의 가계가 객가(客家)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그의 아버지가 관직에 오른 그 해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그의 부친은 프랑스 식민지 치하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응우옌 왕조의 관리가 되어 수도 후에로 가족을 데려올 수 있었으나, 자신의 일이 식민지 경영의 주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에 번민했고 결국 불복종을 이유로 해직된다. 현실에 실망한 그는 이후 후에를 떠나 시골에서 약제사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호찌민은 물론 형과 누나도 주변에 민족주의 사상을 전파하게 되는데, 때문에 호찌민의 형과 누나는 반식민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를 당해 수감된다. 본인도 프랑스-베트남 학교 재학 시절 징세반대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만다. 잠시 민족주의자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지만 당시 독립운동 전반에 만연했던 '일본을 배우자.'란 구호에 실망하였고 도리어 독립을 위해서는 서양, 나아가 세계를 더 자세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프랑스 해운회사에 견습 요리사로 취직, 프랑스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원사, 청소부, 웨이터, 사진 수정자, 화부(火夫) 등으로 일했다.


그 밖에도 영국, 미국 등을 전전하면서 신문물과 사상 등을 배우게 되는데 이때의 경험들 덕분에 영어, 중국어의 여러 방언과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으며 타이어, 스페인어, 독일어, 러시아어에도 능했다.

1918년에는 베르사유 회의에 우국지사들과 응우옌아이꾸옥(Nguyễn Ái Quốc, 阮愛國)이란 이름으로 참가해 베트남인의 자유·민주·평등권을 요구했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의 호찌민은 프랑스로부터의 완전 독립보다는 프랑스의 평등한 구성원으로써 베트남인의 인권보장을 추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의 신한청년단에서 독립청원서를 발표한 것과 비슷하게 위의 가명을 사용해 '안남 민족의 요구'라는 8개 조항을 베르사유 회의에 제출하기도 한다. 이 사건으로 젊은 호찌민은 베트남 독립 운동가로써 명성을 얻게 되고, 향후 27년간 응우옌아이꾸옥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베르사유 회의 당시 미국 대통령으로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던 우드로 윌슨을 만나 베트남을 도와줄 것을 호소했지만 윌슨은 무시했다고 한다. 민족 자결주의는 사실 제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들을 해체하기 위한 의도가 컸고, 미국은 승전국의 식민지인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도와줄 이유가 없었다.

1920년에는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고, 1923년에 개최된 제2차 프랑스 공산당 대회에서 대회 참가단 주석 자격으로 참가했다. 또한 그 해 소련에는 각국 식민지 농민 대표 자격으로 건너가 한동안 국제공산당에서 일하다가 1924년 중국 광저우로 갔는데, 당시 이름을 다시 리투이(Li Thuy, 李瑞)로 바꿨다. 여기서 그는 '베트남 청년혁명동지회'를 창립하고 동아시아 지역 피압박 민족연합회를 발족시켰다. 이후 소련으로 건너가 공산당원 중 최고급 당원만 유학한다는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한다. 이때 박헌영을 만난다.

별로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코민테른 요원으로, 소련 내에서는 일종의 피압박민족의 투사로써의 모델로 주로 활동했다. 하지만 이후 중국과 베트남으로 파견되었을 때에는 혁명 조직을 형성시키고 통합시키는데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여, 베트남청년단, 안남 공산당, 베트남 공산당, 인도차이나 공산당 등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각지에서 만난 뛰어난 인재들을 소련으로 보내 교육시키는 등, 어느 판타지 소설의 공화주의자 백작님 마냥 조직과 인재를 통해 혁명의 근간을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잠시 태국에 머물 때조차 그곳에 있는 베트남 이주자들과 원주민들을 통합해 공산주의 조직을 만들기도 하는 먼치킨.

1932년 6월 홍콩에서 영국 밀정에 체포되었으며 1933년 풀려난 뒤에는 소련의 모스크바에 갔다. 1940년부터는 중국 쿤밍에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하다가 1941년 2월에는 베트남으로 돌아갔다.

1942년 8월 이름을 호찌민(Ho Chi Minh)으로 개명해 활동하다가 중국 국경에서 장제스의 중화민국 군대에 잡혀 1년 간 투옥되기도 했다. 해외 생활 도중 미국의 OSS와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OSS는 호찌민이 말라리아로 쓰러지자 키니네를 구해주기도 했으며, 앞서 장제스가 체포한 호찌민을 OSS가 구해주기도 했다. 또한 종전 직전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은 호찌민의 주선으로 OSS에 들어가 여러 훈련을 받기도 했다. 이 훈련 경험은 훗날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또한 호찌민은 이때 도움을 준 미국과 친하게 지내려고 여러 차례 메세지를 보내지만 당시 미국은 유럽과 일본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려 했고, 유럽에서는 특히 프랑스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러한 메시지를 무시해 버렸다.

1945년 8월 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해 주석으로 선출되어 8월 25일,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정식으로 자신을 호찌민으로 소개하며, 9월 2일, 자신이 쓴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선포해 봉건 군주제를 종식시켰다. 이후 중국을 경계하여 권토중래를 노리는 프랑스와 협정을 체결하였으나 프랑스는 호찌민이 폐위시킨 보대 황제를 왕위로 내세운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세움에 따라 협정은 무산되게 된다. 이후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1954년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奠邊府) 전투의 승리를 통해 프랑스에 크나큰 타격을 주었다. 이후 제네바 합의를 체결하게끔 하여 프랑스군을 베트남으로부터 완전히 몰아내고 프랑스 식민통치 종결, 베트남 독립. 1955년 전투 지역으로부터 수도 하노이로 개선했다.

그 뒤 1955년 세워진 남베트남과의 전쟁으로 베트남 전쟁이 터지고, 염원이었던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심장병으로 1969년 9월 2일 9시 47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향년 79세. 그가 죽고 6년 후인 1975년에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베트남은 통일을 이룬다. 공교롭게도 호찌민이 사망한 날은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세운 날이었다.

사망 전 유언으로 화장 후 재를 3등분하여 베트남의 북·중·남부에 한 줌씩 뿌려 줄 것을 요구했으나, 말 안 듣는 베트남 정부는 하노이 바딘(Ba Dinh) 광장 앞에 대규모 영묘를 짓고 호찌민의 시신을 방부 처리한 뒤 안치하여 참배객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레닌 이후 시신이 미이라로 보존되고 있는 두 번째 공산권 지도자가 되었다.

호찌민의 유언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남긴 유언 중 하나가 전쟁에서 승리시 남베트남 사람들을 탄압하지 말라는 유언도 있었다.
그러나 유언과 다르게 결국 전쟁이 끝나고 남베트남에선 대대적인 숙청이 터지고 말았다.

유언의 전문은 이렇다.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시키고, 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도자기 상자에 담아 하나는 북부에, 하나는 중부에, 하나는 남부에 뿌려다오. 무덤에는 비석도 동상도 세우지 말라. 다만 단순하고 넓으며 튼튼한 통풍이 잘 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을 쉬어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방문객마다 추모의 뜻으로 한두 그루씩 나무를 심게 하라. 세월이 지나면 나무들은 숲을 이룰 것이다."

그가 사망한 것에 관계없이 베트남전은 3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1975년에 북베트남이 승리함으로서 그의 숙원인 베트남의 통일을 이룬다. 그리고 북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을 그의 이름을 따서 호찌민으로 개명하였으며, 통일 수도는 하노이가 되었다.

거기다가 베트남전 당시 투쟁을 위해 노력한 베트남 국민들을 위해 1년 동안 세금을 거두지 말고, 그 후로도 세금을 줄이기를 부탁했으나 북베트남 정부는 이를 무시해버렸다. 그래서 훗날 호찌민의 비서는 베트남 정부가 호찌민의 유언을 훼손했다며 당 지도부를 비판하기도 한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나 중국에 머물던 시절에 중국 여자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호찌민이 체포되면서 이들 역시 실종되었고, 북베트남 주석이 된 이후 호찌민이 이들을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는 주민등록제도와 같은 인구 파악 및 신분확인을 위한 제도가 완전하지 않은 시대였으니 그럴만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