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병,나병,문둥병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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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병,나병,문둥병에 대해 알아보자


2017. 1. 29.

나병 癩病,문둥병(순우리말),한센병 모두 같은 병이다.

피부 및 점막, 안구에 발진과 각종 염증을 일으키고 피딱지와 출혈 징후를 보이며 해당 부위에서 감각을 잃어버리거나 반대로 과민하게 감각을 느끼게 되는 전염병. 피부의 병변이 광범위하게 홍반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도 굉장히 흉측해지며, 이처럼 눈에 잘 띄는 징후가 전염성과 더불어 이 병을 '문둥병'이라 부르며 신의 저주처럼 취급해 환자들과의 접촉을 꺼리게 만드는 한 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나라의 경우 이 병을 가진 환자는 징병검사에서 6급으로 병역이 면제되며 등록된 자는 직권으로 병역면제 처리된다. 더 악화되면 신체의 말단부가 썩어 문드러지는 지경까지 가며(정작 환자 본인은 통각이 약해져서 그 사실도 못 느낀다.) 이때 손상된 피부에 또 2차적인 세균 감염이 일어나 고약한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쉽게 말해서 산 채로 부패한다는 것. 그래서 일단 유대교(구약성서에 상세하게 써 있다)를 포함해서 세계 대부분의 문명에서 신의 저주급 취급을 받았다.


[한센병 종류]


Lepromatous leprosy의 경우 발병 초기 한정으로는 오히려 일반인보다 피부가 하얗고 매끈해져서 '이쁜 나병'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외견상 그런 것이고, 사실은 면역체계가 무너져 피부가 죽어가는 전초증상이다. 당연히 초기를 벗어나면 피부가 문드러져 흔히 문둥이라 부르는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버린다.

크게 나종형과 결핵형의 2가지가 있다. 나균(Mycobacterium leprae)에 의해 감염되는 만성 전염성 질환이며 나병(癩病)이나 문둥병이라고도 하는데, 나병이나 문둥병이라는 말은 한센인들이 싫어하므로 한센병으로 부르는게 예의다.
1871년 노르웨이의 의사 '예르하르 헨리크 아르메우에르 한센(Gerhard Henrik Armauer Hansen)'이 나환자의 나결절의 조직에서 세균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여, 1874년 'Bacillus leprae'라 명명함으로써 '한센병'이라는 말이 유래하였다. 말초신경과 피부에 주로 침범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기타 부위의 조직에 침범하기도 한다.

한의학에서는 가라(痂癩)·풍병(風病)·대풍라(大風癩)라 하였고, 치료가 불가능했던 시대에는 천형병(天刑病) 또는 업병(業病)이라 하였다. 참고로 동남 방언의 문디가 바로 이 문둥이에서 온 말.


[한센병 감염 경로]

한센병은 치료받지 않은 환자에게서 배출된 나균에 오랫동안 접촉한 경우에 발병한다. 그러나 전세계 인구의 95%는 나병에 자연 저항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균이 피부 또는 호흡기를 통하여 체내로 들어오더라도 쉽게 병에 걸리지는 않는다.(감염 가능성은 존재한다) 나균을 배출하는 환자의 경우도 리팜핀(리팜피신) 600mg을 1회만 복용하여도 체내에 있는 나균의 99.99%가 전염력을 상실한다. 따라서 한센병은 비록 제3군 법정 전염병으로 지정되었지만 격리가 필요한 질환이 아니며, 성적인 접촉이나 임신을 통해서도 감염되지 않는다. 아울러 결핵을 예방하기 위해 신생아 때 실시하는 BCG 접종이 부수적으로 한센병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약 75%를 차지하는 결핵형은 증상도 가볍고 자연 치유확률도 높지만 나종형은 전염성으로 방치하면 악화된다. 걸릴 확률이 매우 낮고 설령 걸리더라도 국가에서 완치될 때까지 100% 전액지원을 보장해주는 병이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걸려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함부로 노출되지는 말자. 이게 그렇게까지 전염률이 약하고 예방책이 확실한 병이라면 이미 천연두처럼 세상에서 사멸해버렸을 것이다. 사전 예방 수단은 노출되지 않는 것과 환자의 자기 관리에 달려있기때문에 현재로써 확실한 예방책은 나균에 전혀 노출 되지 않는 것 외에는 없다.



[치료 방법]

전근대시기에는 불치병으로 취급받고 현대의 암 이상으로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극소수의 어지간한 경우를 제외하면 주사 1번에 리팜피신을 주성분으로 한 여러 종류의 항생제를 같이 먹는 간단한 방법으로 완치가 가능하다. 항나제 복합요법 (multidrug theraphy:MDT)이라고 하며 세계보건기구 권고사항은, 분류방법은 피부소견, 병리소견 등에 근거하여 5가지로 나누는 Ridley-Jopling 분류와 임상에서 피부도말검사를 실시하여 다균나(multibacillary leprosy, MB), 균이 거의 관찰되지 않는 희균나 (paucibacillary leprosy, PB)의 2 가지 형태로 분류하여, 희균나의 경우 6개월 항나제 복합요법을, 다균나의 경우 24개월간 복합요법을 시행하여, 3~5년간 추적하여 치료종결 여부를 결정한다. 하지만 더 자세한 것은 하단의 국립보건원의 PDF문서 다운로드 링크를 통해서 찾아보자. 여러 경우에 따라 좀 더 정확한 항생제의 조합을 설명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그리 안 어렵다.

한국에서는 치료 비용을 전부 국가에서 부담한다. 그렇다고 손상된 사지가 재생되는 건 아니지만... 이런 후유증이 남아있어도 완치환자으로부터의 감염 위험은 소멸한 상태이다.



[환자에 대한 혐오]

징후상 여러모로 혐오적인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는 병이라 환자들은 세계적으로 괴물 취급을 당했다. 벤허에서도 벤후르의 누이와 어머니가 이 병에 걸렸던 걸 보고 기겁하던 게 괜히 나온게 아니다. 로마시대를 비롯하여 아득한 옛날부터 혐오적인 인식이 깊었다. 한국에서도 이 병에 대한 인식이 심해서, 전염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사람들이 믿었고 여러 나라에서 어린아이 간 빼먹기라는 괴담까지 존재했을 정도다. 이런 대접때문에 한센인들은 사회에서 쫓겨나기 일쑤였고, 그러다보니 정말로 범죄자가 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러면 그런 소문이 더 심해지고... 실제로 타이에선 이 병에 걸린 환자가 아이들을 납치해 죽여 실제로 간과 여러 부위를 먹기까지 했던 일이 벌어졌다. 결국 잡혀서 사형당했지만 시체를 박제하여 자연사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의 한센병]

과거 이스라엘과 유대에서, 한센병 환자는 부정한 것이었기에 공동체와 격리되어야 했으며, 율법상으로도 "나는 부정한 자입니다"라는 신호를 항상 해야만 했다. 또한 이들은 제사를 드릴 수도 없었다. 즉, 이들은 공동체에서도 추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고립된 삶을 살았던 것. 다만, 상술했듯이 한센병은 자연적으로 치유되지 않는 병이기에 이러한 규정은 한센병이라기보다는 악성 피부병에 대한 규정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고, 그만큼 전염될 확률이 높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한국에서의 한센병 차별]


2006년 01월 23일자로 지식채널ⓔ에 '잊혀진 대한민국 3부 한센인' 방영, 근래에 대한민국 한센인들의 비극과 통한의 역사가 영상에 담겨져있다.



[한센병과 소록도]

국내에서 한센병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곳이 있다면 바로 소록도이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 전국적으로 "나요양소(癩療襄所)"를 짓게 한 총독부령이 내리면서 여러 곳에 한센병 치료를 위한 보호시설이 생겨났다. 그 당시 나균이 발견되면서 세계적으로 이런 종류의 치료방법이 개발된데 따른 것이었다. 이 때 소록도에도 이미 나환자 치료를 하고 있던 "소록도 자혜의원"이 있었고, 소록도는 본격적인 한센병 요양소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였고, 초대원장은 원생들에게 일본식 생활을 강요하는 등 환자들을 많이 억압했다.

이러한 억압은 2대 원장으로 부임한 "하나이 젠키치(花井善吉)" 원장 이후 상당부분 완화되었다. 하나이 원장은 일본식 생활을 강요하던 것을 폐지하고 신앙의 자유와 취미생활 권장 등을 통한 인권 신장에 노력했고, 환자들을 성심껏 돌보았다고 한다.

옛 소록도 자혜의원 본관 건물 앞에 하나이 원장 공덕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 비석은 소록도 한센인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비석이다. 해방 이후, 일제의 것들을 모두 파괴하려는 움직임에서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땅에 파묻기도 했었고, 지금은 본래 자리에 서 있다. 그만큼 아직도 한센인들에게 존경받는 흔치 않은 일본인이었다.

그러나, 이후에 부임한 스오 마사히데(周防正季)라는 원장은 자기 동상을 세우게 하고(전쟁물자로 차출공출되었으나 동상의 기단부는 아직 남아있음), 매월 하루씩 "보은 감사일"이라는 절기를 만들어 참배를 강요했다. 

결국 스오 원장은 1942년 이춘상(李春相)의 칼에 죽었다.오랫동안 잊혀진 이춘상을 두고 제 2의 안중근 의사라는 말까지 나왔지만, 이춘상의 후손들은 한센인인 것 때문인지 이춘상에 대하여 알리길 꺼리고 있다고 한다. 

1945년 8월 21일, 원생들의 처우를 개선해 달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 병원과 협상을 하러 나온 원생 대표들을 병원측이 함정을 파 학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의 생존자는 90명 중 6명에 불과하다. 최근까지 목격자와 생존자들이 살아있다고 한다. 이는 한센인 학살과 차별의 역사 중 가장 큰 아픔으로 기록되는 사건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2002년 8월 22일 11시 30분, 사건 현장이었던 국립소록도병원 치료본관 앞에 이 날을 기리기 위한 "애한의 추모비"가 건립되어 있다. 추모비는 일반인도 접근 및 사진촬영이 가능하다. 

6.25 전쟁 당시에는 공산군이 10명의 직원과 1명의 목사를 학살하는 일도 있었고, 1957년 8월 28일에는 경남 사천군 서포면 비토섬에서 섬 개간권을 둘러싸고 최소 28명의 한센병 환자들이 주민들에게 학살당한 사건이 벌어지는 등 한센인들에 대한 차별은 최근까지 극심했다.

한센병 진단을 받은 사람들은 아예 기록상 호적 자체가 지워지고 자동으로 소록도 등에 끌려가다시피 격리되기도 했다. 실제로 11살에 불과했던 어린 아들이 한센병 판정을 받아 소록도로 혼자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한 아버지의 실화도 있다.

처음에 소록도로 떠나는 배에 아들을 도무지 태울 수가 없어서, 차라리 둘이 같이 죽자며 아들을 안고 물 속으로 걸어들어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린 아들이 왜 아버지까지 죽어야 하느냐고, 가족들은 어떻게 살라고 그러냐며 울며 만류하는 바람에 실패. 어린 아들을 한센병자들의 배에 함께 태워 소록도로 보내야 했는데, 아들은 떠나던 순간에 아버지에게 오히려 자기는 이제 다 잊고 형이랑 누나들이랑 잘 사시라고 위로했다고.

현대에는 거의 없어졌지만, 소록도에는 아직 한센병 환자들이 450명 가량 남아 있으며, 2000년대 이후부터 외부 유입이 현저하게 줄었다. 소록도 한센인들의 평균 연령대가 50대 후반이기 때문에 향후 10년 이후에는 "한센인 거주지로서의 소록도"의 이미지는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

한센병 환자는 소록도 외에도 각지에 퍼져 있으며, 소록도 외에도 전국 각지에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해 치료하는 시설들이 위치해 있다. 단지 소록도의 인지도가 가장 높은 것. 예를 들어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가장 안쪽에 오륙도 SK뷰 아파트가 위치한 자리는 원래 부산에서 유명한 한센인 마을이었는데, 47층의 고층 최고급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되면서 그곳에 거주하던 한센병 환자들이 다른곳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또한 안동에도 한센인 격리촌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당시 실향민 출신의 의사인 김대발이 관리하고 있었으며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대발은 피해자들로부터 공포의 대상으로 통했었다고 한다. 

한센병 자체는 전염력이 약하지만 한센병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나도 안 좋게 굳어져 있기 때문에, 일단 한센병 치료원이 들어서면 그 동네 땅값은 흉흉한 소문에 휩싸여 폭락한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로 전염이 되고 안되고를 떠나 집값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주민들이 결사 반대하게 된다. 이처럼 한센병의 이미지는 이미 단순한 질병을 넘어서는 저주나 괴질처럼 취급된지 오래다.



[한센인에 대한 강제 낙태]

한센인 격리지역 및 시설에서 한센인이 애를 배었다고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강제로 낙태하는게 일제강점기부터 군사정권까지 내려온 관례였다. 이렇게 낙태된 일부 태아들의 시체와 시설내에서 사망한 성인 한센인 남성의 시신은 해부되어서 그들의 장기들은 각종 포르말린에 보관되었다. 군사정권 당시 섬에 거주하던 어떤 젊은이가 이를 몰래 촬영하여 2016년 <그것이 알고싶다>에 제보하였고, 이것이 방송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의료 연구 목적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한센인은 유전병도 아니고 실질적인 전염 위협이 없는 질병이다. <그것이 알고싶다>에 나온 해부학 권위자도 연구 목적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다는 견해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한센인 피해자들은 실제 목적은 공포심리 조장용도였다는 증언을 하고 있다. 실제로 낙태 담당 의사가 아기를 낙태한후, 그 낙태당해서 죽어가는 태아를 산모에게 보여줬었다고... 게다가 어떤 격리지역에서는 아기를 낙태한후 산모에게 죽은 아이를 양동이에 넣어서 직접 버리고 오라고 하기까지 해서 정신적인 고통을 배로 안겨주었다 한다. 산모뿐만이 아니라 산모의 배우자도 걸렸다 하면 고문을 받는것은 다반사였다고 한다. 심지어 단종 조치까지 강요받았다는 증언도 있다.

소록도에서는 한센병 환자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많았는데, 그나마도 강제 낙태의 위기를 피하고서 간신히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수직감염으로 전염되지는 않기에 아이들은 정상인이었고, 따라서 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전염을 막기 위해 부모로부터 격리되어 생이별당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아무리 전염력이 약하다 한들, 부모자식 관계처럼 매일같이 부대끼는 수준의 접촉이면 정말 전염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한센병 환자 대다수는 다름아닌 가족이나 친지로부터 나병균이 옮겨붙었다. 특히나 신생아는 면역력이 없다시피하니 비극적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1년 중 단 하루만 유일하게 체육대회라는 명목으로 상봉 기회가 오는데 이 날은 민간인도 소록도 내부 출입이 가능한 유일한 날이며 행사 취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섬 전역이 눈물바다로 변한다고 한다. 부모는 자식이 다가와도 행여 자신의 병이 옮을까 하는 걱정에 손짓해서 쫓아내니…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은 국립소록도병원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격리된 한센인 2세는 각지역의 한센인 2세 전용 학교등으로 2차 격리되거나 해외입양이 되는데, <그것이 알고싶다> 각종 증언에 따르면 2차 격리된 장소조차도 상급자에 의한 폭력으로 점철된곳이었다고 한다. 이에 비하면 해외입양된 이들은 처지가 그나마 나은 편이다.

해외 입양만이라도 해서 적극적으로 한센인 2세를 구제하려고 노력한 사람으로 미국의 B. 고트리브(한국명 고순애) 여사가 있는데 당시 군사정권시절 정부와 협상해서 어떻게 입양을 주선할수 있도록 합의를 봤다고 한다. 그나마도 이러한 과정이 결코 순탄한건 아니여서 어떤 때는 영어에 능통한 정부 관계자가 "외국에서 한국의 나병환자 실태를 말할때 14000명이 아닌 8000명이라고 말해달라. 나라 체면 때문에라도 저렇게 말해달라"라는 말을 듣기도 하였다고 한다.



[처우 개선을 위한 노력]

2014년 6월8일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소록도를 취재했는데 당시 법원에서 국가에 의한 인권문제로 인한 피해보상판결에 승소했음을 알렸다. 여기서의 인권 문제는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정부수립 이후에도 강제낙태와 단종을 강요받은 것. 위에 설명에도 나와있듯이 유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낙태등의 의료 행위가 행해졌고 격리되어 살아야 했기에 정부에서 피해를 보상해야 된다는 내용이었다. 정부에서 이에 대해서 항소를 결정했지만 항소에도 불구 한센병 환자들이 다시 승소했다고 한다. 이후 2016년 7월 30일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보도가 되었다.

<그것이 알고싶다> 보도에 의하면, 아직까지도 대한민국 정부가 소송을 진행하고 있고 대법원에서 1년 8개월째 계류중이라고 한다. 한편 그날 방영된 일본의 사례와 비교해보면 씁쓸한 현실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한센병 소송의 피고인 보건복지부는 직접적으로 인터뷰를 거절한 대신, 소송대리인을 통해서 자신들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전달했다. 이를 요약하자면 "원고들은 국가가 강제로 수술시켰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원고(한센인들)가 자식을 키울 형편이 안되니까 스스로 그런 수술을 결단한 것으로 여겨지며, 원고의 주장은 신뢰도가 낮다. 오히려 원고가 기억을 스스로 조작하는게 아닐까. 아직도 일제시대인줄 아는게 아닌가?" "그리고 피해자들이 주장하는 강제성을 입증할 자료가 없으므로 오히려 관계자들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다."는 식이다.

여기서 마지막에 진행자인 김상중씨가 던진 말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과거사를 청산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 사실이 잊혀질 때까지 미루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과감하게, 과거의 그 과오를 인정하고, 거기에 따른 충분한 사죄와 배상을 하는 것이다."

현재 국가배상에 대한 재판이 진행중이며, 법원은 항소심에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였다.



[왜 한센인 차별이 지속되었나?]

먼저 간단하게 요약하면, 군국주의 파시즘을 매개로 한 우생학의 잔재가 해방후 대한민국까지 지속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알고싶다> 취재분에서는 그 장본인으로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의사였던 이갑수를 지적하는데, 이갑수는 1930년대 초중반 당시 아돌프 히틀러가 갓 정권을 잡은 나치 독일로 유학을 간 경력이 있었으며, 이 유학 경험을 통해 당시 나치스가 국책사업으로 밀기 시작한 우생학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가 당시 기고한 논문으로 추정되는 문서에서는 직접적으로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까지 거론이 되어있었으니, 이정도면 빼도박도 못하는 나치즘 영향이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이 해방후 혼란기와 한국전쟁을 거치고 나면서도 여전히 살아남아서 이승만 정권아래 보건부차관 요직을 차지했는데 이 이후로 1959년과 박정희가 갓 정권을 잡은 1964년에 두차례에 걸쳐서 우생법 관련 제정을 시도하려하지만 당시 천주교계의 반발로 이 시도는 막혔지만, 대신 모자보건법 14조에 그가 세우려던 우생법의 파편이 고스란히 살아남아서 이는 해방 이후에도 국가차원에서 한센인들에 대한 차별권한을 '보증' 해주는 조항이 되어버렸다.

이미 해외에서는 2차세계대전중에 DDS라는 치료제가 개발되었고, 전쟁의 와중에도 서구에서는 치료약이 보급되기 시작해서 2차세계대전 전후로 선진국에서는 서서히 인식이 개선되기 시작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인해(이갑수 뿐만이 아니라 여러가지로) 대한민국 정부 및 절대다수 국민이 가진 한센인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2차대전 이전 수준으로 교착되었던것이다.

1970년대 초 한국의 나병환자 격리촌을 다룬 미국 NBC의 한 다큐멘터리에서는 "그들은 아주 오래된 무지의 피해자입니다"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비판함으로써 정부로부터 시작된 한국 일반대중의 이러한 편견이 간접적으로 나라망신의 여지가 된 셈이다.



[최근 감염 경로]

21세기 한국에서는 주로 동남아시아에서 걸려서 온 한국인/동남아 노동자들로부터 유입되는 편이다. 치료는 동네 병원에서도 할 수 있을 만큼 쉽지만, 동네 병원에서 처리 안하고 반드시 큰 병원으로 보내도록 하는데, 이는 한센병 자체가 가지는 위력도 위력이지만, 무엇보다도 한센병에 주로 쓰는 항생제인 DDS와 리팜피신 내성 한센병 균주가 생겼는지 안 생겼는지를 추적하기 위해서이다. 게다가 2년 이상의 장기간의 치료 기간이 필요하기에 전문 병원에서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기도 하다. 만약 DDS, 리팜피신 내성 한센병 균주가 생겼다면 헬게이트가 반쯤 열렸다고 보면 된다. 리팜피신 내성 한센병 균주의 탄생은, 2003년 사스, 2014년 에볼라 유행, 2015년 메르스 사태 따위하고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심각한 사태이니, 추적 조사에 성실히 임하자. 그렇지만 그냥 한센병이 의심되어 병원에 간다면 의사들이 알아서 검진과 치료를 다 해준다. 국내에서 한센병에 대한 치료는 주로 강남성모병원에서 전담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