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타이타닉 MS 에스토니아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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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타이타닉 MS 에스토니아호 참사


2017. 1. 14.

1994년 9월 28일 새벽 1시경에 일어난 스웨덴- 에스토니아를 오가던 대형 카페리선인 에스토니아호의 침몰 사고. 풍랑으로 인해 뱃머리의 램프도어가 파손되면서 일어난 사고로, 승무원과 승객 총 989명 중에 853명이 한밤중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만 사고다.

이전동안 15년 무사고로 잘만 운영하던 배가 한순간의 풍랑과 결함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실은 채로 침몰한 사고로, 이 사고와 함께 현재도 많이 거론되는 페리선 사고 중 하나이며 이로 인해 페리선에 대한 안전 규정이 더욱 강화되었다.



1979년, 노르웨이의 팰레이 어거스튼슨(Parley Augustsen)은 자신이 이끄는 해운사에서 노르웨이-독일 구간에서 굴리기 위해 독일 마이어 조선(Meyer Werft)에 15,566톤의 대형 카 페리선을 주문했다. 허나 정작 조선소 측에서 전부 만들어 놨더니, 어거스튼슨 측은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 돌연 인도를 취소하고 말았고, 그로 인해 다른 해운업체인 핀란드의 레데리 운수(Rederi Ab Sally)측에서 얼떨결에 이 배를 첫번째로 매입하게 되었다. 맨 처음 배를 인도받게 된 레데리 운수는 당시 계열사였던 바이킹 해운(Viking Line)에서 이 배를 바이킹샐리(Viking Sally)라는 이름으로 1990년까지 핀란드-스웨덴 구간에서 굴렸다. 그 후엔 핀란드 기선 운수(Finland Steamship Company. 현재는 Effoa 해운으로 개칭)라는 해운업체에서 이 배를 매입하여 핀란드-스웨덴 구간에서 굴리게 되는데, 자회사인 실야 해운(Silja Line)에서 1991년까지 실야스타(Silja Star)라는 이름으로 굴렸고, 1991년부터 1993년까진 또다른 자회사인 바사 해운(Wasa Line)에서 바사킹(Wasa King)이라는 이름으로 굴렸다. 그후 동년(1993년) 에스토니아와 스웨덴 합작 해운사인 에스트 해운(Estline)에서 이 배를 매입하여 에스토니아(Estonia)라는 이름으로 에스토니아-스웨덴 구간에서 굴리게 된다. 에스토니아호는 운영 해운사가 여러번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15년 동안 이상없이 잘만 운항하던 배였다.



1994년 9월 27일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을 출발해 다음날 스웨덴 스톡홀름에 도착할 예정이던 에스토니아호에는 승객과 승무원 등 989명이 타고 있었다. 출항 당시 항해 조건은 나쁘지 않았지만 외해로 나서자 풍랑이 갑자기 거세졌는데, 그 다음 날 새벽 1시경에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뱃머리의 차량 출입용 램프도어의 잠금장치가 부서지며 떨어져 나가 찬 바닷물이 들어차기 시작했고, 15분 뒤 배는 갑자기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파도에 쓸려 배가 오른쪽으로 30~40도 기울어지면서 선내 이동이 불가능해졌고 채 한 시간도 안돼 수많은 승객들이 객실에 갇힌 채로 침몰하고 말았다. 선장이 여객선의 침몰이 확실해진 후에야 비로소 경고방송을 보냈는데 하필이면 한밤중이어서 많은 승객이 잠들어 있었고, 그나마 깨어 있던 사람도 에스토니아어로 나오는 방송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갑판 위 승객들만 생존할 수 있었으며, 생존자의 3분의 1이 승무원이었고 대부분 젊은 남자였으며 55세 이상 생존자는 7명뿐이었고 12세 미만의 어린이 중 살아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승객이 단잠을 자고 있던 한밤중에 생긴 참극이었다.


이후 스웨덴 정부는 선박 인양과 시신 수습에 나섰지만 추위와 어둠, 악천후로 바다에선 시신 94구밖에 인양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스웨덴 정부는 3개월간의 수색과 인양 작업을 벌였지만 결국 모두 실패한 나머지 침몰 선박을 수중무덤으로 보존하겠다고 발표했고, 침몰 지점은 인양하지 못한 영령들을 엄숙히 추모하는 추도 해역으로 지정되었다. 결국 1994년 9월 스웨덴으로 가려던 818명의 여행객들은, 아직도 차가운 바닷속에서 에스토니아호라는 거대한 관 안에 안치되어 있다



이 사고로 인해 국제사회는 카 페리선의 안전 증진을 위해 복원성 규정을 개정하고 공공방송시스템을 설치하는 등 국제협약 내용을 대폭 강화했다.

그러나...사고 3년 뒤에 국제조사위원회가 진상조사를 했지만, 졸속수사인데다 유족들이 납득하기엔 너무 미흡했고, 일부 밝혀진 진상은 허위였다. 게다가 사고 이후 10년 뒤에 또다른 불편한 진실이 드러났는데, 정상 운항시의 에스토니아호가 군사장비를 몰래 운반하는 데 썼던 게 드러났다. 이러한 점 때문에 유족들은 지금까지도 독립적인 진상조사 기구 설립을 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