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의 학창시절부터 삼성 회장이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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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의 학창시절부터 삼성 회장이 되기까지


2017. 1. 15.

1942년 1월 9일, 일제강점기 당시 경상북도대구시에서 삼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얼마 안가 어머니 품을 떠나 아버지 이병철의 고향인 경상남도 의령군의 할머니댁에서 3살 때까지 자랐고, 이후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이때도 형과 자취생활을 했기 때문에 사실 이시기 이건희 남매가 부모와 함께 모인 자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환경 때문이었는지 이건희의 성격 또한 내성적이 되어 어릴때부터 말수가 적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단 혼자서 놀고 사색하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 전란 중인 고학년때 다시 한국으로 와 부산사범부속국민학교를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4,5학년을 같이 다닌 권근술 전 한겨레신문 사장 증언에 의하면 부자집 도련님이라 신기한 장난감을 많이 가지고 와 같이 놀긴 했는데, 말이 없고 장난도 잘안치던 아이라 그 외엔 기억이 잘 안난다고. 딱히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던 모양.

그러다 고교시절엔 서울사대부고에 진학했는데, 당시 이건희 회장의 동창이었던 홍사덕 전 의원이 2001년 한 인터뷰에 따르면, 미국에서 차관을 많이 들여와야 미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우리 안보가 튼튼해진다는 둥 공장을 지어서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게 애국하는 길이라는 둥 1950년대 후반 고등학생이 생각하기 힘든 매우 독특한 사고를 가졌다고 한다. 

이때도 이건희는 딱히 말이 없고 행동도 느릿느릿한 학생이었다고 하는데, 학과공부에도 별 뜻이 없어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사냐고 물어보면 “나는 사람공부를 제일 많이 한다”는 황당한 답을 했다고. 그게 그냥 하는 말은 아닌지 이후 삼성의 한 임원이 이병철 회장의 눈 밖에 나서 쫓겨난 일이 있었는데, 고교생 이건희가 아버지를 찾아가 설득하자 이병철이 두말 하지 않고 그 임원을 다시 불러들였다고 한다. 이병철은 스스로의 인사관리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고등학생 이건희의 사람 보는 눈을 더 인정하고 있었다는 얘기.


또 이 시절 이건희가 홍사덕에게 느닷없이 일본 소학교 교과서 몇 권을 건네면서 “니 일본어 배워놔라. 니 정도면 두어 달만 해도 웬만큼 할끼다”고 했다. 먹물 좀 들었다는 고교생들에겐 반일감정이 팽배해있던 시절이라 홍사덕이 “그걸 뭐하러 배우노?” 하고 뜨악하게 물었더니 예의 그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건희 왈 “일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봐야 그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게 된다”고 하더라는 것.

사대부고 레슬링부에서도 활동했다고 한다. 공부에는 별 뜻이 없었던지 성적은 중간도 못했다고 한다.

이후 연세대학교 상학과에 입학했다 자퇴하고 와세다대학 경제학과에 진학해 졸업했다.


1966년 10월 동양방송에 입사한 뒤, 1968년 주식회사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1978년 삼성물산주식회사 부회장, 1980년 중앙일보 이사를 거쳐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이 되었다.

이병철의 장남도 아니고 셋째 아들인 이건희 회장이 삼성을 물려받은 게 전통적인 재벌 구조에선 좀 의아할 수 있는데, 이는 1969년 말에 이건희 회장의 형들인 이맹희와 이창희가 아버지를 청와대에 고발하는 병크, 일명 왕자의 난을 터뜨리는 바람에 후계구도에서 쫓겨난 탓이 크다. 같이 왕자의 난이 일어난 현대에서는 정주영 회장의 사망 직전(2000년) 즉 정주영 회장의 힘이 빠질대로 빠진 상황에서 벌어져서 후계자들이 자신의 지분을 갈라 먹는 것에 성공, 현대그룹이 분열되었던 것이지만 삼성가에서의 왕자의 난은 이병철이 반란 따위 다 진압할 힘이 있었을 때 벌어졌고 그 결과 이맹희와 이창희가 진압당해 내쳐졌다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물론 후술하겠지만 이건희 본인이 나름 능력을 보여준 덕도 있다.

사실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이건희는 형이 두 명이나 있어서 삼성의 회장이 되리라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맹희의 무능과 이창희의 반란 등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이건희에게도 기회가 왔고 이건희는 두 형들과는 대조적으로 아버지인 이병철의 마음에 들 정도의 업무성과를 내면서 후계자로 굳어졌다. 특히, 동양방송을 전두환에게 뺏기기 전까지는 드라마 부문을 직접 챙겨서 키웠을 정도로 의욕적이었고, 성과도 꽤 좋았다. 삼성그룹 내부 경영진과 이병철 회장의 반대에 개인 사재로 한국 반도체를 인수하고 지속적인 설득으로 이병철 회장의 삼성 그룹 차원의 투자를 이끌어냈는데 이것이 현재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가 되었다.

이 시절 군복무를 했는지에 대해선 이야기가 엇갈린다. 일전에 강용석은 이건희가 정신질환으로 면제받았다는 주장을 했으나 그 근거로 든 게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한 얘기임이 드러났고, 한겨레 신문의 취재에서는 만기 전역은 아니지만 복무를 하긴 했었다는 보도가 있기도 했었다. 이래저래 석연치 않은 이유로 군 복무를 회피한 것은 사실인듯. 그런데 이에 대한 비판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한데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그런 부분이 거의 공개가 되지 않은 부분이 커보인다. 사실 지금도 '삼성가 남자라면 군 복무를 하는 것보다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드는게 낫다'는 소릴 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긴 하다. 

이건희는 두 명의 스승으로 이병철 회장과 장인 홍진기를 꼽았다.

“선친은 경영일선에 항상 나를 동반하셨고 많은 일을 내게 직접 해보라고 주문하셨다. 하지만 자세하게 설명해주지는 않으셨다. 현장에 부딪치며 스스로 익히도록 하셨다. 이런 시간이 쌓이면서 ‘경영은 이론이 아닌 실제이며 감이다’는 체험적 교훈을 배웠다…한편 장인은 기업 경영과 관련된 정치, 경제, 법률, 행정 등의 지식이 어떻게 서로 작용하며, 이 지식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문답식으로 자상하게 설명해 주셨다. 결국 나는 두 분의 가르침을 통해 경영에 관한 문(文)과 무(武)를 동시에 배운 셈이다….”

이건희는 퇴근 후에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놀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주로 기술관련 서적을 탐독하거나 전자제품, 각종 기계류를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연구를 거듭했다.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관련 전문가들을 집으로 불러다 가르침을 청했다. 그는 삼성 부회장 시절 사석에서 “주말에 우리집으로 초청해 한수 배운 일본 기술자만도 수백 명이 넘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NEC, 도시바, GM, 휴렛팩커드 등 세계 유수 기업의 CEO들도 방한시 이회장 자택을 주요 방문지로 잡는다.

그의 한남동 자택을 자주 찾는 한 재계 인사는 “이회장의 서가엔 경영학 서적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반면 미래과학, 전자, 우주, 항공, 자동차, 엔진공학 등 이·공학 관련서적이 즐비하게 꽂혀 있는데, 전집류가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서 그 책들은 이회장이 직접 한 권 한 권 골라 읽은 것 같았다”고 전한다.

자동차 마니아인 이회장은 유학 시절부터 중고차를 사서 엔진까지 샅샅이 뜯어보고 다시 조립하곤 했다. 웬만한 전자제품은 콩알만한 부품의 기능 차이까지 꿴다고 한다. 국산 제품과 외국산 제품을 갖다놓고 부품 하나하나를 비교하며 품질 격차의 원인이 된 부품을 밝혀낸 뒤 계열사 기술담당 임원을 불러 그것을 쥐어주기도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