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족들의 스트레스... 종학(宗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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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들의 스트레스... 종학(宗學)


2016. 6. 13.

왕족(王族)이란 의미는 단어 뜻 그대로... '임금의 일족'을 말한다. 즉 임금과 같은 성씨(姓氏)을 쓰는 혈족(血族) 개념의 둘레에서 본 친족(親族)들이다. 조선시대 왕족들은 당연히 전주이씨(全州李氏)들... 전주를 때로는 완산(完山)으로도 표기하는데 조선시대엔 '전주이씨'보다는 '완산이씨'란 말을 많이 사용하였고 태조(太祖) 이하의 자손들은 선파(璿派)라 불렀다.

왕족들은 보통 '어느 왕의 몇 대손'이라 부르기 보다는 하나의 파별로 나뉘는 '○○대군(大君)'이나 '○○군(君)'의 몇 대손이라 이르는데 국왕을 어느 한 일족의 파조(派祖)로 부르기엔 위험부담(?)이 컷던 것 같다. 임금은 '만인(萬人)의 어버이'였기 때문이다.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 고려 말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물씬해서 그런지 건국이념인 유학(儒學)의 사상은 상류층 사대부들 뿐만 아니라 왕족들 사이에도 무시되었던 것 같다. 여전히 무력(武力)이나 집안의 음덕(陰德)이 최우선적인 출세의 지름길이었고 신분의 보장 역시 혈통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의 4대 임금 세종(世宗, 1397.4.10~1450.2.17)은 사회의 최상류층이라 할 수 있는 왕족들부터 '유학의 이념' 세례를 내려야한다라는 의무감을 짊어지게 되었다. 혈통만 믿고 시정의 잡배들 같은 행동을 하고 다니는 왕족들에게 공부를 하라고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1428년(세종10년) 7월12일 세종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종학(宗學)'을 세워 대군(大君) 이하 종실(宗室)의 자제(子弟)들로 하여금 나가서 유학을 배우라고 지시를 내린다. 이른바... 과거시험을 위주로 하는 공부가 아닌 왕족으로서 기본 유학 소양을 배우라고 왕족들만의 학교 '종학'을 세운 것이다. 이 종학은 오로지 왕족들만 들어갈 수 있는 조선시대 최고위 인물들만이 들어가는 '왕립 스쿨'인 셈이다. 이 종학은 들어가기도 까다롭지만... 공부하기도 어려웠다.
원래 왕족은 왕자의 4대까지는 벼슬길이 막혀 있어서 공부를 해봤자 별 필요가 없었다. 왕족들은 '왕자의 4대손'까지 자동적으로 적서(嫡庶)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종친부(宗親府)의 벼슬을 받아서 다른 실직(實職)을 얻을 수 없었다. 태어나자마자 왕족으로서의 직위를 얻는데 굳이 무식하게 공부를 할 필요성이 없었기에 왕족들은 왕명이라 형식적으로 따르기 시작했지만 학교 생활이 즐거우리 만무했을 것이다.

 

종학이 처음 설립되었을 때 성균관 같은 국학처럼 엄격하기가 그지없었다. 세종은 무식한 왕족들을 유학(儒學)으로 무장시키기 위해 먼저 서형제(庶兄弟)였던 경녕군(敬寧君) 이하 8살 이상 모든 왕족들은 의무적으로 종학에 들어가도록 명령을 내렸는데 경녕군은 태종의 서자 왕자 중 가장 맏이였다.

종학의 위치는 경복궁 건춘문(建春門) 밖으로 1429년 더부살이하던 종학을 새로 건물을 지어 이전을 시켜 주었는데 새 학교 건물과 더불어 엄숙한 학교생활도 규칙을 내려 정해 놓았다고 한다.


1430년 5월 17일 드디어 세종도 자신의 왕자들을 종학에 보내기 시작하였다. 세자를 제외한 나이가 많은 왕자들인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안평대군(安平大君), 임영대군(臨瀛大君)을 종학에 보냄으로서 본보기를 보이자 마지못해 왕족들이 열심히 종학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엄하신 왕명이라도 왕족들은 동기부여가 전혀 없는 학문을 공부하기가 무척 힘들었던 것 같다. 과거시험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치지 않아도 복록과 작위가 굴러오는 왕족 생활에 무슨 공부~ 결국 가장 먼저 왕명에 반기를 든 것은 세종의 이복 동생들이었다.

 

태종은 12명의 왕자들이 있었는데 구성은 적자왕자 4명과 서자왕자 8명이었다. 그 중 서3남 온녕군(溫寧君)과 서5남 혜령군(惠寧君)이 가장 먼저 '종학 규칙의 매운 맛(?)'에 당하는 첫 희생양이 되고 만다. 아버지가 선왕(先王)이요. 형님이 현왕(現王)인 왕자가 무슨 걱정이 있으랴~ 놀기 바쁜 왕자님이 성균관 뺨치는 규율을 가지고 공부를 시키는 종학의 엄격함에 몸이 안달이 난 것이다.
결국 왕족들을 관리하는 관청인 종부시(宗簿寺)에서 왕에게 고해 바친다. 두 왕자님이 공부는 안하고 종학을 땡땡이 친다고... 특히 혜녕군의 광패(狂悖)함은 극에 달하고 있다고 알린다. 혜녕군은 세종과는 상당히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서왕제(庶王弟)로서 어릴 적부터 교만하고 놀기 좋아해 세종이 억지로 종학에 보내 공부를 시켰는데 한번은 경회루에서 활쏘기하고 놀다가 익사할 뻔한 것을 지나가던 세자(훗날 문종)가 보고 숙부 혜녕군을 건져내었다고 한다.
어쨌든 규칙을 어긴 댓가... 처분은 가혹했다. 형뻘인 온녕군은 평소의 행동거지를 봐서 봐주고, 행동이 심했던 혜녕군은 왕족 직접(職牒)과 하사한 책들을 거두어 들이도록 하는 세종의 명령이 떨어진다. 이른바 왕족들 사이에 공부를 안한 댓가로 망신을 준 것이다.

 

1430년 7월 5일 종학에 벌칙이 없어서 왕족들이 까분다는 상소에 세종은 규칙을 엄하게 정하도록 명령을 내리는데, 규칙에는 왕족으로서 행동거지가 나쁜 왕족은 가차없이 직첩을 거두어 들이도록 하고 종실 직접이 없어도 공부는 계속하도록 했다. 직첩 없는 왕족도 공부는 해야한다는 논리였는데 정종의 서4남 선성군(宣城君)이 어느 여자와 간통하는 바람에 직첩을 빼았긴 일이 있었다. 그래도 왕손이니 종학에 나와 공부하도록 세종이 명령하게 되는데 공부는 종실 직위가 있던 없던 계속 하라는 의사표시였다.

 

세종이 만든 종학의 규칙을 살펴보면은 먼저 진시(辰時)에 학교에 나와 공부해서 신시(申時)에 집에 돌아가도록 했는데, 즉 오전 9시에 나와서 오후 5시에 학업을 끝내도록 했고 출석의 근만(勤慢) 여부는 10일에 한 차례씩 보고되었다. 그리고 노는 휴일은 매월 초8일·15일·23일로 정해놓았고 국기(國忌)나 부모 복제(父母服制) 시에도 나와서 공부하도록 했다. 또 금령(禁令)을 다섯 번 범한 자와 강독(講讀)에 세 번 불통한 자는 여지없이 종실으로서의 직첩과 서적을 빼았겼는데 결국 왕족들이 무더기로 징계 먹는 사태가 자주 발생하게 된다.

 

예로 정종의 서7남 수도군(守道君)과 서8남 임언군(任堰君) 형제가 수업 땡땡이 치다가 규칙에 한방 먹히고 이어서 태종의 서3남 온녕군(溫寧君)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종학에 나오지 않다가 하사한 서적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번번히 칭병(稱病, 아프다는 꾀병)을 하고 나오지 않자 1434년에 희안한 명령이 내려지는데... 그것은 종학에 가는 왕족 중 아프다는 증상이 있으면 반드시 의녀(醫女)가 진찰해 보고 판정을 받으면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명령이었다. 얼마나 나오지 않으면 이런 사소한 명령까지 내려지는지... 세종은 종학의 세세한 규칙까지 만들어서 관리를 하였다.

 

종학에 나간 왕족들이 공부를 다 잘한 것은 아니었다. 원래 동기부여가 없는 공부는 무의미한 것... 보통 사대부의 자식들과는 달리 공부의 양과 질도 형편 없었다. 이에 공부를 어릴 적부터 잘해 온 신동(神童) 출신의 세종은 기가 막혔다. 천자문에 이어서 익히는 소학(小學)조차 마스터 못하는 종친이 수두룩하다는 소리에 기겁을 한 세종은 결국 1443년(세종25년) 어느 정도의 수준을 지니는 왕손들에게는 인센티브를 주도록 배려하게 된다.
즉... 소학(小學)과 사서삼경도 아닌 사서이경(四書二經)과 소미통감(小微通鑑)을 통달한 자는 연한(年限)을 정하여 방학(放學)시켜 주도록 조치를 취해 주었다. 그리고 그 책도 못 다다른 종친은 정액(定額)의 경서(經書)를 읽고 난 후 교관이 보고 1권마다 다섯 곳을 강(講)하게 하여 대충 통달하였다 싶을 정도로 공부한 사람도 방학(放學)을 허락하게 하였고, 그것조차 못하는 왕족들에게도 각 서적의 다섯 곳 이내 조금이라도 통하는 구석이 있어도 은전을 베풀도록 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세종 시대의 왕족들은 '종학'이라는 학교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워낙 군주가 학문을 좋아하고 천재인 까닭에... 무식한 일가 친척들을 보노라면 아마 화통이 터졌을 것이다. 이런 무식한 것들과 함께 일가라니... 아마도 세종의 자존심엔 그런 멍청한 친족들이 이해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조선왕조가 막 건국되었던 중요한 시기였고 사회의 기본이념이 모두 성리학에서 출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실의 일원들이 그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국가 경영에 큰 차질이 생긴다고 세종이 생각했을런지도 모른다.
하여간 세종은 사회 곳곳에 '성리학의 이념'을 뿌리박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상류층이라 할 수 있는 왕족들부터 머리 속부터의 개조를 실시해야했고 그 결과 종학으로 말미암아 왕족들도 '과거시험'라는 메리트에 도전하는 다른 사대부와는 달리 반강제적인 유학의 이념들을 접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 세종 때부터 아무리 왕족들이라도 일생을 편안하고 안락하게만 살진 않았다는 것이다. 스스로 일정한 양의 공부를 해야 했고 공부를 하지 못하면 공부를 잘 할 때까지 국가에서 괴롭힌 것이다. 오죽했으면 어떤 종친은 죽을 때 더 이상 종학에 다니지 않아서 행복하다라는 말까지 남기고 죽었겠는가...? 종학의 규칙은 성균관과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성균관의 학생들이야 과거시험에 목을 멘 사람들이지만 종학의 학생들은 그런 위치가 아닌 사람들로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형평성의 논리로 적용했다면, 얼마나 종학이 종친들의 머릿 속에 스트레스로 남았는가에 심하게 상상하지 않아도 대충 느낌이 올 것이다.
사람이란 목표가 있으면 도전을 하지만... 목표를 잃어버리면 향해 나가는 추진력이 없다. 조선의 왕족들에겐 벼슬을 한다는 목표감은 전무(全無)하였다. 그러나 왕족조차 유학적 교양을 쌓아야 한다는 사회의 흐름 속에서 결국 세대를 거치면서 머릿 속 깊이 새겨진 유풍(儒風)은 결국 조선을 '성리학의 나라'로 이끌어가는데 조력(助力)이 된 것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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