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한국, 역사에 기록된 미소년과 동성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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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 역사에 기록된 미소년과 동성연애


2016. 3. 31.


<한국>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화랑에 대한 기록입니다. 화랑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을 살펴보면(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나라에서는 귀족 출신의 외양이 잘생기고 품행이 곧은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받들게하자 무리가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렇습니다. 이 화랑 아무나 하지 못했습니다. 집안 좋고 잘생긴 미소년 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몇 향가에서 드러나는 낭도(화랑 밑에 부하비슷한거)들의 화랑에 대한 사랑은 존경심을 넘어 사모의 감정에 가깝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득오라는 낭도가 죽지라는 화랑에게 바친 '모죽지랑가'는 그야 말로 죽지랑을 사모하는 노래인 것입니다.하여간 화랑들은 늘 같이 생활하고 산과 들로 심신을 수련하러 다녀으니 화랑도에서 동성애적 행위와 사량은 꽤 공공연하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일본 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공식화하였고 우리 나라 조선시대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화랑에서 남색의 행위는 부정할 수 없다고 하였답니다.

역사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미소년은 신라 36대왕 혜공왕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원래 공주의 몸으로 태어나야 할 것을 왕이 우겨서 왕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서 부터 왕자의

심성보다는 공주의 심성과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8살에 왕위에 올랐는데 늘 여자같이 행동하고 여자옷을 입고 미소년들로 구성된 근위대들과 놀아났다고 합니다.

또한 신라 원성왕 시대에는 묘정이는 미소년이 살았답니다. 이 묘정이라는 미소년의 용모가 너무나 출중하여 나라 안팎에 소문과 칭찬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신라 고관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으며 후에는 당의 황실에 들어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 남첩이 되었다고 합니다.

고려조 이후로 오면 공식적인 동성애의 기록은 볼수가 없답니다. 고려후기의 주요 문학

장르는 경기체가이고 경기체가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한림별곡' 인데 이 시가는 젊은 문인들의 사상과 감정을 잘 표현한 작품이라고들 합니다. 하여간 이 작품에서 보면 당대에 미소년으로 이름이 높은 '정소년'과 자신이 그네를 함께 타고 남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둘이 손잡고 깊은 산으로 소풍을 가고 싶다는 내용의 시가 애절하고도 낭만적으로 묘사되어 있답니다.

여기서 나오는 정소년 바로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미소년이라 칭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공민왕입니다. 이 사람은 사랑하던 왕비가 있었는데. 그만 왕비가 죽자 다른 여자들과 성관계를 하고픈 마음이 사라져 결국은 미소년을 탐닉하게 된 케이스 입니다. 공민왕은 자제위라는 근위대를 설립했는데 말이 근위대지 귀족 가운데 잘생긴 청년들을 뽑아 곁에 두고 총애한 것입니다.

홍륜, 한안, 권진, 홍관, 노선이라는 사람들이 가장 예뻐서 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아 매일 밤시중을 들었다고들 합니다. 결국은 홍륜에게 밤일 후 침실에서 살해당했지만 어쨌든

그랬답니다.

조선시대에는 몇몇 민담들에서 그 기록을 찾아볼수 있습니다.그중 대다수가 남사당패에 대한 것입니다. 중국의 경극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유랑극단인 남사당패. 이름그대로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사당패 입니다. 남사당패의 대표적인 미소년은 '삐리'라고 부르는 신참자들입니다. 아직은 어리고 예쁜 소년들은 주로 여장을 하였는데 이들을 '삐리'라고 불렀습니다. 이들 삐리들은 공공연히 마을의 남정네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돈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삐리들에게는 '뜬쇠'라는 남편도 있었습니다. 이 뜬쇠는 남사당패에서 어느정도 오래 있은 선임자들인데. 이 삐리들을 가르치는 역활을 하기도 하여 보통 1대 1로 상대하였는데 그 와중에 삐리들에게 성적 봉사를 받는 남편의 역할을 했답니다.

<중국>


도서관에서 "중국의 성문화"라는 책을 읽음으로써 많은 것을 알게되었는데예로부터 중국에서는 남색이 그리 큰 흠은 아니었다고 합니다.대장부라면 남색은 한번쯤 즐길만하다고 여겼지요.중국에서는 동성애의 상대가 되는 예뿌장한 남자아이를 연동이라고 하였다네요.

여기서 연자는 아름다울, 순종할 연 자에요.글고 동자는 당연히 아이 동.

그러니까 풀이해보면 아름답고 순종하는 아이라는 해석이 되지요.

그중에서 아름다운 사실을 찾는다면 첫째 진자고의 이야기 입니다.

옛날 중국 남진에 진자고라는 남자가 살았습니다.

이 사람은 유명한 장군이었는데 여자처럼 아름다우면서도 말타기와 활쏘기가 나라안에서 제일 뛰어났답니다.

'움직임이 바람같았다' 라나요?

하여간 그래서 황제의 근위병이 되었는데 문제(황제 이름)가 그를 매우 총애하였는데 어느날 한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내가 제왕이니 내 그대를 마땅히 왕후로 책봉해야 하건만 동성의 성이라 걱정이 되는구나' 라구요.

하여간 중국의 고전인 <동자고전>에는 두 사람의 성관계 장면도 실려서 지금까지 전해진답니다.


"임금의 물건이 자못 위대하여 사랑으로 아껴주었건만 진자고가 이기지 못하여 이불을 깨물어 이불이 찢어지고 말았다. 임금이 행위를 그치고 그만하겠다고 말하자 진자고가 제 몸이야 신하의 몸인데 어찌 감히 제 몸을 아끼겠습니까. 라고 하며 계속 하기를 청했다. 이에 임금이 그를 더욱 사랑하였다."

어떻습니까? 중국의 진짜 실록에 전해지는 내용이랍니다.

축제에 쓰기에는 좀 야한가요?


둘째 안릉입니다.우선 안릉은요 초나라 공왕의 남총(남자 첩이란 뜻이래요)인데 권세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한 신하가 찾아와 '군주가 자네의 미모를 좋아하지만 이후에 색이 쇠하여 사랑이 식는다면 심지어 잠자리가 아직 식기도 전에 이미 다시는

사랑을 받지 못할 수 있으니 자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군주에게 죽더라도 그를 따르겠다고 말하여 신임을 받는 것이다.'

라고 충고해 주었다네요. 그리고 얼마 안가서 안릉이 왕을 모시고 사냥놀이를가게 되었는데 그날 저녁 왕이  '오늘 사냥은 매우 즐겁지만 내가 죽은 후에 누가 있어 나와 함께

이런 즐거움을 나누겠는가' 라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안릉이 눈물을 흘리며 무릎꿇고 말하기를 "대왕이 천세를 누리고 난 후 저는 황천에 까지 가서도 계속 임금님을 모시기를 바라옵니다" 라고 했답니다.

이에 왕이 감동을 먹어서 작위를 내리고 계속 이뻐해 줬다네요.


셋째로 용양은요 위나라 왕의 남총이었습니다.그 역시 아름다운 외모로 왕의 사랑을 받았는데 어느날 왕과 함께 낚시를 가게 되었습니다.

낚시터에서 왕이 물고기를 낚다가 아주 큰 물고기를 낚자 전에 잡은 작은 물고기를 놓아주었습니다.그러자 용양이 눈물을 흘리면서 "오늘은 폐하께서 신을 사랑해주시지만 내일 더 아름다운 사람이 생기면 저를 버리시겠지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왕이 그러지 않겠다 맹세하며 왕에게 다른 남자나 여인을 추천하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 합니다.당대의 시인들은 모두 그들의 미모를 찬양했다고 하네요.



그 많은 시 중에서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지난날 화려했던 안릉과 용양,

가녀린 복숭아 꽃 불붙는 듯 밝은 빛

기쁨이 긴 봄과 같고 발걸음 소리는 가릉 서리같구나.

흐르는듯한 눈매 아름다움 발하고

말하고 웃을 때 꽃향기를 토해 내는 구나.

손 이끌고 기쁜 사랑 만들고 밤새 함께 즐기네.

원컨대 한쌍의 새가 되어 날개 나란히 날고싶어라.

이 맹세를 분명히 하여 영원히 잊지 말자꾸나."



네번째로 성제와 장방이 있습니다.이들은 꽤나 절절한 사랑을 나누었습니다.장방은 젊고 핸섬하며 총명하고 민첩하여 성제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황제는 조카딸을 그에게 시집보내었는데 그를 집에 보내지 않고 황궁에서 동거하며 자주 유람도 다니고 미행도 하였다고 합니다.

총애를 받음이 너무 지나쳐 다른 귀족들의 질투를 사게 되어 태후가 그를 궁정에서 쫒아내고 먼 곳으로 추방시켰답니다.

성제는 장방과 눈물을 흘리며 이별한뒤 매일같이 편지를 보내 서로 연락을 계속하다가 그리움에 못이겨 젊은 나이에 죽었답니다.

성제가 죽자 장방도 통곡하다가 죽게 되었답니다.


다섯번째로 청나라때의 일화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청나라때에는 통치 계통의 혈통의 순수함을 위해 창녀와 자는 것을 엄격히 금했다고들 하네요. 그니까 지배계층인 만주족하고 피지배계층인 한족들과의 사랑은 금기시 되었다는거죠.

하지만 자식이 생기지 않고 종실의 분란도 있을리 없는 동성애는 한 없이 관대했다고들 합니다. 그 관대함이 어느정도 였냐하면 '사람들이 남색을 매우 중히여겨 귀천을 불문하고 각각 결합한 뒤 연장자는 계형이 되고 연소자는 계제가 된다. 그 형이 아우의 집에 들어가면 아우의 부모가 사위처럼 쓰다듬는다. 아우의 생계에 관련된 비용은 형이 부담하며, 나이가 30이 넘으면 부부처럼 생활한다' 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 하여간 얼마나 너그러웠는지 짐작이 가죠?


또한 경극 아시죠? 그 패왕별희에 나오는 중국 연극요.

패왕별희도 어느 정도의 동성애를 다루었듯이 경극에서의 동성애는 당연시 되었죠. 경극 특징상 여자는 할 수 없어 여자역을 맡은 배우들은 모두 아름답고 여성적이라 늘 사대부들과 재력가들의 희롱감과 노리개가 되었는데 때론 서로간의 진정한 감정이 생기기도 했답니다.

건륭제 시대에 훌륭한 학자이자 높은 벼슬아치였던 필추범은 남자 배우인 이계관을 깊이 사랑하게 되자 모든 사람들이 이계관을 필추범의 부인으로 대접하고 불렀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부자는 어느 수려한 미소년을 사랑하였는데 그가 중병에 걸리자 정성을 다해 직접 간호하며 스스로도 마음이 아파 음식도 제대로 안먹고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 소년의 병이 낫지 않자 오늘 이후 어떤 남녀도 가까이 하지 않겠다고 맹세 하였답니다.

그러나 그 미소년이 믿지를 않자 마침내 칼을 뽑아 그 앞에서 자결을 하려다가 집안사람들의 만류로 제지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남첩이 죽자 아내에게 하듯이 불교 49제를 지내고 직접 지은 제문을 일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합니다.


유명한 시인 중 한명인 정판교 역시 유명한 동성애자였는데 오봉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하인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오봉이 죽자 3년동안 방황했는데 어느날 극장에 가다가 자신을 안내하는 하인이 오봉과 꼭 닮은 것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시를 지어 바쳤다고 합니다.


청대에 경극 배우 중에 왕랑이라는 여자 역을 맡은 배우가 있었는데 그 아름다움은 하늘을 찌르고 목소리도 고와 당대의 모든 시인고 학자, 문인들이 그에게 푹 빠졌다고 합니다.

청초의 유명한 화가이자 시인인 오매춘은 '왕랑곡'이라는 희곡을 써 공개적으로 그를 칭송하였다고 합니다. 왕랑에 대한 기록을 보면  '협소와 호화자는 기꺼이 왕랑을 위해 죽으려 했다.

차라리 벼슬의 기약을 잃을 지언정 왕랑을 늦게 볼까 걱정이다.

차라리 야간통금을 어길지언정 왕랑의 한가함을 얻기 어렵다.

좌중에 왕랑의 한 마디에 모두 탄식한다.

평상을 옮겨 기대 앉아 왕랑을 바라보니 모두 왕랑과는 서로 알지 못함을 슬퍼하노라.

지금은 단지 왕랑이 노래만 듣고자 하네'

이 처럼 관직과 돈도 필요 없고 단지 왕랑을 위해 죽고자 하였다니 도대체 왕랑이라는 사람은 얼마만큼 잘생겼다는 말일까요?


건륭제때에 시인 장선산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재주가 뛰어나고 성격이 호방하고 무척 잘생겼었다고 합니다.이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공경하고 우러르며 많은 선비들이 그를 칭송하는 시문을 짓고 스스로 부인이 되기를 원하여쓰며 심지어는 스스로를 낮추어 첩이되어 그를 모시려 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