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말 통기타음악의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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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말 통기타음악의 쇠퇴


2016. 5. 2.

통기타진영의 세대변화와 새로운 모색


◆ 포크 전사론에 대해


흔히 포크에 대해 우리가 알고있는 것은,
70년대 청년 문화가 있었고 그중 포크 가수들은 그 문화적 특성상 저항적이었으며 그 때문에 정권의 탄압을 받았고 그 정점에 김민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 통기타 가수들은 저항과는 거리가 멀었다


6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통기타 바람은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었다. 뉴욕의 포크클럽에서 스타가 배출되었듯 서울의 무교동과 명동의 음악감상실에서는 샹송, 칸소네, 팝송의 번안곡을 부르던 통기타 가수들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73년 이장희의 '그건너'를 계기로 주류를 장악해갔고 쎄시봉과 같은 음악감상실 출신의 통기타 가수들이 대거 인기가수가 되었다.
그들은 음악감상실에서 아르바이트 삼아 노래하던 아마추어 가수들이었고 실력을 인정받으며 미8군이나 주류로 나가 인기를 얻고자 하는 평범한 통기타 가수들이었다. 그들은 앨범 낸지 얼마안돼서 판금당하고 통기타를 던진 김민기 보다는 이장희의 성공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고 참신한 히트곡의 모범이었던 '그건너'를 더 본받고자 했다.

물론 청년문화가 바람은 일고 있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유행과 같은 것으로 기성세대가 눈살을 찌푸리긴 했어도 체제를 위협 할만큼의 내용이나 힘이 있었던것도 아니다. 또 통기타 가수들도 주로 젊음과 사랑를 노래 했으며 정권에 반하는 노래나 선동의 여지가 있는 노래는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통기타 가수들은 기득권에 편입되는 주류로 스스로 걸어들어갔고 성공을 거머쥐었다. 통기타 가수들은 저항이니 혁명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에게서 시대는 억압이었고 기성세대는 불만스러운 대상이었다. 그 시대적 불만은 표출되었지만 그것은 젊음의 특권과도 같은 것이었다. 치렁치렁한 장발이나 미니스커트, 껄렁해보이는 청바지, 버릇없는 말투, 어줍잖은 노래와 가사등 젊은이들이 하는 모든 것이 기성세대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갑갑한 가부장적 전통사회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여전히 생활고를 고민해야하는 기성세대에게 그들은 이해받을 수 없었다.


- 대마초 파동은 체재수호를 위한 조치가 아니었


70년대 중반에는 '얄개전'주1)이라는 명랑소설이 청소년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얄개전은 영화로 까지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고 70년대 후반에는 하이틴영화 러시로 이어졌다. 그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들인 고등학생 신분의 얄개들은 가부장적인 권위만을 내세우는 학교 선생님과 아버지를 짓궂은 장난으로 골탕먹이고 자신들은 여학생들과 연애행각을 벌였다.

하지만 실제 대다수 학생들에게 현실은 그와는 달랐다. 현실속에서는 신세대는 선생님과 부모님으로 상징되는 구세대에게 성적향상과 일류대입학을 강요당했으며 그들의 인간으로서 권리는 대학입학후로 미뤄졌다. 그러나 대학입학후에도 낭만은 오래갈 수 없었으며 군입대와 직장취업이라는 현실과 마주쳐야 했다. 70년대 대한민국이라는 봉건적이며 비민주적이고 가난한 후진국이라는 현실속에서 그들의 이상은 한낱 꿈이였던 것이다. 마찬가지의 논리가 정치에도 적용되었다. 권위적 권력자들에게서 근대화사업이 완수될 때까지 민주주의는 지연되어야 하는 것이였다.

이렇듯 70년대의 신세대들은 자신들의 미국식 자유주의적 가치관과 그와 대립되는 봉건적 가부장사회의 현실에서 방황하였다. 70년대에 신세대들은 통기타, 미니스커트, 장발, 생맥주, 청바지 등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가치관을 바탕으로 영화와 음악등의 문화에서 헤게모니를 잡았지만 현실의 권력자들은 기성세대였다. 봉건적 기성세대는 '왜불러', '그건너', '미인' 같은 유치하고 껄렁껄렁한 노래가 가요계를 장악하며 기성세대에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현실이 싫었다. 운동권출신 평론가들은 유신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대마초파동을 일으켰다고 하지만 권력자들은 70년대 신세대들에게서 체제수호의 위기를 느끼지 못했다.

다만 북한의 남침위협과 미군철수등의 국가적 위기에 대비하여 기강이 흐트러진 젊은이들의 정신상태를 고쳐야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대마초 파동은 전쟁속에서 자본주의를 지켜내고 미국원조에 의존하다 산업화로 겨우 먹고 살기 시작한 봉건적 구세대와 전후 산업화 속에서 성장한 미국식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서구지향적인 신세대와의 문화충돌이었던 것이다.

유신체제의 권력자들은 미국식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아 서구문물을 흉내내고 자유주의적 연애, 미니스커트나 장발같은 기성세대가 이해하기 힘든 자유주의적 문화를 양산하는 젊은이들의 정신상태를 고치기 위해 대마초파동이라는 폭력을 휘둘렀다. 이로인해 많은 젊은이들이 외국으로 향했고 가요규제 조치로 다수의 곡이 금지곡으로 묶이며 가요계는 위축된다.

통기타 계열의 선두주자인 한대수, 이장희 등이 도미했고 많은 곡들이 말도 안되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 이후 통기타출신 가수들이 지리멸렬한 것은 대마초 파동보다는 정작 자신들 자체에 원인이 있었다. 그들은 이미 방송 각계에 진출하며 기성연예인화 되어가고 있었으며 당시 유행이었던 고고의 바람에도 휩쓸리는 등 스스로의 정체성을 상실하여 서서히 몰락의 길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더이상 젊은 문화의 선두에 있지 못했다. 



- 김민기에 대한 오해

대개의 운동권출신 가요평론가들은 포크의 본질을 저항으로 규정짓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 중심에 김민기를 두었다. 주2) 이러한 포크전사론은 현재 가요계의 정설로 굳어졌다. 그러나 정작 김민기는 인터뷰에서 포크전사론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노래에 시대적 의미를 부여한 것일 뿐이지 본래 운동을 염두한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운동을 염두에 두고 만든 노래는 하나도 없다. 나는 주변을 바라보며 내 마음의 슬픔 혹은 젊은이의 보편적 슬픔을 표현했다. '친구'는 고3때 같이 동해안에 갔다가 익사한 친구를 그리워하면 지었다. '늙은 군인의 노래는 군대시절 만들었다. '아침이슬'도 아침동산의 풍경을 마음에 비춰 묘사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시대적 의미로 쓰이더라. 아마도 내 노래에 우리의 풍경을 담은 '스토리'가 있으니 수용자들이 시대상황에 따라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1998.9.28 중앙일보 ,'상록수'등 국민가요로 부활 가수.작곡가 김민기-월요인터뷰)

"74년 입대하기전 노래들은 대상을 멀찌감치 응시하는, 일종의 짝사랑 같은 것이였다. (중략) 정년퇴임하는 선임하사의 삶을 그 목소리대로 만든 '늙은 군인의 노래'나 공장생활시절 동료들 합동결혼식 축가로 만든 '상록수'가 그러하다." (강헌 1997.10.22 조선일보 테마신문 Culture21)

이처럼 우리가 당연히 운동가요로 받아들이고 있는 곡의 대부분은 작가의 본래 의도와는 동떨어지게 불리워지기도 한다.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 '옥의 슬픔' 역시 곡해되고 있는 노래인데, 이것은 미국 고교 문제아 시절에 자신의 슬픔과 희망을 담은 노래이다. 그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의 노래를 더욱 이해하게 될것이다.

또 김민기는 자신에게 저항가수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80년대 들어 운동권이 오히려 그에게'지식인의 나약함'을 노래했다며 호된 비판을 했지만 그는 이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저항가수 김민기'는 그들이 그에게 붙여준 미화된 이름이었고 잘못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저항가수라는 표현은 맞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를 미화한다. 과분하다. 내 노래는 보편적 정서, 슬픔으로 사람들과 공명하고픈 것이다. 그것은 나를 치유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때문인지 80년대 학생운동권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 '지식인적 나약함, 개인적 상념'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동의할 수 없었다. 내 노래에서 비장감을 느꼈다면 그건 70년대식 정서와의 조응이었을 것 같다. 80년대는 삭막했다."
(1998.9.28 중앙일보 ,'상록수'등 국민가요로 부활 가수.작곡가 김민기-월요인터뷰)

그가 말했듯이 그의 노래는 사람들과 어떻게 조응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불리워졌다. 어떤이는 '아침이슬'을 저항가요라고 말하는가 하면 한때는 건전가요로 불리우기도 했다. 양희은에 의하면 '아침이슬'이 73년도에 정부가 선정한 건전가요에 선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 그때 정부는 '아침이슬'을 시련을 극복하고 잘살아보자는 내용으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아침이슬의 가사는 이처럼 상황에 따라 누구든 해석하고 받아들일수 있는 내용이다.
이후 그의 노래들은 동료 가수들에 의해 다양한 정서와 감성으로 불리워졌고 사람들에게 다양한 공감을 이끌어내었다.

71년 김민기가 첫 앨범을 낼때 그는 촉망받는 작곡가였다. 그러나 그의 앨범은 발매 얼마 후 압수당하게된다. 이유는 앨범의 노래들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그가 신입생환영 행사에서 노래를 가르쳤다는 행동 때문이었다('우리 승리하리라', '해방가', '꽃피우는 아이'등 세 곡을 가르치고 불렀다). 김민기는 앨범 판금 다음해인 72년 아끼던 통기타마저 후배에게 줘버리고 73년 초 '금관의 예수'를 시작으로 문화운동으로 옮아간다. 74년 소리굿 '아구'와 이애주의 무용굿 '땅굿'에 참여했으며 74년에 입대한다.
70년대 초반 김민기의 짧았던 음악활동은 저항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현재까지 불리워진 노래들 역시 당시에는 촉망받는 작곡가의 아름다운 노래였을 뿐이었다.


◆ 77년 제1회 대학가요제와 통기타진영의 변화

77년까지 통기타 출신들은 계속해서 인기곡을 만들어 내었지만 음악적으로 젊은이들을 리드할 파괴력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때 대학가요제가 개최된다. 대학가요제는 두가지 부류의 스타를 탄생시켰다. 하나는 잘 알다시피 산울림과 샌드페블즈로 대표되는 아마추어 대학밴드이다. 이들은 70년대 말 가요계를 이끌어간다. 또 하나는 통기타 사운드가 살아있는 '젊은 연인들'의 서울대트리오와 '가시리'의 이명우이다. 이들은 대학밴드와 더불어 가요계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기성의 고고를 젊음의 것으로 바꾸어 놓은 '나 어떡해'가 그랬듯이 '젊은 연인들', '가시리' 역시 기성의 음악을 쫒지 않았다. 그것은 사운드의 참신함이었고 젊음의 열정이 넘치는 것이었다. 대학생들의 가요제는 다양해지고 두부류의 음악들이 쏟아져나왔다. 대학밴드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학통기타 팀들 역시 많은 히트곡을 내었다. 곧 '젊은 연인들', '내가', '밀려오는 그 파도소리에' 등은 기성 통기타 출신들을 제치고 통기타 음악을 대변했으며 그 시대의 또하나의 상징이었다.

대학가요제를 통해 자신들이 기성가수임을 재확인한 통기타 계열은 젊은 지지세력이 그들에게 옮겨가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다시한번 자존심이 상했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히트곡과 주류를 얻었지만 정체성을 잃고 음악적으로 젊음을 리드할 힘을 잃고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통기타 계열에게 대학 아마추어 통기타 가수들은 타산지석이 된 것이다.

대학가요제 출신 통기타가수들은 대학생의 순수함과 열정을 통해 기성화된 통기타 출신 가수들에게 그들이 가야할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었다. 혹 어쩌면 대학생 아마추어 통기타가수들에게 프로 통기타가수들이 끌려다녔는지도 모른다.

78년 이후 대학가요제 출신들의 통기타 음악경향과 발맞추는 신예 음악인들이 대거 등장한다. 논두렁밭두렁(영상, 할머니댁), 물레방아(잊지는 말아야지), 따로또같이(맴도는 얼굴), 이정선의 해바라기(구름들꽃돌연인), 정종숙(달구지), 박은옥(윙윙윙), 김만준(모모)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이장희의 '그건너' 이후 밴드스타일로 표현하던 음악을 지양하면서 70년대 초의 어쿠어스틱 통기타와 화음을 점차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로서 73년 이장희의 '그건너' 이후 '왜불러', '영일만친구'등으로 이어지는 통기타계열의 주류밴드 사운드는 77년도 대학가요제 이후 힘을 잃게 된다. 그후 대학가요제 계열의 음악 경향과 발맞추는 신진 통기타 가수들이 대거 등장했으며 이장희의 흐름을 이어받는 통기타 계열은 힘이 매우 축소되게된다.

그러나 이장희 계열의 밴드사운드가 완전히 죽은것은 아니다. 김세화는 영화<겨울여자 designtimesp=7357>의 삽입곡 '눈물로 쓴 편지', '겨울이야기' 등으로 이장희계열의 발라드음악의 흐름을 이어나갔고, 최병걸은 '진정 난몰랐었네'와 정소녀와 같이 부른 '그건너'를 히트시켰다. 그리고 '어디쯤 가고있을까'의 전영은 트로트와 탱고리듬을 사용하면서, 김태곤은 '망부석', '송학사'로 또 송창식은 '토함산(78년)', '가나다라(80년)'등의 노래로 전통적인 색체를 살리는 등 새로운 음악적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대학가요제의 통기타출신들의 영향은 기성과 신진의 통기타 양진영에 모두 변화와 모색을 하도록 했다.

70년대 말 통기타진영에는 80년대에 영향을 미칠만한 두가지 괄목할 현상이 있었다. 하나는 '시인의 마을' , '촛불', '행복한 사람' 등으로 인기를 모은 정태춘과 조동진의 등장이다. 두사람도 역시 대학가요제의 영향을 받았지만 한발 나아가 통기타계열에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었고 이 흐름은 이주호의 해바라기로 이어진다.

또 78년도 발매된 양희은의 앨범은 통기타 음악인들에게 다시한번 김민기라는 이름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된다. 전년도에 제대한 김민기의 '상록수'와 군대시절에 작곡한 '늙은 군인의 노래'를 담은 이 앨범은 발표된지 얼마지 않아 역시 판금이 된다. 노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작곡자의 이름 때문에.

이 앨범을 통해 통기타 음악인들은 신화가 되어버린 김민기라는 이름을 다시 듣게 되었고 그의 70년대 초의 '아름다운 사람', '고무줄놀이', '백구' 등의 과거의 노래가 다시 라디오전파를 타게되면서 그의 음악에 대해서도 다시 귀기울이게 되었다. 김민기라는 전설은 78년도 서울대후배들에 의해서 '메아리'라는 서클로 되살아나고 활동이 불가능한 요주의 인물이었던 김민기의 노래는 민중가요의 시초가 된다.


젊은 연인들-가요제실황(서울대 트리오, 77년 MBC대학가요제 동상)
내가-가요제실황(김학래 임철우, 79년 MBC대학가요제 대상)
시인의 마을(정태춘 작사,곡)
행복한 사람(조동진 작사,곡)



◆ 80년대 초 대학가요제의 위축과 통기타 계열의 상황

80년초 군부독재정권의 수립으로 사회 전체가 암울했고 낭만의 대학문화도 소멸하게된다. 그 여파로 대학가요제는 힘을 잃게되고 통기타진영을 이끌던 대학아마추어통기타음악인들의 영향력도 함께 사라진다. 80년대초는 70년대의 대학가요제 출신들이 대거 졸업하게되면서 기성가수나 MC로 자신의 모습을 바꾸며 가요계의 중심이 되는 시기이다. 당시 이들이 보여준 음악은 70년대 말의 참신함과 거리가 멀었으며 그들은 큰 음악적 특징을 보여주지 못하는 젊은 기성가수일뿐이었다.

이들은 '젊음의 행진', '영11'등을 통해 TV의 주요한 연예인이 되며 새롭게 등장한 대학출신 개그맨들과 전영록, 임병수, 이용 등의 젊은 가수와 함께 방송계를 장악한다. 이것은 70년대 중후반의 방송계를 장악했던 통기타출신 가수들이 방송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의 방송가에서 활동하고 있던 통기타출신들은 거의 MC나 DJ로 활동하고 있었다.

80년에 산울림 형제들이 군대를 떠나고 김창완은 혼자남았다. 산울림의 '창문넘어 어렴풋이 옛생각이 나겠지요' 와 김창완의 통기타 솔로앨범 <기타가 있는 수필 designtimesp=7380>의 '어머니와 고등어'는 크게 히트했다. '창문너머...'는 산울림 6집에 포함된 곡이긴 했지만 노고지리를 위해 김창완이 만든 통기타 곡으로 두 곡은 록그룹 산울림과는 다른 김창완의 또하나의 음악적 한측면이었다. 그는 80년대 중반 지속적으로 통기타계열의 음악을 발표했으며 꾸러기들이나 동물원등 후배들을 양성하면서 통기타 진영에 새로운 경향을 만드는 등 큰 업적을 쌓아갔다.
본류(?)였던 통기타계열에서는 노장들이 힘을 발휘했는데 '솔개'의 이태원, '목로주점'의 이연실 그리고 '푸르른날' '우리는'의 송창식등이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노래들을 불러 인기를 모았다. 신예로서는 '사랑사랑 누가 말했나'의 남궁옥분, '독도는 우리땅'의 정광태등이 인기를 끌었다.


◆ 80년대 중반, 10년만에 활기를 찾은 통기타진영

83년부터 서서히 가요계가 활성화 되면서 통기타진영도 새로운 움직임을 시작한다.
83년에 이주호의 해바라기가 '행복을 주는 사람'으로 서서히 인기를 모으기 시작하고 있었을때 대성음반으로 적을 옮긴 김창완은 '꾸러기들'을 기획한다.주3) 같은 대성음반 소속의 임지훈, 최성수, 권진경 등 통기타 가수들을 함께 묶어 앨범 <꾸러기들의 굴뚝여행 >을 내고 100일간의 장기 콘서트(1985년 10월 1일부터 86년 1월 10일까지 100일간, 장소는 이화여대 앞 산울림 소극장)를 가지며 새로운 통기타 붐을 조성하기 시작한다. 이시기에 정태춘도 소극장 라이브공연을 이어가며 자신의 음악세계를 펼쳐보인다. 이후 다양한 통기타 신예들은 라이브활동을 통해 인지도를 형성해가고 있었다.

85년에는 해바라기의 두번째 앨범이 크게 히트를 하면서 통기타계열이 함께 부각되기 시작했다. 정태춘 역시 84년 '떠나가는 배'에 이어 85년 '북한강에서'를 연달아 히트시켰고 송창식은 86년에 '참새의 하루'와 '담배가게 아가씨'를 통해 70년대 중반 전성기통기타계열의 음악을 훌륭하게 재현하였다. 그밖에 김세화, 백영규 등이 새로운 히트곡을 내었으며 신예로는 한마음, 조덕배, 김원중, 이진관, 김승덕, 배따라기 등이 인기를 끌었다. 해바라기의 인기는 89년의 '사랑으로'까지 지속되었으며 통기타 계열에 붐을 선도한다. 또한 70년대 중반 통기타 전성기의 주역중의 한명인 김정호는 85년 고인이 되었으며, 발표 당시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님'은 뒤늦게 인기를 모았다.

당시 통기타진영의 소극장 공연을 통한 활성화보다 중요했던 것은 MBC FM의 간판 프로그램이었던 '밤의 디스크쇼' 였다. 통기타출신들의 대부로 불리던 이종환이 진행하던 이 프로그램은 특히 '밤의 디스크쇼' 공개방송 분의 인기가 대단했다. 공개방송에는 분위기를 띄우며 즐거운 방송이 되게하는 역할을 하던 이야기 손님과 초대가수로 이루어졌다. 공개방송이 인기가 많았고 자주 출연하는것 만으로 인지도를 높일 수 있었던 만큼 여기에 출연을 희망하는 연예인도 많았다.

이 프로그램에서 재치있는 입담으로 단골손님이었던 이문세는 '파랑새'를 이종환의 핀잔 속에서도 굴하지않고 불러댔고, '파랑새'만한 히트곡(?)도 없던 이택림은 팝송을 부르며 역시 재담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 프로그램에는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가수들은 물론 양희은, 송창식, 조영남, 임창제를 비롯한 친분이 두터운 통기타계열 음악인들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들 외에 대학가요제 출신들과 통기타계열의 또 다른 흐름인 동아기획 등 신예가수들이 초대되기도 했다. 이프로그램은 젊은 신인가수들의 등용문 역할을 했고 통기타계열 가수들은 하나의 진영으로 인식되며 폭넓은 인지도를 얻어갔다.

80년대에 젊은 가수지망생이 기성가수가 되는 가장 주요한 루트는 대학가요제에 출전하거나 통기타가수진영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통기타 가수들은 그들의 진영에 합류하여 인정받게 되면 음반을 발표할수있는 기회를 갖게되고 그것이 가수가 되는 길이었다. 즉 80년대의 가수에게 가장 중요한것은 앨범발표였으며 그 과정에서의 기획적인면은 체계적이지 않았다.

행복을 주는 사람(해바라기)
안녕(산울림)
갯바위(한마음)
담배가게 아가씨(송창식)


◆ 통기타 진영의 쇠퇴

83년 '나는 행복한 사람', 84년 '파랑새'를 앨범으로 발표했지만 별 인기를 끌지못한 통기타 가수출신 이문세는 MBC FM의 '밤의 디스크쇼' 공개방송과 '별이 빛나는 밤에' 별밤지기(DJ)의 인기를 바탕으로 이영훈, 김명곤과 팀을 이뤄 3집을 발표한다. 이 앨범에서 '난 아직 모르잖아요'를 히트시키고 가요톱10의 대망의 1위를 거머쥔다. 87년에는 역사적인 4집 '사랑이 지나가면'을 발표하고 당시 30만장의 엄청난 판매고를 올린다.

이 앨범이 팝발라드의 시작이었다. 88년부터는 변진섭, 이승철, 유재하 등이 등장하여 팝발라드의 시대를 연다. 또한 동아기획도 전성기를 누리며 김현식,봄여름가을겨울,신촌블루스 등이 크게 인기를 끈다. 이런 새로운 진영들은 멜로디 위주의 가요이면서 이전의 가요에 비해 훨신 세련된 사운드와 멜로디로 기존 가요발라드와 차별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흐름앞에 통기타진영은 80년대 후반부터 다시 주도권을 뺏기고 있었다.

통기타 진영은 변화된 가요계의 흐름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김창완이 배출한 또 하나의 신인인 동물원은 새로운 통기타그룹사운드를 보여주고 있었고 신형원은 김명곤의 편곡으로 '개똥벌레'를 히트시켰고 박영민은 영화 삽입곡 '창밖의 잠수교가 보인다'로 새로운 이장희식 사운드를 선보였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은 오래가지 못했고 90년대 들어서 더욱 강력해진 팝발라드 계열 앞에 별다른 히트곡을 보여주지 못하게 된다.

다른 한축에서 80년대 말 정태춘이 민중가요 진영으로 이동해 새로운 음악을 모색하고 있었고 민중가요 진영의 김광석, 안치환등은 민중가요와 포크의 관계를 새로이 정립해가며 포크가수로 방향을 선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 이들은 함께 공연하며 새로운 민중가요를 탄생시키려 하였으나 주목할만한 성과가 없었다.

92년에 서태지가 나오고 가요는 멜로디 위주에서 리듬위주로 변화하면서 멜로디의 비중은 약화되고 스타일, 랩 그리고 댄스가 크게 강조된다. 통기타 계열의 음악은 통기타적인 사운드와 멜로디를 중시하기 때문에 리듬의 비중은 매우 낮다. 반면 서태지이후 댄스음악은 멜로디의 중요성이 약화되고 리듬이 중심이 된다. 사운드 역시 샘플러 위주의 디지털 음원으로 큰 변화를 갖는다. 거기에 첨가되는 댄스와 스타일은 음악의 시각적인 요소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런 변화된 시대상 앞에서 통기타계열 음악인은 설자리를 잃게되었다. 이후 이들은 서태지를 음악을 망친 인물로 주목하기 시작한다.

80년대 중반에 가수가 되는 길은 대학가요제 등에서 입상하거나 통기타와 노래실력으로 통기타진영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내세울수 있는 음악적인 면은 가창력밖에 없었다. 그들이 서태지를 볼때 자신들의 가창력이 서태지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오직 내세울것은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천히 생각해보면 위대한 한국의 아티스트인 김민기, 한대수, 이장희, 조동진, 신중현, 김창완, 최이철, 김종진 등은 모두 가창력이 부족했다.

90년대에 가요시장이 팽창하고 가요제나 통기타입문을 대신해서 기획사가 가수를 배출하기 시작할때 가요계가 요구하는 것은 음악성 있는 아티스트나 스타성이 있는 가수, 댄서, 래퍼였다. 그저 노래나 부르는 것으로는 시장에서 통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창력이 있다해도 기획사에서 요구하는 스타일과 어울려여 했다. 기획사를 통하지 않으려면 자신이 아티스트이거나 자신의 스타일은 스스로 만들수 있어야 했다. 즉, 스타성이 없으면 자신이 음악과 스타일을 스스로 만들수있는 아티스트로의 자질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티스트로서의 자질을 가지지 못하고 가창력만을 소유한 단순한 형태의 가수들은 비쥬얼을 요구하는 90년대에 적응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들은 시대를 이렇게 변화시킨 서태지와 TV등의 미디어를 원망하게 되었다.


개똥벌레(신형원)
변해가네(동물원)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박영민)


주1)

"얄개의 본명은 나두수. 두번이나 낙제한 천하제일의 말썽꾼 나두수를 모른다면 K중학교 학생이 아니다. 그런데 얄개의 짓궂은 장난에 번번히 골탕먹는 이들은 동료학생이 아니라 어른들이다. 얄개는 학교 선생님이라든지 아버지 같은 가부장적 권위를 자기 별명이 말해주듯 발칙할 정도로 흔들어댄다. <중략> 얄개의 도발이 가능케 한 것은 해방후 들어온 미국식 자유주의 사상이다." (중앙일보 2001.8.4 원종찬의 아동문학 길라잡이)


주2)

"1971년 김민기가 만들고 양희은이 노래한 저항적 포크가요 '아침이슬'은 우리 현대사의 격변기과 동행하며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고했다.....(중략) 김민기는 일천한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전복의 충격을 안긴 혁명가다. 그를 통해 노래는 위안과 오락에 소용되는 일회용 소모품의 지위에서 벗어났다. 정치한 통기타의 미의식과 우리말 울림으로 대중음악이 역사와 동행하는 통찰력의 산물임을 명쾌하게 입증했다."(강헌 1997.10.22 조선일보 테마신문 culture21)


주3)

'83년도 봄 무렵, 그런 젊은이들 중의 몇이 당시 젊은 음악의 유일한 기수로 떠오르던 산울림의 김창완을 중심으로 뭉쳤다. "꾸러기들"이라는 장난끼 어린 이름으로 뭉친 이들은 바로 최성수, 임지훈, 신정숙, 윤설하, 현희 등... 오늘날은 다 알만한 이름들이지만 그때만 해도 음악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무서운 아이들"로 주목 받는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 그들은 산울림의 김창완을 맏형으로 하여 따랐고 또 김창완은 어렵고 힘든 중에도 그들을 잘 보살펴 주고 있었다.

그들은 김창완이 데뷔이래 10년 동안 몸담아 활동하던 대성음반에서 "꾸러기들의 굴뚝여행"이라는 앨범을 내는 한편 라이브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음반제작 -> 라디오 방송 -> TV 출연 -> 신문 연예면 기사>라는 공식 코스를 무시한 그들의 활동은 충격이었고, 그런 활동을 전제로 한 그들의 노래"아주 옛날에는 사람이 안 살았다는데..."는 그 소재나 그룹 포크라는 음악형식에서나 파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 젊은 포크송 매니아들에게 많은 호응을 받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