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 그 전설 속의 8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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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그 전설 속의 8대왕


2015. 12. 28.

잉카에 관한 글을 보면 대체로 자세하게 나와있는 편이지만, 전설적인 초기 8대 왕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더군요. 그래서 제가 짧게나마 써봅니다.




제 1대 망코 카파크(Manco Capac)

잉카의 전설에 따르면, 최초의 인간은 동굴에서 나왔다고 한다. 파카리 탐푸라는 곳에는 세 개의 동굴이 있다. 그 동굴 중 첫번째 동굴에서 망코 카파크가 튀어나왔다고 한다. 거기서 세 명의 남동생과 네 명의 누이도 튀어나왔다. 다른 동굴에서도 사람들이 나왔지만, 지도자는 가장 먼저 세상에 나온 망코 카파크가 되었다.

그들은 망코 카파크를 중심으로 하여 안데스 산맥을 통과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농사지을 기름진 땅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중 식량이 부족해지자, 망코 카파크는 한 남동생을 동굴에 가두고 두 남동생을 돌로 만들어버렸다(한마디로 입을 줄이자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그는 누이인 마마 오클로와 결혼하여 자손을 낳았다.

마침내 잉카족은 쿠스코 계곡에 도착했다. 그들은 원주민을 쫓아내고 땅을 차지했다. 그들이 쿠스코 계곡에 도착한 후, 망코 카파크가 죽고 아들 신치 로카가 뒤를 이었다.

 

제 2대 신치 로카(Sinchi Loca)

12세기 무렵에 잉카 부족을 통치한 신치 로카는 망코 카파크의 아들이다. 일설에 따르면 망코가 죽을 당시 뒤이을 아들들이 많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신치가 왕이 되기를 원했다한다. 하지만 맏아들에게 많은 것을 물려주던 당시의 사회분위기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 마마 오클로는 한가지 꾀를 냈다. 그녀는 아들 신치에게 황금옷을 입힌 후 동굴에 숨어있게 했다. 그리고 화창한 날을 골라 태양신이 새로운 지도자를 보내는데 그가 동굴 속에서 나온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마침내 사람들이 동굴 앞으로 모이자 신치가 그 속에서 황금옷을 입고 걸어나왔다. 이것은 한가지 전설에 지나지 않지만, 어쨌건 효과가 있었는지어쨌는지 신치가 새로운 왕이 되었다.

그는 망코 카파크처럼 살육을 일삼지 않고 비교적 평화스럽게 나라를 다스렸다. 그가 왕으로서 남긴 두 가지 업적이라면 아마 새로운 관습을 퍼뜨린 것일거다. 그는 왕족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앞머리를 찰랑찰랑하게 잘랐는데 이것이 후일 잉카 왕족의 헤어스타일이 되었으며, 죽은 후 미라가 되었는데 그 풍습이 그대로 남아 집안어른을 미라로 만들어 대대로 모시게 되었다(초대왕 망코 카파크는 죽어서 돌이 되었다. 미라가 아니고!).

 

제 3대 요케 유판키(Lloque Yupanqui)

요케 유판키는 할아버지 망코보다는 아버지 신치를 닮아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한가지 결정적인 흠이 있다면, 그의 외모였다. 그는 너무도 못생겨서, 심지어는 사람들이 요케만 보면 달아났다고 한다. 그의 첫번째 부인은 그와 얼굴조차 마주치기 싫어했고, 아버지의 명령으로 강제로 요케와 결혼한 두번째 부인도 그를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요케의 다른 특징이 있다면 그가 왼손잡이였다는거지만, 그것은 별로 언급할 가치가 없는 듯 하다.)

 

제 4대 마이타 카파크(Maita Capac)

14세기 무렵에 잉카를 다스렸던 마이타 카파크는 요케와 그의 둘째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는 할아버지 신치와 아버지 요케와는 달리, 증조부 망코에 못지않을 정도로 난폭한 성격을 지닌 왕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보통 사람들보다 6개월이나 일찍 세상에 나왔다고 하며(임신 4개월차에 출산했다는 말이다!), 날 때부터 이가 모두 나 있었고 돌 무렵이 되자 여덟살 아이만큼 덩치가 커졌다고 한다.

마이타 카파크는 어릴때부터 싸움을 좋아해서 힘깨나 쓰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싸움을 걸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진 적이 없고 오히려 상대방을 마구 두들겨 패주었다고 한다! 한때는 이웃부족 농부를 죽여 싸움이 일어날 뻔 했고, 아버지 요케는 그 일을 처리하느라 고생했다고 한다.

마이타 카파크가 원래 성격이 난폭한 탓도 있었지만, 그가 난폭한 왕이 된 데에는 또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가 지도자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기간동안 쿠스코 계곡 잉카 부족의 마을에는 흉년이 계속되었고, 그래서 그는 식량을 구하러 이웃 부족들을 정벌해 식량을 갖다바치게 해야만 했다.

 

제 5대 카파크 유판키(Capac Yupanqui)

카파크 유판키는 마이타 카파크의 맏아들이 아니라 둘째아들이었다. 그러나 마이타 카파크의 불쌍한 맏아들은 (매우 불행하게도)할아버지 요케를 닮아 매우 못생겨서 지도자자리에 앉게 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거부했다고 한다.

카파크 유판키는 최초로 영토를 넓힌 왕이었다(그 이전까지는 침략일 뿐 실질적인 정복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영토를 20km정도 넓혔을 뿐이다. 후일 대제국 잉카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쉽게도 카파크 유판키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왕"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제 6대 잉카 로카(Inca Loca)

잉카 로카는 아버지 카파크 유판키의 뒤를 이어 영토를 더욱 넓혔다. 그러나 잉카 로카에 관련된 일화 중에, 이때까지만해도 잉카 부족이 일개 "동네대장"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잉카 로카의 부인은 우아얄카부족의 마마 미카이라는 여자였다. 그런데 마마 미카이가 처녀일 때 구혼자 중에 잉카 로카 말고도 아야르마카 부족의 족장도 있었다. 하지만 마마 미카이가 잉카 로카를 선택하자 그의 기분은 망가질대로 망가졌다. 그래서 그는 잉카 로카와 마마 미카이 사이에 태어난 맏아들인 야우아르 우아카크를 납치했다. 화가 난 잉카 로카는 아들을 돌려주길 요구했지만 아야르마카 부족장은 거부했다. 그 다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잉카 로카는 손도 쓸 수 없었다. 아야르마카 부족의 힘은 잉카 부족의 힘을 능가할 정도였던 것이다. 결국, 야우아르 우아카크는 몇 년이 지난 뒤에야 풀려났다. 이 일화로 보아하건데, 잉카 부족의 힘은 이당시까지만 해도 별볼일 없었을 것이다.

 

제 7대 야우아르 우아카크(Yahuar Huacac)

야우아르 우아카크는 잉카 로카의 맏아들이자 아야르마카 부족의 볼모였지만, 아야르마카 부족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그의 첫번째 아내가 아야르마카 부족의 여자였던 것이다. 그는 그당시 관습을 깨뜨리고 두번째 아내를 맞이하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일부일처제가 원칙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야우아르 우아카크의 실수이기도 했다.

그는 첫째부인의 둘째아들을 사랑해서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그러자 두번째 아내는 첫째부인의 둘째아들을 암살해버렸고, 얼마 후 왕도 죽어버렸다.

 

제 8대 비라코차(Viracocha)

15세기 초 잉카를 다스렸던 비라코차는 나쁜말로 해서 약간의 과대망상증 환자였다. 그는 황제라는 칭호로 만족하지 않고 창조주로 불리기를 원했다(참고로 잉카신화 속에 창조주 이름도 비라코차이다.).

비라코차는 그당시 조그만한 영토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우선 쿠스코 계곡의 라이벌 부족인 아야르마카를 점령하기로 결심했다. 비라코차가 그래도 어느정도 머리는 좋았는지, 아야르마카를 정면공격하지는 않았다. 다만 아야르마카 건너편에 있는 우루밤바를 공격해 점령해버렸다. 그리고 양쪽에서 아야르마카 부족의 마을을 협공했다. 그러자 양쪽에서 적을 맞은 아야르마카 부족은 참패했고 잉카 부족에게 점령당했다.

한편, 잉카 서쪽에 살던 창카 족은 점점 세력을 키워 1438년 잉카 족을 공격해왔다. 창카 족이 잉카 족의 본거지 쿠스코를 공격해오자 비라코차는 쿠스코의 수비를 맏아들 파차쿠티 잉카 유판키(Pachacuti Inca Yupanqui)에게 맡기고 편애하던 아들 우르콘(Urcon)과 함께 칼카 근처의 요새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 이후 잉카의 역사는 파차쿠티 잉카 유판키, 토파 잉카 유판키, 우아이나,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의 손으로 넘어가고 아타우알파에 이르러 잉카는 멸망하게 된다. 잉카가 정복당한 뒤에도 망코 카파크 2세, 투파크 아마루 1,2세까지 부흥운동을 전개하다가 투파크 아마루 2세에 이르러 사파 잉카의 대가 끊기고 잉카는 완전히 멸망한다.

 

잉카의 8대 왕 전설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지만,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잉카인들은 이 전설을 믿었다. 그러나 현재는 8대 왕 비라코차를 제외하고는 전설상의 인물로 생각되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