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화국 몰락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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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화국 몰락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공권력이 저지른 살인 사건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학생이던 박종철이 경찰에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심문을 받다가 고문 때문에 사망한 사건. 짧게는 박종철 군 고문 치사 사건이라고 한다.


1986년 10.28 건대항쟁 진압 이후 의기양양한 전두환 정권은 '반제동맹당 사건'과 '마르크스-레닌주의당(이하 ML당) 사건' 등의 공안조작 사건들을 만들어내며 소위 '얼음정국'을 조성하던 시기였다. 그런 혹한 속에서 떨고 있을 와중인 1987년 1월 14일, 경찰 대공수사관들은 피해자 박종철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했다. 수사관들은 1985년 10월에 터진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된 박종운의 소재를 말하라고 추궁했고, 박종철은 모른다고 했다.

이에 과민반응한 수사관들은 박종철의 옷을 모두 벗기고 조사실 안에 있는 욕조로 끌고 가 물고문을 반복했다. 그래도 모른다고 하자 결박당한 두 다리를 들어올려 또 다시 물고문을 가했고, 고문 도중 욕조의 턱에 목 부분이 눌리면서 결국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으로 의식을 잃었다. 당황한 수사관들은 사건 은폐를 위해 대공분실 부근의 용산 중앙대학교병원으로 이송해 응급처치를 시도했지만, 박종철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이들은 박 군이 병원에서 숨진 것으로 조작하려 했으나, 중앙일보 서울지검 출입기자였던 신성호 기자가 소식을 듣고 곧바로 데스크에 보고하여 그날 2단짜리 꼭지에 기사가 들어갔다. 이날 기사는 "학생이 남영동에서 죽었다"는 단신이었고, 1면도 아니고 사회면 한구석에 있었는데, 석간 강판 이후 신문이 배포되자 모든 신문사에서 중앙일보에 전화를 걸어 진위를 물었다. 이후에는 문공부에서 나와 중앙일보에 난입하여 깽판을 치고 갔다. 

어찌어찌 소문이 퍼져나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기념 미사 때 내막을 폭로하는 바람에 은폐는 무위로 돌아갔고, 파문이 확산될 것을 우려한 경찰에서는 서둘러 조한경 등 2명이 박종철을 취조하던 중 사망했다고 이 사건에 관하여 축소 은폐 보도를 하였다. 그러고는 증거를 감추기 위해 서둘러 시신을 화장하려고 서울지방검찰청에 시신 화장 신청을 넣었으나 거절당했다. 


당시 물고문에 가담한 수사관들은 조한경, 강진규, 반금곤, 이정호, 황정웅 5명이었다.


박종철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인 1987년 1월 15일에 방송된 MBC 단신보도. 녹화된 테이프의 상태가 좋지 않아 화면이 좋지 않다. 보도국에서 기사를 전하는 사람은 신경민 당시 MBC 기자다.

신성호 기자의 취재를 통해 1월 15일 중앙일보 사회면에 최초로 보도되었다. 이후 기자들이 사실 확인을 위해 달려들었다. 이에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박종철의 사망원인에 대해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라고 거짓 시인을 하는 바람에 이것이 정식 사인으로 언론에 발표된다. 

영화 1987에서 하정우가 연기한 역할로, 그 당시의 짤막한 스토리를 들을 수 있다.

당시 발표문에 따르면, 박종철은 1월 14일 아침 8시 10분경에 관악구 신림동 하숙방에서 연행되어 9시 16분경 아침식사로 나온 밥과 콩나물국을 조금 먹다가 입맛이 없다면서 냉수를 몇 잔 마신 뒤, 10시 15분경부터 박종운 군 소재에 대하여 심문 도중에 수사관이 책상을 치자 박 군이 "억"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정오 즈음에 사망했다고 한 것이다. 이어 강 치안본부장은 "내가 아는 한 가혹행위는 없었다"며 "먼저 가족들에게 경찰이 결백하다는 걸 납득시키고 부검 결과가 나오면 나중에 떳떳이 전모를 밝히겠다"고 하여 "박 군을 처음 본 중앙대 부속병원 의사(오연상 교수를 지칭)가 박 군이 쇼크사로 숨진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물론 훗날 밝혀진 사인은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 더 정확히는, 물에 의하여 익사한 것이 아닌 물고문 와중에 목이 욕조 턱에 눌리면서 질식사한 것. 진짜로 澤(연못 탁) 치니 抑(누를 억) 하고 죽은 것이다. 당연히 이런 말 같지 않은 소리를 믿은 사람은 없었다. 이걸 수습한다고 신임 내무부장관 정호용이 한 말이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였다. 이걸 해명이라고 들은 여론이 들끓어 올랐다. 이 정호용의 발언이 웃긴 게, 5.18 민주화운동 당시 진압부대의 최고위직인 특전사령관이 바로 이 정호용인데 그런 사람이 "사람을 어찌 치냐"고 했으니 굉장한 블랙코미디일 수밖에.


발표 전날인 15일부터 밤 9시 5분부터 사건을 담당한 서울지검 공안부 부장검사 최환, 형사부 검사 안상수 등의 지휘 하에 부검의로 황적준의 집도 하에 노력으로 박종철 군이 고문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이후 다음 날 강 치안본부장은 위와 동일한 기자회견에서 부검 결과 사체 외표검사에서 박종철의 왼쪽 무릎에 0.6cm의 찰과상이 있었고, 오른손 엄지, 검지 사이에 손등쪽에 작은 멍이 있었고, 내시경 검사 결과 오른쪽 폐에 탁구공만한 출혈반이 발견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강 치안본부장은 황적준 박사가 "출혈반이 생기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전기 충격요법 및 인공호흡을 해도 생길 수 있으며 특별한 치명상은 발견이 안 되었지만 목과 가슴 부위에 피멍이 있었다"고 말했다면서 부검 결과가 나오는 즉시 수사관들을 조사해 잘못이 드러날 시 엄중 처리하겠다고 밝혔으나, 고문 사실은 부인하였다. 

그러나 위와 같은 발표는 중앙대 부속 용산병원 내과의사 오연상에 의해 거짓으로 밝혀졌다. 그의 발표에 따르면, 박종철은 병원에 옮기던 때에 사망한 게 아니라 사건 당일인 14일 오전 11시 45분경에 이송 당시 사망한 상태였으며, 자신이 도착했을 때 박종철의 복부는 부푼 상태였고 청진기 진단 결과 복부 등 몸 속에 '꼬르륵'하는 물 소리가 났는데, 쇼크사는 심장마비 뒤에 호흡곤란이 생기므로 쇼크사는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 또 그는 자신이 도착할 적 조사실 바닥에 물기가 있었고, 자신은 진료가 아닌 사체 검안서를 썼다고 밝혔다.

아무튼 위와 같은 사건으로 전국민적으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게 되었다.

민주화 이후 1989년에 박종철 군의 유가족들은 국가와 고문치사 사건 관련 경찰관들을 상대로 1억 2천만 원의 손해배상소송을 냈다. 그 결과 1995년 11월에 대법원은 국가와 고문경찰관 다섯은 연대해서 1억 4천 7백만 원을, 그리고 경찰수뇌 4명은 직무유기 및 범인 도피의 책임을 지고 2,4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박 군의 유가족들은 이자를 포함해 총 2억 4천만 원의 손해배상금을 수령했다. 

안상수 前 의원은 당시 이 사건의 담당검사였고, 이후 문민정부 하에서 신한국당(이후 한나라당)으로 자신이 주동적으로 사건 은폐를 막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조국 서울대 교수는 안상수가 아닌 그의 상관인 최환 부장검사가 박종철 시신의 부검을 지시하여 이 사건의 은폐를 막았다고 반박했다.


가끔 이 일을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친 이근안이 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이 일만은 정말 이근안과 무관하다. 당시 이근안은 경기경찰청 대공분실장으로 경기지방경찰청 소속이었고 이 사건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일어났다.

2018년 3월 20일, 문무일 검찰총장이 요양원에 있던 故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씨(89)를 만나 31년만에 고문치사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현직 검찰총장이 과거사에 대해 직접 사과한것은 처음있는 일.

가수 김광석의 유작 노래로 발표되어 유명해진 정호승 시인의 부치지 않은 편지는 박종철 열사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쓰여졌다.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 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훌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