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립 끝판왕' 시대의 명작 고우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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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 끝판왕' 시대의 명작 고우영 삼국지

고우영 삼국지는 1978년부터 1980년까지 고우영이 일간스포츠 신문에서 연재한 삼국지연의의 만화판이다. 이전부터 한국에서 삼국지연의는 수차례 만화로 그려졌지만 고우영 삼국지는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독특한 재해석과 명쾌한 해설로 대단한 인기를 얻었지만, 당시의 엄격한 심의 때문에 원래 10권 짜리 책이 5권으로 줄여졌을 정도로 삭제/수정된 부분이 많았다. 가령 여포가 초선을 시간한다는 내용이나 장비가 걸쭉하게 욕설을 내뱉거나 사람을 때리는 장면도 많이 편집되었다. 가끔씩은 별 이유도 없이 화이트질을 가하기도 한다(…). 이 심의과정에서 삭제나 수정을 복사본이 아닌 원본에다 하는 바람에, 많은 원고가 훼손되는 비극을 겪었다. 고우영은 무삭제판의 머리말을 통해 '내 자식이 군용트럭 같은 것에 치여 팔다리가 다 잘리는 고통을 겪고도 20여 년 동안 그 자식에게 앵벌이를 시킨 꼴'이라고 한탄했다.

1980년에 낸 우석출판사판 만화책은 삭제와 수정칠 투성이였고 1990년대 초반에 무료 정보지 교차로에 연재되기도 했으나 이 삭제판이 연재되었었다.

그렇게 잊혀지나 했더니, 2001년 딴지일보에서 이 작품을 재발굴했다. 원본에 비해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다는 것을 밝혀내고 직접 고우영과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원본이 훼손되었다는 사실도 이때 밝혀진다. 이후 딴지일보와의 합작으로 훼손된 원고를 모두 복원하였다. 없어진 부분은 모두 새로 그리고, 작화가 미흡했던 부분도 모두 새로 그렸다고 한다. 이 복원판은 딴지일보에서 연재할 동안 고전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상 젊은 네티즌들의 기호랑 맞아 인기를 끌었다. 완결 후 CD-ROM에 담은 전자책 형식으로 재출간되었는데, 초판으로 준비한 5천장이 6일만에 매진되는 기염을 토했다.

책 출간은 조금 어려움이 있었는데, 복원작업을 진행할 당시에는 출판권이 아직 우석출판사에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우석출판사와 딴지일보의 관계도 좋지 않아서 당시 저작권 문제가 없었던 CD-ROM으로 먼저 출간된 것이다. 이 때는 아직 전자출판이라는 개념이 저작권법 상에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전자책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결국 딴지일보의 연재가 끝나고 우석출판사와의 관계도 정리된 이후인 2002년 11월에 애니북스에서 책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고우영 사후에는 2009년에 일간스포츠에서 아들인 고성언이 컬러로 채색하고 무삭제인 삼국지를 재연재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중도에 끝났다.



고우영 작가 특유의 위트와 시사적인 멘트, 기발한 해석이 곳곳에서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굳이 만화로 한정짓지 않더라도《삼국지연의》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을 한 훌륭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대신 유의할 점은 훌륭한 작품임에도 입문서로는 추천되지 않는다는 것. 입문이 아닌 심화판으로써의 의미가 크기에 원작대로 표현한 정극적인 삼국지를 먼저 읽어본 다음에 읽어 봐야 다른 점을 찾아가며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즉, 삼국지의 전체 내용을 대충이라도 알고 있거나 제대로 마스터 한 사람들을 위한 만화 또는 삼국지 본 내용을 전부 알고 읽어야 더 재미있는 삼국지라고 볼 수 있다. 후술하겠지만 고우영 특유의 해석이 강하기 때문에 입문서로는 다른 것을 보고 어느정도 삼국지의 내용을 어느 정도라도 숙지 했을 때 고우영 삼국지를 보는게 가장 좋다.


고우영 삼국지연의의 재해석은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어서 현재까지 삼국지 담론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2010년대 국내 삼국지 만화중에선 가장 유명한 최훈의 삼국전투기도 고우영 삼국지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은 작품이다. 특히 유비 캐릭터는 작품의 볼륨에 맞춰 약간 재가공을 거친거 빼면 거의 그대로 가져다 썼다.

원작에서는 조조만 간웅스럽게 묘사되는데 반해 이 작품은 유비, 조조, 제갈량 3명의 주연 인물을 모두 간웅이자 작품을 이끄는 진 주인공들로 재해석한 것이 특징이다. 유비는 시종일관 바보스러우면서도 음흉한 간웅, 조조는 자신만만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당당한 간웅, 제갈량은 아름답고 명석한 모습 뒤에 권력욕을 감춘 간웅으로 묘사되었다. 현대에 들어서 재조명 받는 조조를 그 당시에도 통큰 사나이에 개혁가로 묘사했으며, 제갈량은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고픈 욕망으로 가득찬 악마같은 책략가, 유비는 겉으로는 멍청이 행세를 하지만 실제로는 제갈량의 야심까지 꿰뚫어보는 한 수 위의 고단수 정치가로 재해석되었다. 이런 재해석은 시대를 앞섰다는 평도 있는데, 이러한 고우영 삼국지 특유의 각색과 재해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싫어한다.

특히 제갈량 관우 제거설이라는 떡밥은 아래 항목에 나오듯이 지금도 두고두고 낚이는 사람이 있고, 이 제거설을 까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오래오래 회자되는 고우영만의 독특한 해석이다. 당연하지만 어디까지나 고우영의 각색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자. 원체 고우영 삼국지의 제갈량은 폐결핵으로 명이 짧지 않았다면 유비나 관우 없이도 혼자서 얼마든지 위를 멸망시킬 수 있는 군신이자 천재 지휘관으로 묘사되므로 이런 전개가 가능했다. 분명히 연의를 기반으로 했고 주인공도 유비인데 한중일 통틀어 최고의 촉까 작품도 되는 기묘한 삼국지. 국내에 원전 연의 번역본이 존재하지 않던 때에 나온 작품이라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를 기반으로 했지만, 똑같이 요시카와 본을 원전으로 삼는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와 비교해봤을 때 캐릭터 묘사나 전개가 전혀 다르다는 점에서 고우영의 능력이 드러난다.

그리고 여포를 아버지 킬러 패륜아에 들창코 추남으로 묘사했다. 사실 정사나 연의나 일관되게 여포를 표리부동하며 어리석고 무분별하게 처신하는 인물로 적고 있으므로 따져보면 크게 벗어난 해석은 아니다. 하지만 작금 일본, 중국쪽 삼국지 작품들이 여포를 로맨티스트 내지는 강하고 순수한 무인으로 긍정적으로 그리는 경우가 워낙 많다보니 현대에 들어선 유독 튀어 보인다. 국내에 어느정도 알려진 삼국지 창작물 중에 여포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거의 유일한 작품. 정사를 꽤 반영했고 여포의 어리석은 면을 여과없이 드러낸 중국드라마 삼국조차 여포를 순진하고 한 여인만을 사랑하는 로맨티스트로 그리고 있다. 따져보면 이건 정사도 연의도 아니고 기타가타 삼국지를 시작으로 한 일본쪽 삼국지의 영향이다. 그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인중 여포라는 말도 있는 미남자 여포를 작품 전체에서 손꼽히는 수준의 추남으로 만든 것은 고우영 삼국지만의 특색이라 하겠다. 또한 동탁을 죽이는데 성공한 직후 초선이 자결하는 장면은 앞에서 언급한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를 기반으로 했는데, 연의 원작에서는 이후에도 초선이 등장하므로 조금 모순이 생긴다. 이를 고우영 삼국지에선 이후 여포가 장연을 토벌할 때 거둔 장연의 조카딸이 초선과 매우 닮아서 그녀를 초선처럼 대우한다는 설정으로 해결했다.

다만 일부 해석들은 지금 시대에 이르러서는 얼치기 삼국지 논객들에게 악의적으로 재탕되기도 하는데, 어디까지나 삼국지연의를 기반으로 하고 만화에 재미를 주기 위한 재해석을 하던 고우영과 자료 찾아보기 훨씬 쉽게된 지금에 와서 정사 삼국지까지 엉터리로 인용하고 연의와 정사와 자신의 망상을 마구 뒤섞으면서 왜곡을 일삼는 무리들은 경우가 다르다.

황건적에 "옐로 클럽"이라는 닉네임을 붙인 센스는 지금 봐도 발군. 더군다나 당시 잘 알려져 있던 히트곡인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라는 노래를 황건적의 군가로 활용한 것은 최고의 센스를 자랑한다. 그 외에 

미소년 제갈량, 심심찮게 나오는 총기 등 21세기의 시각으로 봐도 재밌는 부분은 많다. 중간중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많은 영화나 역사상의 사건들, 심지어 성경의 패러디가 들어가 있는데 전혀 위화감이 없다. 가령 조조와 여포의 전투에서 여포가 매복에 걸리자 조조군 장수중의 하나가 돌을 던지면서 '너희 중에 마음속으로 간음하지 않은 자 저 여포 돌로 쳐라'라고 한다. 그리고 장각이 오병이어를 두고 능력이 모자라 딱 맞게 못만들고 열두 광주리나 남게한 거라며 예수를 자기보다 무능하다고 씹기도 하고, 해설과 장각이 논쟁을 벌이는 장면도 있다. 특히 우길은 빼도박도 못하게 예수의 모습과 행적을 모티브로 삼았다. 더 웃긴건 손책은 바리새인 포지션으로 삼았다는 점. 애초에 등장인물 설명에 이렇게 나온다. 그리고 손책이 우길을 죽이라 명령한 후 심한 악몽에 시달릴 때 손책의 대사가 '그 오리엔탈 지저스 크라이스트… 우… 우...' 하는데 옆에 있던 신하 왈 "우영이요?"

그 외에도 각종 드립의 향연은 1970년대 작품이라는 것이 전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오늘날의 웬만한 인기 웹툰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아니 그 이상의 센스를 자랑한다. 추격당하는 조조에게는 여지없이 "좃조 잡아라"라고 한다든가, 몸을 사리는 유비에게 조조가 "보이 조지 같은 놈"이란 드립을 친다든가... 제갈양이 유비에게 자신들이 조조와 손권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하는 '세번째 다리'역할을 해야 한다고 하니 장비가 '지금 세번째 다리라고 하셨소?'하고 반문하고 그 다음 웃음을 참다가 바깥에 나가 대놓고 크게 웃는 장면이 있는데 천연덕스럽게 '작가인 나도 장비가 왜 웃는지는 모름'이라고 해놨다.


관우가 조조로부터 떠나며 관문을 지날 때 관문을 지키는 장수가 "쿼바디스?"하고 묻는다거나, 조조의 권세가 극에 달하자 "나는 힛틀러보다 위대하다"고 선언한다거나. 조조의 서주대학살은 장면 자체는 한 컷만 묘사되지만, 인디언을 학살한 솔저 블루나 베트남전의 밀라이 학살에 대놓고 비유된다. 다시 말하지만 원작을 연재할 당시는 1970년대였다!! 또 계륵의 일화에서는 조조가 '월남전에서 키신저가 이랬을 테지…'라고 매우 적절히 비유한다. 심지어 도인 좌자는 아예 UFO 탄 외계인으로 나온다. 게다가 중간중간에 은근슬쩍 작가의 다른 작품 광고까지 하고 있다.


또한 고우영이 관우의 굉장한 팬이어서 관우가 활약하는 부분은 작화의 디테일이 300%쯤 올라간다. 아예 관우 혼자 다른 만화 등장인물처럼 그려진다. 이름에 같이 "우(羽)"자 들어간다고 기회날때마다 괜시리 으쓱으쓱한다. 다른 작가가 했다면 '자뻑이네, 설레발이네, 밥맛이네.' 하면서 욕 먹었겠지만, 아니 그 이전에 어떤 간덩이가 부은 작가가 관공과 작가 자신을 동격에 놓을까? 하지만 이런 점 마저도 작품 속에 무서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갔다. 작가 독백 자체가 이야기 흐름을 끊어먹기 십상이라는 생각하면 경탄을 넘어가서 오싹해질 정도의 실력이다. 일반적으로 작가가 필력이 달려서 어쩔수 없이 이야기의 개연성을 억지로 끼어맞추기 위해 쓰이는 경우가 많으며, 대부분 작품의 질을 심각하게 저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만은 예외로, 고우영의 이야기 풀어나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지라 오히려 작품을 맛깔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예를들어 호로관에서 관우와 여포가 죽이네 살리네 하고있는 중간에 고우영이 갑툭튀한후 '나는 관우와 이름이 같은 우자라능!' 이러고 계시는데도 독자들은 전혀 위화감을 받지 않으면서 책장 넘기기에 바쁠 정도로 자연스럽다. 이거 하나만 봐도 고우영의 공력이 짐작이 간다.

캐릭터 설정을 그렇게 세밀하게는 하지 않아서 단역까지 일일히 신경쓰지는 않는다. 사도 왕윤은 첫 등장에선 할아버지로 나오지만 초선 에피소드부터는 미중년으로 탈바꿈한다. 워낙 원작의 등장인물이 많다보니 같은 얼굴을 돌려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장비 그려놓고 애꾸눈 안대 씌우면 하후돈이다.

여담으로 고우영 특유의 페르소나가 듬뿍 함유되어 있어 하드코어한 내용이 많아 이런 묘사를 거북해하는 사람들에겐 맞지 않는다. 그림체에 가려져서 그렇지 굉장히 자극적이고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오는 작품이다. 초선이 자살하자 여포가 초선의 시체를 시간하는 장면, 이각과 곽사의 부인들이 계모임을 했다가 시기질투 나서 다른 여편네들을 참수한 뒤 그 머리통을 일렬로 늘어놓는다든가, 유부인이 원소의 애첩들을 몰살시키는 과정이라든가. 연소자관람불가, 그러니까 나무위키식으로 표현하자면 검열삭제라는 단어를 남발할 정도의 하드코어한 표현이 많다. 전술한 칼질은 이래서 당했다. 대표적으로 화타의 심문 장면. 조조가 화타를 그냥 죽여버리는 것과 달리 여기서는 개드립 한번 쳤다고 온갖 고문을 하다 죽이는데, 고통 받는 화타에게 고문관이 발가락을 잘라도 살아있군요. 그렇다면 다른데를 잘라보겠습니다와 같은 엽기적인 대사를 하는 걸로 유명하다. 블랙코미디적 요소를 위해 없는 사건도 만들어버리는 정도.

의외로 사람들에게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1978년에 발행한 현재 우리가 대부분 보고 있는 성인용 삼국지 말고도 1979년에 발매한 아동용 삼국지도 있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아동용이기에 대부분의 내용을 생략했고 그 특유의 독특한 해석이나 유머는 찾아볼 수 없다. 단, 작화에 있어서는 성인용 삼국지에 비해 정통적인 극화체로 고우영의 그림 실력을 유감없이 감상할 수 있다.

참고로, 관우가 자신의 솜씨를 칭찬하는 조조에게 장비는 자기보다 더 실력이 좋다고 말하자, 조조가 장비의 이름을 소매에 적으라고 말하는 떡밥을 회수한 거의 유일한 작품이다.

제갈량의 곱상한 이미지를 정착시킨 작품이기도 한데, 이는 후배 작가들에게 드러난다. 최훈 작가의 삼국전투기에서는 아예 여자로 나오며 그 이름은 고우영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제갈양'이다. 유비는 아예 제갈양 양이란 개드립까지...... 또한, 학습만화가로 유명한 서영수 작가의 삼국지에서는 고우영의 제갈량의 이미지를 그대로 따와 자신의 그림체로 그려냈다.

다만 만화의 칸 크기가 상당히 작기 때문에 오래 읽으면 눈의 피로가 금방 오는데, 이는 해당 만화가 스포츠 신문에 연재됐을 당시의 크기를 그대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사실 이 때문에 고우영 삼국지를 피하는 사람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