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11.
10위 태조
우왕과 최영장군이 요동을 정벌하라고 군사 오만을 내어주니 압록강 위화도에서 이성계는 조민수와 의기투합해서 회군하여 개경을 함락시키고 우왕과 최영을 사로잡음. 우리의 고토인 요동 벌판을 찾았어야 하는데 안타깝습니다.
역사적으로 최후의 원정이 좌절되면서 고토를 찾지못하고 압록강 이남으로 확정되는 순간입니다.
9위 세조
이분은 너무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삼촌이 조카를 죽이고 왕이되었다는게 너무 잔인하고 태종이 킬러의 본능으로 정리? 한 훈구파와 공신세력을 다시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이후 왕권이 약하된다는 점에서 한명회같은 세도가가 등장합니다.
8위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청나라에 끌려가 8년이나 볼모생활도 했고 독일의 선교사 아담샬을 만나서 서학이나 천문, 세계관을 보았는데 아버지 인조에 의해서 독살당하죠.
신권이 강해서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어도 국정을 개혁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였다는 관점에서 보았을때 아까운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청에 볼모로 생활할때 세자빈 강씨와 함께 당시 명과 전쟁중인 청나라가 물자가 귀하다는것을 관파하고 사업수완을 발휘해서 많은 수익을 얻어 청에 끌려온 조선의 백성들을 많이 구제해 주었다고 하죠.
7위 인조
이분은 왜 반정을 했는지 전혀 도움이 되지않는 분입니다.
물론 신하들이 반정을 했지요. 이괄의 난이 일어났고 다시 병자호란으로 삼배 구고두레의 치욕을 겪었습니다.
사상 첫 공식적 항복인 삼전도에서의 항복의식이였습니다.
한 번 절을 하고 세번 머리를 조아려서 세번을 한다해서 삼배구고두레라고 하는데 여진족의 의식이라고 합니다.
광해군이 일궈놓은 양면정책을 무시하고 나대다가 일을 치룬거죠. 여기에 아들을 못믿어 귀인조씨와 함께 소현세자와 세자빈강씨 그리고 손자까지 죽여버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6위 사도세자
당시 노론 소론 남인의 당파싸움에서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세자가 왜 죽어야 했는지 명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세자가 소론의 세력을 지지했다고 보기도 힘들고 오히려 노론의 의견을 존중했다는 것이고 영조가 무엇때문에 세자를 죽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학자 이덕일 선생은 쿠데타실패라고 주장하셨는데 진의를 알기는 힘들다.
5위 연산군
시절에는 조선의 사화가 두번이나 일어나는데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그것이다.
연산군은 폭군으로 유명한데 어머니 원수를 갚은것이 갑자사화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신진사류의 기를 꺽을려는 의도가 있었다.
자신의 왕권을 지켜 임사홍같은 궁중파와 함께 폭정을 이어갈려면 선비들의 기를 꺽어 놓을 필요가 있었죠. 그전에는 무오사화에서 김종직의 제
자인 김일손이 사관으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다는 이유로 훈구파가 사림파를 눌러버리죠.
훈구파와 사림의 대립에서 연산군은 훈구파와 손을 잡았다고 할수 있습니다.
향년29세에 죽었으니까 참 젊은나이에 많은일?을 하다 갔습니다.
4위 선조
많은 좋은 신하가 있음에도 활용을 못하고 국난을 초래한 왕으로 그 찌질함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조의 핸디캡을 보면 조선왕 최초의 서자출신 왕이라는 점과 직계혈통이 아닌 방계혈통(할아버지 아버지 나 손자로 이어지는게 아니고 형제나 조카의 혈통)이라는 점에서 자신감이 없었다고합니다.
정여립사건으로 기축옥사를 계기로 환국을 함으로써 왕권을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보고 이 시점에서 외교적인 면은 너무 모자라지 않았나 싶다.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고 내부사정으로 명정벌을 할려고 하는것을 알면서도 왕으로서 중심을 잡지 못한것은 선조의 크나큰 과오라고 할 수 있다. 7년의 지옥을 겪어야만 했으니까말이죠.
전쟁중에 모습또한 이순신과 유성룡의 탄핵등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찌질함이 도를 지나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열등감이 극에 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주로 몽진을 가야만 한 사태는 왕으로서 할 행동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3위 철종
비록 왕족이라하나 몰락한 왕족이며 강화도에서 평민으로 살고있는 사람을 데려와서 소위 세도정치의 희생양으로 이용당했다는점에서 안타깝다는 말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2위 명성왕후
민씨세력이 외척이라는 점에서 전혀 도움이 될 수가 없다는게 권력의 속성인가요. 고종은 아버지와 민씨세력과 싸워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권력을 놓지 않고 명성왕후도 욕심이 많았죠. 고종의 협력자가 되었르면 이나라 운명이 바뀌지 않았을까요. 명성왕후의 최후가 정말 안타깝습니다.
1위 고종
위에 쓴대로 아버지와 아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광무개혁으로 황제가 되었으나 너무 늦은 과정이였고 고종 스스로 외세에 저항하고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하는등 국가 존립을 위해서 노력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황태자들도 자주성을 잃지않고 외세에 저항한 분들이 많았죠. 고종이 대한제국을 만들어서 현재 한국으로 계승 된거죠. 여기서 한은 중국 춘추시대 한나라와 한자는 같으나 전혀 관계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