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에 얽힌 비극의역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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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에 얽힌 비극의역사2


2014. 12. 26.

'꿈의 구연'으로 불리는 월드컵축구대회서 정상에 오른 팀에게 주어지는 우승컵에도 파란만장한 사연이 담겨 있다.
지난 30년 첫 대회와 34년대회서 2연패한 우루과이가 품에 안은 트로피는 프랑스의 조각가 아벨 라플레가 제작한 월드컵. 순금 4kg으로 만든 이 컵은 높이가 38cm로 호두나무 받침대위에 날개 달린 여신이 두손으로 8각형컵을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


예술품을 연상케 하는 이 컵은 그러나 2차세계대전 막바지에 나치가 이탈리아에 진주하자 구두상자 속으로 피신하는 수난을 겪는다. 이탈리아축구협회의 오토리노 바라시부회장이 나치의 강탈을 우려해 컵을 구두상자속에 담아 자신의 침대밑에 숨겼던 것.

이 컵은 46년부터 국제축구연맹(FIFA) 초대회장인 줄리메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줄리메컵으로 명명되지만 두차례나 도난당한 끝에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66년 7월3일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전시중에 없어졌다 1주일만에 애견과 함께 산책하던 템즈강의 바지선인부 데이비드 코베트(당시 26세)에 의해 발견된다.

코베트는 자신의 아파트 울타리밑에 신문지에 싸인채 버려진 컵을 찾아내 3천파운드의 보상금을 받았고 애견과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줄리메컵은 70년 통산 3회우승을 차지한 브라질이 영구 소유하게 됐으나 83년 12월19일 복면을 한 강도에게 또 도난당한다.

경찰은 리우데자네이로 북부 빈민가에서 컵을 녹여 금으로 팔아먹은 사실을 확인하고 용의자 3명을 붙잡았지만 용의자들은 증거불충분으로 플려났다.
74년 서독대회부터는 우승컵이 FIFA월드컵으로 바뀌었다. 이탈리아 조각가 실비아 가자니의 작품으로 직경 15cm의 받침대 위에 두 여인이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형상. 높이 36cm로 4.97kg의 금18K가 들어 갔고 보험(25만 스위스프랑)에 들어 있다.

이 컵은 FIFA가 영구히 보관하고 우승팀에게는 실물보다 조금 작은 모형을 준다. 컵 하단에 우승국을 새겨 넣는데 17개국을 넘을 수 없어 2038년대회가 끝나면 퇴역해야 할 운명.



베르네 전쟁


지난 54년 제5회 스위스월드컵에서는 '베르네전쟁(The Battle of Berne)' 으로 불리는 최악의 폭력사건이 일어났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벌어진 8강전에서 브라질과 만난 헝가리는 전반 3분만에 히데구티가 선제골을 터뜨려 기세를 올린다.그러나 히데구티가 골을 넣는 과정에서 브라질선수에게 유니폼 하의가 찢기는 반칙을 당한 것이 빌미가 돼 두팀 선수들은 주먹다짐을 벌인다. 베르네전쟁의 서막이 열린 것.

경찰이 동원돼 가까스로 분위기는 가라앉았지만 이후 두팀 선수들은 상대방을 사정없이 걷어차는 등 격투기를 방불케 하는 격돌을 거듭한다. 이 와중에서 브라질의 산토스가 전반 17분 헝가리의 파울로 얻은 페널티킥을 멋지게 차넣자 두팀의 플레이는 더욱 거칠어져 경기는 결국 이전투구로 변하고 만다.

최종스코어는 헝가리의 4-1 승리. 5골 가운데 3골이 페널티킥에 의한 것이었고 헝가리 1명, 브라질 2명이 퇴장당한데다 두팀을 합쳐 10명이나 부상을 당할 만큼 혈전이었다.두팀의 전쟁은 그라운드에서 끝나지 않았다. 경기가 끝난 뒤 브라질선수 한명이 탈의실에서 누군가에게 병으로 얼굴을 얻어맞는 기습을 당했고 흥분한 브라질 선수들은 헝가리의 탈의실을 급습해 패싸움을 벌인 것.

이같은 폭력사태에 대한 조직위원회의 대응은 거의 코미디수준. 조직위원회는 헝가리와 우루과이가 준결승전에서 맞붙게 되자 두팀 선수들에게 쇠로 만든 헬멧을 쓰도록 한 것. 이 경기서 헝가리는 연장전 끝에 우루과이를 4-2로 꺾고 결승에 올랐지만 서독에 2-3으로 역전패해 32연승행진을 멈추며 준우승에 그친다.



멕시코인들이 선사한 브라질 우승


지난 70년 제9회 멕시코월드컵대회서 브라질은 사상 처음으로 통산 3회우승을 달성, 줄리메컵을 영원히 소유하게 된다. 브라질이 위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펠레,자이징요, 알베르토 등 불세출의 스타를 거느렸기 때문이지만 브라질축구를 광적으로 좋아한 멕시코인들의 숨은 성원도 큰 몫을 했다.


이 대회의 우승후보는 남미의 브라질,우루과이와 유럽의 이탈리아,서독,영국 등이었다.
이 때문에 예선 3조에 속한 브라질과 영국의 경기는 사실상의 결승으로 불릴만큼 지대한 관심을 불러 모았다. 특히 개최국인 멕시코인들은 자국팀의 경기보다 자신들의 우상인 브라질과 영국의 한판승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다혈질인 멕시코인들은 브라질을 돕기위해 전전긍긍하다 마침내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긴다. 경기 전날 영국선수들이 잠을 자지 못하게 만든 것.
멕시코의 극성팬들은 영국팀숙소인 힐튼호텔로 몰려들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자동차경적을 울려대는 등 밤새도록 온갖 소음을 내 잠을 설치게 만들었다.

산소가 부족한 고원인데다 기온까지 섭씨 40도에 가까워 가뜩이나 정신적·육체적으로 시달림을 받던 영국선수들은 잠까지 설치는 바람에 최악의 컨디션에서 브라질을 상대해야 했다.
사면초가에 빠진 영국은 정면승부를 피하고 GK 골든 뱅크와 수비수 보비 무어를 앞세워 비기기 작전으로 맞섰지만 결국 0-1로 무릎을 꿇고 만다.

멕시코인들의 측면지원으로 고비를 넘긴 브라질은 준결승에서 우루과이를 3-1로, 결승에서 이탈리아를 4-1로 연파하고 꿈에 그리던 줄리메컵을 영원히 조국의 품에 안긴다. 브라질의 승리인지 멕시코인들의 승리인지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은 대회였다.



멕시코가 도둑질한 프리킥

70년 제9회 멕시코월드컵대회서 엘살바도르는 멍청한 심판 때문에 프리킥을 도둑맞는 황당함을 당한다.
지역예선에서 온두라스와 2천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축구전쟁까지 치른 끝에 가까스로 본선무대를 밟은 엘살바도르는 조 예선 2차전에서 홈팀 멕시코와 맞붙었다. 1차전에서 엘살바도르는 벨기에에 0-3으로 졌고 멕시코는 소련과 0-0으로 비겨 두팀 모두 결코 물러설 수 없는 한판이었다.

어이없는 사건은 전반 종료직전에 일어났다. 엘살바도르의 공격수 마르티네스가 멕시코 미드필드를 파고 들어가자 멕시코 수비수 곤잘레스가 거친 파울로 마르티네스를 넘어뜨렸고 주심은 당연히 엘살바도르의 프리킥을 선언했다.

문제는 이때 일어났다. 엘살바도르 선수들이 쓰러진 마르티네스가 걱정이 되는 듯 그의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틈을 타 멕시코 수비수 페레스가 주심의 눈을 피해 공을 냅다 차버린 것. 관중들도 어이없다는 듯 폭소를 터트리는 사이 축구공은 멕시코의 파실라를 거쳐 발디비아에게 연결됐고 발디비아가 엘살바도르의 골문 안으로 차넣었다.

칸딜 주심은 어이없게 골인을 선언했다. 엘살바도르 선수들의 격렬한 항의가 이어졌고 멕시코 관중들조차 야유를 퍼부었지만 주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기가 꺾인 엘살바도르가 후반에 3골을 추가로 내줘 끝내 0-4로 무너지자 다혈질인 엘살바도르 응원단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난동이 일어날 것 같은 기운이 역력했다.

이때 멕시코 응원석에서 한발의 총성이 울리며 스타디움은 순식간에 정적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 멕시코인이 "주심이 엉터리다. 우리를 너무 봐준 것 같아"라고 말하자 옆에 있던 멕시코 극성팬이 그를 권총으로 사살해 버린 것.심판의 멍청한 경기운영이 유혈극을 빚어낸 셈이 됐다.



악명높은 훌리건, 자승자박 격리 응원


월드컵 대회가 날로 인기를 더해가면서 응원전도 과열을 넘어 폭력사태로 얼룩지자 급기야 과격한 응원단을 격리시키기 위해 대회가 섬에서 치러지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90년 이탈리아 월드컵대회.대회 조직워원회는 월드컵이 유치의 기쁨도 잠시뿐,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축구대회마다 골칫거리가 되고 있는 영국의 광적인 축구팬 훌리건 때문이다.

이들의 난동을 봉쇄하는 것이 대회를 훌륭히 치러내는 최우선 과제였다.
이탈리아 정부는 고심끝에 병력을 동원한 사전 봉쇄만이 최선의 대비책이라고 예단, 강공 작전을 세웠다.
월드컵 경비에 동원한 4만5천명의 병력가운데 3천5백∼5천명은 언제나 훌리건의 동태를 감시하는 전담요원으로 배치했다.

대회가 임박하자 조금이라도 난동의 기미만 보여도 서슴없이 최루탄을 퍼붓고 닥치는대로 구속했다.
특히 전통적으로 과열되기 쉬운 영국과 네덜란드전은 아예 살다니아섬의 칼리아리에서 치러 두나라 응원단을 섬에 가두는 작전까지 감행했다.
이로인해 지나치게 영국팬들을 단속하지 않았느냐는 비판도 있었으나 자승자박이라는 것이 세계 여론이었다.

훌리건이란 원래 건달. 깽패를 뜻하는 영어로 런던에 살고 있던 건달인 아일랜드인의 이름에서 유래됐다고 한다.이들은 경기장에서 뿐만아니라 거리의 술집에서 소란을 피우고 가게의 유리창을 깨부수는 등 온갖 행패를 자행해 악명은 높아만 갔다.

마침내 85년 브뤼셀에서 열렸던 유럽 챔피언스컵 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 유벤투스(이탈리아)와 리버플(영국)의 경기에서 응원단끼리 충돌해 39명의 사망자를 냈고 온 세계로부터 비난과 경계의 대상이 됐다.94년 미국 월드컵 조직위원회가 영국이 지역예선에서 탈락하자 쾌재를 부른 것도 이들의 난동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월드컵에 얽힌 비극의 역사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