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계여행을 하고 싶어 난자를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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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계여행을 하고 싶어 난자를 팔았다


2014. 11. 20.

병원 가운. 양말. 이 두 가지만 입은 채 냉동고 같은 수술실로 들어갔다. 돌아서기에는 늦었다. 낯선 사람들이 수술을 할 것이다. 약간 긴장감이 느껴졌다.



20대 시절 언젠가 맨해튼의 어퍼웨스트사이드 극장에 앉아 영화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던 순간이 기억난다. 보통 때는 무시하던, 영화 상영 전에 나오는 광고가 눈에 잠깐 띄었다. "난자 기부를 고려한 적 있으세요?"


지나치는 이야기로 들은 적은 있었지만 어떤 절차로 난자 기부가 성립되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자기 난자로 만들어진 존재가 지구 어디엔가 존재하는데도 전혀 무관한 사람들도 있다는 생각이 그냥 이상했다. 영화가 시작하자 잊어버렸다.


그리고 텍사스에서 몇 년 살다가 뉴욕으로 다시 돌아왔다. 정규직을 찾고 있던 나는 공백을 아르바이트로 때우고 있었지만 사실 생활이 어려웠다. 돈 벌 다른 방법이 또 없을까, 고민하다가 난자 기부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렇게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어차피 인류 모두가 연결되어 있지 않나?


누군가를 매우 기쁘게 하기 위하여 내 손톱보다도 작은 세포 한 개를 기부하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리고 난자 기부 절차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를 시작했고, 기부자로 신청하게 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내 난자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장기 세계여행을 떠나고 싶어 난자 기부를 한 번 더 하기로 결정했다. 그렇지 않으면 몇 달이 아니라 몇 년 동안 돈을 모아야 여행을 갈 수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첫 난자 기부의 경험


처음 난자 기부를 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 절차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기부 경험담들도 읽고 또 내 나름대로 조사를 많이 한 다음에 신청을 했다. 인터넷엔 끔찍한 이야기도 가끔 떠돌았다. 그래서 더 조심해서 인공 수정 시설을 선별했다. 즉 수령인만큼 기부자를 우대하는 평 좋은 곳을 찾았다. 다행히도 좋은 시설을 찾게 되었는데 내 자격이 그곳 조건에 맞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부 주기에 맞추어 2주에서 3주간 매일 시설에 들를 수 있어야 하는 21세에서 33세 여성. 바로 나였다.


첫 단계는 나이와 키, 몸무게, 인종, 직업 그리고 기본 의료 정보에 관한 온라인 질문서였다. 질문서를 작성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 기억이 난다. 너무 뚱뚱하거나 너무 늙었거나 너무 평범하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혹시 수령인은 매우 날씬한 모델 같은 여자의 난자만 원하지 않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약 1개월 후, 혈액검사와 심리 조사를 위해 직접 시설을 방문해달라는 이메일이 왔다.


병원은 현대적인 느낌의 편한 곳이었는데 직원들은 친절했고 전문성이 엿보였다. 첫 번째로 피를 조금 뽑았는데 그 절차는 간단했다. 다음엔 O/X 형으로 된 약 200개 문제의 심리 문항이었는데 길고 지루했다. 환상을 보는지, 분노 또는 자부심 문제를 겪고 있는지, 정서불안 문제는 없는지, 그 외에도 난해한 정신질환 관련된 질문이 계속되었다. 질문서를 다 끝냈고 나니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지만 동시에 내가 정말로 정상인가 하는 생각도 언뜻 들었다.


몇 주 후, 다음 단계를 위해 병원에 다시 방문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유전학 전문가와 심리학자, 그리고 구체적인 신체검사가 계획되어있었다. 온갖 질병과 장애 검사를 위해 피를 더 뽑았다. 난 건강한 편이었지만 무슨 병이 있는지 아니면 유전자에 문제가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실험을 받는 경험 자체가 약간은 스트레스였다.


의사에게 내 병력과 성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종합 검사와 산부인과 진료 또 질의 초음파까지 받았다. 초음파 과정은 콘돔으로 덮은 변환기를 젤(gel)로 바른 후 내 질 속으로 넣는 것이었다. 의사가 변환기를 움직이는 동안 내 난소와 자궁을 볼 수 있었다.


변환기가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장기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과정이 약간 불편하기도 하였지만 처음으로 내 인체 안을 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아름다운 자궁을 가졌다는 의사의 말에 자긍심이 생기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검사가 다 끝나고 의사 사무실에서 다시 상담을 받았다. 기부와 관련한 단기적인 또 장기적인 후유증에 대해 설명을 받았다. 단기적으로는 기분 변화, 몸무게 증가, 복부 팽창, 주삿바늘에 의한 멍, 두통, 그리고 골반통 같은 것을 앓을 수 있다고 했다. 즉 아주 심한 생리통 같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액체 증가로 난소가 비틀어지면서 혈류를 막는 최악의 경우에는 수술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확률은 매우 낮았지만 가능성은 있다는 뜻이었다. 계속해야 하나 하는 걱정도 잠깐 들었지만 의사 본인은 이제까지 그런 나쁜 경우를 경험한 적이 없다고 하는 바람에 마음을 놓았다. 


유전자 전문가와의 상담은 간단했다. 가족 병력을 설명했는데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연세, 몸무게, 키, 그리고 질병에 대한 사항을 질문 받았다. 그리고 형제 중에 아이를 가진 사례가 있는지 물었다.


심리학자와의 상담도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 간단했다. 의사의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기부 과정은 물론 난자 기부 행위라는 현실을 내가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다음 단계로 관리 담당자에게 난자 기부와 관련한 법률사항을 들었다. 내가 받는 돈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기부 과정에 대한 '수고비'이지 난자 자체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왜냐면 난자에 대한 값이라면 비도덕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수령인이 만약에 난자 기부를 중간에 중단하고자 한다면 그때까지의 내 수고에 비례한 돈을 받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대로, 주입되는 약에 몸이 반응을 안 해서 난자를 생성하지 못하면 아무 소득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또 난자에 대한 권리와 부모 권리를 포기하는 각서에 서명해야 한다고 했다. 난 수령인의 신분을 알 수도 없고 기부한 난자가 성공적으로 이식되었는지도 알 수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의 법에 따르면 기부된 난자로 태어난 아이가 기부자와 연락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만약에 법이 바뀌어 아이가 나와 연락하고 싶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녀는 내게 물었다. 모든 약정에 동의한 후, 만약에 법이 바뀌어 아이가 연락을 하고 싶다고 하면 호의적으로 생각하겠다고 말했다. 


다음 단계는 나와 수령인을 짝짓는 일이었다. 수령인은 여러 기부자에 대한 자료를 받는데 병력은 물론 키, 몸무게, 체형, 피부색, 머리색, 눈 색채, 인종, 더 나가서 코, 턱, 눈 모양, 볼, 입, 손 크기까지 아주 구체적인 성향에 대한 자료를 받는다. 수령인은 또 기부자의 취미, 즉 운동이나 음악에 대한 관심을 알게 되고 기부자의 동의하에 기부자의 아기 사진도 받을 수 있다.


나에 대한 모든 정보가 평가되는 것이었다. 여러 여자들이 내 자료를 보며 내 난자를 선택해 아기를 가질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초현실 적인 느낌이었다.


기부자로 선택되자 '시작 날짜'가 정해지고 수령인과 나의 생리주기를 맞추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병원에 생리 첫날을 알리고 제공된 피임약을 먹기 시작했다. '시작 날짜'가 되자 새로운 신체검사와, 혈액검사, 그리고 질의 초음파를 해야 했고 드디어 내 '권리'를 포기하는 약정에 서명을 했다. 간호사는 다음 2주 동안 투약해야 할 약에 대해 설명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보여주었다.


다음 2주 동안 나는 매일 6시에 일어나 지하철로 병원에 출근하듯 했다. 도착해서는 혈액검사와 질의 초음파를 받았다. 오후에는 간호사가 전화로 그날 투약할 약과 양을 알려줬다. 다수의 난자를 양성하기 위해 매일 밤 같은 시간에 복부 또는 허벅지에 주사를 넣었다. 이 기간 동안은 비타민과 영양제는 물론 다른 어느 약(꼭 필요할 때 타이레놀을 제외하곤)도 먹으면 안 됐고, 운동과 성관계 및 음주도 금지되었다.


맨 처음 투약을 하는 순간 매우 긴장했다. 주삿바늘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은 없었지만 정작 내 몸에다 내가 직접 주사를 찔러 넣어야 한다는 점이 약간 두려웠다. 필요한 약을 준비하여 화장실로 향했다. 한 손으론 허벅지 바깥 부분을 잡고 한 손으론 주사기를 든 후 정확히 9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눈을 꾹 감은 후 숨을 모아 주사기를 찔렀는데....거의 아무 느낌이 없었다. 바늘을 좀 더 깊숙이 밀어 넣었더니 약간 따가운 느낌이 있었는데 어느새 끝났다. 적어도 다음 밤까지는.


2주간의 투약 동안 복부에 물이 찬 기분이 들었고, 아래 배는 딱딱해졌다. 또 기분이 요동했고, 허벅지와 복부에는 바늘 자국 투성이었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사실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그런 신체적인 요소가 아니라 출근 전에 매일 병원에 들려야 하는 것이었다. 자그마치 한 시간이 걸려서 말이다.


혈액검사와 초음파로 내 난자가 채취될 준비가 되었다는 결과가 나오자 병원에서는 '방아쇠 투약', 즉 성숙난자를 난포에서 놓아주는 약을 투약하라고 마지막 전화가 왔다. 마지막 투약을 하고 나니 자축이라도 하고 싶은 느낌이었다. 더는 바늘을 찌를 이유가 없고 아침마다 병원에 갈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아침에 전화가 왔다. 어느 병원으로 48시간 후에 가야 하는지 알려주면서 수술 후에 누가 날 데리러 올지 물었다.


수술 전날 밤 12시 이후로는 물을 포함한 모든 음식이 금지되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병원에 등록하고 체외수정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가운과 양말과 바지로 갈아입은 후 소변을 보라고 하였다. 호르몬 수치를 측정하기 위하여 마지막 혈액검사가 있었다. 정맥 주사를 꽂은 후 기다리라 하였다. 약 30분 후 더 작은 대기실로 옮겨졌고 그리고 몇 분 후엔 어느 간호사가 나를 수술실로 안내했다.


병원 가운. 양말. 이 두 가지만 입은 체 냉동고 같은 수술실로 들어갔다. 돌아서기에는 늦었다. 낯선 사람들이 수술을 할 것이었다. 긴장감이 약간 느껴졌다. 나이가 지긋한 친절한 간호사가 가운 뒤를 풀은 후 누우라고 하였다. 엉덩이는 수술대 구멍에 위치하고 양 발은 철제 등자에 올렸다. 마취 전문의가 정맥을 찾을 수 있게 정맥 주사가 꽂혀있는 왼팔은 받침대에 올려졌다.


고맙게도 간호사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자기소개를 마친 마취 전문의는 그 차가운 액체를 내 몸에 투입했다. 순간, 시야가 흐리멍덩해지면서 수술실이 기우는 느낌이었고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깨어나 보니 다시 체외수정 대기실이었다. 춥고 피곤하고 허약한 느낌이 아주 심한 생리통 같은 아픔이었다. 타이레놀과 함께 먹으라고 쿠키와 과자, 오렌지 주스를 간호사가 주었다. 그때 즈음 친구가 날 데리러 왔고, 병원을 떠나기 전에 다음 48시간 동안 어떻게 몸조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긴급 상황 시에 필요한 전화번호도 받았다. 마취에서 깬 후 약 30분 만에 난 병원에서 걸어 나왔다. 천천히 하지만 혼자서 말이다.


집에 돌아와선 몇 시간 잠을 잤다. 나머지 하루는 휴식을 취하면서 보냈다. 다음 날은 보통 때처럼 출근했는데 약간 피곤한 느낌 빼고는 별 차이가 없었다.


수술 다음 날 간호사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상태가 어떤지 묻고 다음 예약을 잡았다. 검사 결과는 정상이었고 다음 번 생리 후에는 모든 걸 정상대로 해도 된다고 하였다. 즉 운동, 음주, 성관계 등 말이다. 


나는 수고비를 받았다. 그리고 약 40주 후에는 내 도움으로 새로운 생명체가 이 세상에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병원을 나왔다. 


이 글은 Randi D의 블로그를 번역한 글입니다.